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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하고 다양한 표면과 역설을 낳는 시뮬라크르

이선영


풍부하고 다양한 표면과 역설을 낳는 시뮬라크르


독창성은 새로움과 진보의 패러다임이 지배했던 근대의 중요한 가치로 평가되어 왔다. 그것은 예술의 영역이 아닌 곳, 가령 산업 기술의 영역에서는 특허라는 개념으로 통용되며, 고수익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선점 및 독점 효과를 낳는다. 발견보다는 발명에 방점을 찍는 독창성과 특허라는 개념은, 수많은 복제물의 기원이 되는 유일한 원본의 가치를 내포한다. 플라톤이 이데아라는 지고한 이상과 그것의 희미한 복제를 구별한 이래, 이러한 이분법은 인간의 뇌리 속에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이루어 왔고, 사회의 체계와 질서가 확립되고 유지하는 척도로 강력하게 작용해 왔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근대를 열어 제친 구텐베르크 인쇄술 같은 기술 혁명을 필두로, 원본에 의해 복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복제에 의해 역으로 원본의 가치가 성립되는 기술복제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원본의 위상, 더 나아가 원본과 복제본이라는 엄격한 위계의 문제가 대두 되었다. 박물관에서 수많은 관광객들 틈에 끼어서 먼발치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두터운 방탄유리 속의 원화는 가게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낱장의 엽서에서부터 권위 있는 미술사의 책자들, 그리고 오늘날 여러 기종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복제되는 이미지들에 의해서 비로소 그 원본으로서의 지위가 확고해 진다.

사실을 말하자면, 수많은 복제들은 원본의 가치를 일깨운다. 복제가 없다면 원본도 없다. 원본과 복제의 역학 관계는 검색되지 않는 키워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이 된 정보혁명의 시대에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전 세기 말에 일어난 정보혁명은 대중들이 많이 사용할수록 더욱 커다란 이익과 영향력이 파생되는 정보를 낳았다. 그것은 자연이라는 자원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물의 소비와는 정 반대의 패턴을 보여준다. 하기야 자연 조차도 인위적 복제를 통해 재생산되는 시점에서, 복제가 가능한 것만이 원본의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역설적이다.

기술혁명에 의해 복제의 위상의 달라짐으로서, 복제에 앞선다고 간주된 원본의 위상, 그리로 양자 간의 관계 역시 다시 설정되어야할 필요가 생겼다. 원본과 복제라는 이항대립은 실재와 가상, 참과 거짓, 중심과 주변 등의 파생 개념을 낳으며 계열화 된다. 이러한 이항대립에서 원본, 실재, 참, 중심 등은 복제, 가상, 거짓, 주변 등을 그림자처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가치의 위계 서열은 지배와 억압에 근거한 경직된 질서를 낳기 때문에, 이에 도전하는 경향이 주류 철학과 예술의 이면에서 작동해 왔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시발점으로 간주된 플라톤주의, 그것에 대한 극복은 니이체로부터 들뢰즈에 이르는 현대 사상의 계보를 형성했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플라톤주의를 타파하려는 니이체를 미래의 철학자로 자리매김하면서, 본질의 세계와 외관의 세계라는 이분법의 폐지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한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의 이론의 동기는 선별하려는 의지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플라톤의 철학은 사물 자체와 그의 이미지들, 원본과 복사물, 모델과 시뮬라크르(simulacre)를 구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신화는 그 순환적인 구조로 말미암아 일종의 근거지움을 제공한다.

하나의 모델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신화이다. 이 신화는 시뮬라크르에 대한 복사물의 승리를 확보하는 것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시뮬라크르는 복사물의 복사물로 간주된다. 복사물은 원본과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시뮬라크르는 그렇지 못한 그림자이다. 복사물들이 세계를 표상한다면, 시뮬라크르는 세계를 환각으로서 제시한다. 복사는 표상과 재현의 세계관을 낳는 반면, 시뮬라크르는 표상의 세계 내에서 작동하는 본질/외관 또는 원본/복사본의 구분을 무화시킨다.

[의미의 논리]에 의하면 시뮬라크르는 퇴락한 복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재생산을 동시에 부정하는 긍정적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 어떤 모델도 시뮬라크르가 야기하는 어지러움에 견디지 못한다. 가능한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블랑쇼의 말을 통해 설명 한다; ‘이미지가 모델에 비해 이차적인 존재이기를 그치고, 속임수가 진리를 내세우고, 원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우주....단지 돌아감과 되돌아옴의 운동 속에서 본래적인 부재가 분산되며, 영원한 명멸만이 존재하는 그러한 우주...’(블랑쇼) 시뮬라크르의 작용 효과는 ‘그릇된 것’으로 간주된 것들이 가지는 최대한의 잠재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유목적이고 무정부 상태의 세계를 수립한다. 시뮬라크르는 새로운 정초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정초들을 삼켜버린다. 그것은 보편적인 와해를 가져오지만, 이는 긍정적이고 즐거운 사건이다. 명명백백한 진리의 빛을 삼키는 어두운 동굴 아래에는 ‘보다 넓고 낯설고 풍부한 지하세계가, 그리고 모든 정초 아래에는 훨씬 깊은 지하세계’(니이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동일자로의 환원이 아니라, 발산과 탈(脫) 중심화를 긍정하는 잠재력을 통해 모든 차이들에 스스로 엶으로서, 가치의 위계질서 속에서 부차적인 지위를 타파한다. 이러한 가치의 변화가 야기된 이유는, 현대성이 정착된 이래로 인위적인 것들이 차지하는 부분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강조하듯이 인공물들은 언제나 복사물의 복사물이며, 이러한 과정은 그것이 본성을 바꾸어 시뮬라크르로 전환될 때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경향은 팝아트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뮬라크르는 철학과 미학, 정치학에서 작동해 왔던 재현적 세계관을 위협한다.

원형과 복제로 나뉘어진 이분법의 전복은 실재의 결여나 원형이 없는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진리의 복제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진 환각인 시뮬라크르는 오랫동안 우상이나 거짓 등으로 간주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196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실재의 견고성이 붕괴되고, 보는 것과 관련된 새로운 기술에 의해 실재가 강력하게 중재되고 일상으로 침투하는 이미지들의 수가 증가하며, 이에 수반되는 변형 가운데 무엇이 예술로 고려되는지에 대한 대답으로’(미셀 카미유) 부활되었다.

미셀 카미유는 시뮬라크르를 재평가한 들뢰즈에 대한 연구에서, 그 문제는 더는 본질과 외양 또는 원형과 복제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구분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시뮬라크룸은 퇴락한 복제가 아니다. 그것은 원본과 복제, 원형과 재생산을 부정하는 긍정적인 힘을 품고 있다...원본으로 지정될 수 있는 것도 복제로 지정될 수 있는 것도 없다...가능한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들뢰즈) 이러한 위계의 거부는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한 독창성과 창조성의 발로로서의 예술작품과 그것의 선적 연쇄라고 할 수 있는 미술사의 권위를 깊이 침식한다.

원본이 존재한 적이 없는 동일한 복제라는 개념이 기존의 미술사를 대신하게 될 때, 미술의 역사는 ‘결코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상의 시뮬레이션에 대한 전략에 관한 것’(미셀 카미유)이 된다. 미셀 카미유는 이미지의 시원으로 간주되어 미술책의 처음 부분을 장식하곤 하는 동굴 벽화의 많은 부분이 먼저 그려진 이미지 위에 겹쳐 그려져 있는 예를 들면서, 실제로 일차적 이미지, 혹은 재현이 성립되는 순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동굴 벽화들 조차 이미 재현된 것들의 재현이라고 본다. 원본 없는 복제의 기술적 진보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대에, 실재에 대한 전화 혹은 폐위는 환상성의 극적 확대를 낳았다. 현대미술은 시뮬라크르의 장 안에서 작동하면서 표면과 다양성, 역설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출전 | 성산아트 201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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