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을 위한 자연의 실험
장세일의 ‘standard animal’ 전은 다양한 동물들을 규격화된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규격의 상징은 각진 몸체와 그 위에 새겨있는 눈금이다. 얼굴 부분은 사실적 모델링에 충실하지만, 몸은 각이 져 있어 마치 로봇 같다. 개처럼 보이는 늑대 3마리는 쌍둥이처럼 똑같고 색만 다르다. 기둥에 달라붙은 코알라는 새까만 코만이 종적 특성을 드러낸다. 벽에 붙은 한 쌍의 오리너구리는 주둥이만 사실적이고 각진 등판으로 유영을 한다. 앉아있거나 평면에서 몸의 일부만을 내밀고 있는 곰은 이상 기후로 녹아가는 극지방의 빙산들을 떠오르게 한다. 곰은 벽에 설치될 경우 콘크리트에 갇혀 있거나 그것을 뚫고나오는 듯하며, 바닥에 설치될 경우 묻히는 듯 혹은 배영을 하는 듯하다. 그것들은 낯설게 변화된 자신의 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 눈금이 새겨진 각진 몸과 달리, 사실적으로 표현된 얼굴에서 재난에 처했거나, 혹은 변화를 체화하여 환경에 무사히 순응한 것 같은 표정을 읽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평면 작품은 개모양의 실루엣에 눈금자가 가로지른 듯 등 쪽에 날카로운 모서리가 튀어나와 있다. 유기체의 몸체에 이물감을 주는 기하학적 형태가 침투되어 있는 모습이다. 유기체와 무기물은 서로 접합되어 있는 모습은, 이러한 침투가 유기체의 죽음 보다는 적응을 야기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각진 몸체는 철재 판을 하나하나 붙여가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마치 세포가 증식하듯이 변형된다. 그것은 본래적 형태를 벗어나게 해주면서 새로운 틀에 의해 규격화 되는 자연을 상징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대량생산과 소비의 산물인 규격화는 편리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야기한다.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고, 편리함에 편승하면 적응하는 메커니즘은 인간과 동물에 공히 적용된다. 그들은 서로에게 적응하면서 공(共)진화하는 것이다. 장세일의 작품에서 적응의 또 다른 기호는 자동차를 비롯한 현대적 사물의 색 표면이다.

은은하게 빛나는 파스텔 톤의 색채는 명품의 분위기마저 풍긴다. 그것은 인공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위장하는 의태(擬態)의 과정을 보여준다. 진화론에 작가의 상상을 보탠 장세일의 작품 경향은 이번 전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사물과 곤충의 일부를 접합시킨 변형 생물체들이 등장했다. 숟가락이나 칼 같은 살림도구에 곤충 이미지를 결합시킨 작품은 지금보다는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강했지만, 변화된 환경에 자신을 숨기는 자연의 메커니즘을 다룬 점은 마찬가지이다. 첫 개인전인 [숨기다](2009년)에서는 녹슨 칼자루와 곤충이 결합되는데, 칼이 하체가 되고 자루가 상체가 되는 식의 살벌한 변종들이 실제의 칼들 사이에 숨어있다. 섬뜩한 느낌마저 주었던 이러한 의태의 과정은, 이번 전시에서 규격화라는 보다 중성적인 환경에 적응한다. 가령, 늑대인데 개처럼 순화 된 동물로 보이는 분체들은 귀엽고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규격화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인간에게,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이 아니라 자본의 꼭대기에 있는 소수의 인간만이 혜택이 몰리는 규격화에의 움직임은 그 자체가 동물을 비롯한 타자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그것이 이 전시에서 코알라나 오리너구리 같은 멸종 위기 종 동물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의 작품에서 개체는 종적 자기 동일성을 위협받으며, 변화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생물학적 종(種)은 그 개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의문시되어 왔다. 브루스 매즐리시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에서, 종이란 개념은 분류의 목적으로 인간이 임의로 만든 것으로, 실제로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그는 종의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다윈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연은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존재하지만, 인간이 임의로 종이라는 불연속성을 도입했다고 본다. 그러나 종이 명목적인 것이든 실체적인 것이든, 그것이 변화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윈이 진화의 원동력으로 본 것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다. 환경 자체의 변화가 종의 생성과 소멸의 근본 원인이며, 이러한 생성과 소멸이 바로 진화이다. 장세일의 작품에서 동물들은 자연보다는 인공 선택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그것이 사이보그와 유사한 형태의 변이를 낳는다. 그의 작품에서 환경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선들로 이루어진다. 개체들은 직선들을 받아들여 자체가 형질전환(transformation)되고 변이(transmutation)된 상태로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소멸 쪽으로 이동할지 모른다. 그의 작품 속 동물들이 우울하기만 한 모습은 아닌 것은, 작가가 환경 적응에의 문제를 부정적으로만 간주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적응은 단지 순응이기 보다 창조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세일의 작품에서 자로 대변되는 인공적 힘은 생물에게 새로운 배열을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공생과도 비슷하다. 적응보다는 창조의 개념을 중시하는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에서 공생 기원설(symbiogenesis)을 소개하면서, 항구적인 공생적 배열을 통해 새로운 생물 형태가 창조되는 것을 모든 고등동물의 주된 진화 경로로 간주한다.

장세일의 작품에서 잣대는 개체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 속에서 항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합쳐진 형태는 공생적 결연 동맹을 이루면서 진화의 메커니즘이 된다. [생명의 그물]에 소개된 마굴리스의 공생기원 이론은, 전통적인 이론이 생명의 전개과정을 그 속에서 종들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분기하는 과정으로만 보는 반면, 이전에는 독립적이었던 유기체들이 공생을 통해 새로운 구성물로 형성되는 것이 좀 더 강력하고 중요한 진화의 힘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결핍과 적응이라는 이전의 패러다임을, 실험과 창조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킨다. 자연은 경쟁보다는 협동을 요구하며, 이들에게 생존과 진화를 허용한다. 장세일의 작품 역시 진화적 창조성의 새로운 경로로서의 공생(symbiosis)을 강조한다. 그것은 진화보다는 공진화이며, 새로이 공(共)의 영역에 포함된 것은 규격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기계이다.
장세일의 작품은 단지 환경파괴를 경고하는 식의 생태학적 메시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유기체 사이의 공진화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구조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위적 환경 속에서 유기체는 기계와 접속될 수밖에 없다. 그는 앞으로 말이나 치타 같은 동물과 자동차가 결합된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잡종화의 바탕이 되는 시스템 구성 문제를 자본이나 시장의 논리에만 맡기지 않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대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다. 사이보그를 미래적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다나 해러웨이는 인공기관이 자아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인 범주가 된다고 지적한다. 인공기관은 기호현상, 즉 의미와 몸을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초월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소통에는 권력이 개입된다. 몸속에 파고들어 몸의 일부가 되어 개체의 실루엣을 결정하고 있는 장세일의 작품 속 생물들은 1990년대에 극적으로 확산된 정보화를 통해 규격의 문제가, 단지 외적 척도가 아니라, 완전히 내재화된 차원임을 예시한다. 그의 작품 속 동물들은 유기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호처럼 만들어진다.
유기체의 경계를 결정하는 문제는 통제와 분리 불가능하다. 다나 해러웨이가 지적하듯이, 모든 것이 체계화, 규격화되는 세계에서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안정된 진화 전략이 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실체(관계)가 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자체로 낙관적인 것도 비관적인 것도 아니다. 규격이란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세일의 작품은 공장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철재 판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완전히 결정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듯이, 그것은 새로운 규격의 창조이기도 하다. 규격의 구조 뿐 아니라, 그것의 생성되는 차원은 과학기술보다는 생명체에서 더욱 분명하다. 한편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에는 정상보다는 병리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조르쥬 캉길렘은 [정상과 병리]에서 정상이란 생명의 규범에 대한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생물에게는 질병 역시도 생명의 규범을 따른다. 질병은 유기체가 자기 고유의 환경 속에서 파국적인 반응을 하게 되는 방식으로 바뀌어 질 때 나타난다. 환자는 하나의 규범밖에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환자이다.
[정상과 병리]에 의하면, 생물이 자기의 생활조건이나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성질에 무관심한 것이 이상(異狀)이다. 건강의 특징은 일시적으로 정상이라고 정의되는 규범을 이끌어내는 가능성이며, 평상시에 규범에 대항하는 침해를 허용하는 가능성, 또는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규범을 설정하는 가능성이다. 건강이란 환경의 부정확함을 허용하는 폭이다. 생물은 법칙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들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존재나 사건 속에서 살고 있다. 캉길렘은 표준(standard)화라는 용어와 규격(normal)화라는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규격화는 불변성의 개념을 배제하고 가능성 있는 유연성을 미리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유기체는 자신이 응해야만 하는 환경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유기체의 능력을 발달시킴과 동시에 그 환경을 구조화한다. 생명이 가지는 고도의 유연성은 구조적 결정론이 아니라, 혁신과 변화를 야기하는 우연과 초과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세일의 변종 생물체들은 자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자연이란 예술처럼, 예측할 수 없는 환경 변화에 대처하는 모든 가능성들을 실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