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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근 /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이선영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정명근 전 | 7.16~7.29, 표 갤러리



검은색 악보처럼 생겼으며, 제목 아래에 작품 제작 시 영감을 받았던 클래식 음악의 제목까지 부기되어 있는 길쭉한 도록은 이 전시의 작품들이 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작품 [chung trio]에도 나타나듯, 정명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 집안 출신이며, 그 또한 공연기획 및 제작자, 그리고 감독으로 살아오다가 60세가 넘어서야 화가로 데뷔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첫 개인전이면서도 적지 않은 작품수와 밀도를 가지는 그의 작품은 어릴 때부터 친숙했던 음악문화의 분위기에 그저 편승하는 소재주의적 그림이거나 유명세를 바탕으로 한 딜레탕트 적 영역 넓히기와도 차이가 있다. 음악은 그의 몸 일부가 된 듯하지만, 음악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미술을 시작하게 했고, 그러한 필연성이 작업의 양과 밀도를 가능하게 했으리라 본다. 그를 추동했던 것은 원본의 재현이나 재해석에 치중하는 클래식 음악과 현대미술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음악에서 출발한 정명근의 추상화는 재현이 아니라 생성이고, 재해석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근대이후 장르의 순수화를 밟아왔던 미술이 자신의 동일성을 이루어왔던 타자들을 주목하는 가운데, 다양한 타자들이 미술의 장에서 미술의 동일성과 견주어졌다. 정명근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음악이라는 타자는 동일자 못지않은 밀도를 가진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의 작품에서 동질성과 이질성은 구별될 수 없을 만큼의 혼연일체를 이룬다. 이러한 일체화가 가능한 것은 음악과 미술에 공히 존재하는 기호적 측면이다. 물음표나 느낌표 모양의 기호에 다채로운 색 면들이 채워진 작품은 베토벤의 심포니를 그림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면의 분할과 그 안팎을 채우는 기호적 형태/색채들은 그 기원이 된 주옥같은 음악들과 공명한다. 때로는 빽빽하게 때로는 여백을 많이 주는 변주가 있다. 아크릴로 그려진 큰 작품들은 대체로 어두운 바탕에 밝은 색채/형태가 떠 있는 방식이고, 가는 선들이 섬세하게 엮인 소품들 역시 공간의 예술인 미술에 시간적인 추이를 기록하는 방식이다.

음악과 미술을 교차시키는 작업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의식적 연구, 또는 무의식적 감각을 요구한다. 칸딘스키나 클레 등 음악과 미술의 교감을 시도한 현대미술가 이래로, 시간의 공간화는 양 영역에 걸쳐 있는 작가들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것은 선율이나 가사 내용처럼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가는 방식을, 정지된 화면 안에 동시적으로 존재(공존)하게 하는 방식, 요컨대 ‘각 부분들의 관계가 보는 이에게 동시적으로 주어지게’(로잘린드 크라우스)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동시성과 연속성은 분리불가분하다. 한 화면에서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배열하는 회화의 기술은, 음악 뿐 아니라 영화나 문학 같이 시간적 연속성을 가지는 장르와의 관계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에 대한 고전적인 저술은 레싱의 [라오콘 또는 회화와 시 사이의 경계에 대하여](1766)인데, 그는 여기에서 오직 한 순간만을 채택해야 하는 미술의 특성을 설명하고, 그러므로 ‘반드시 가장 의미 있는 순간, 즉 선행했던 것과 뒤따라 일어날 것을 가장 분명하게 만드는 순간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명근의 음악적 그림은 순간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과 미지의 기대 사이에서 적절한 맥락을 만들어서 독특한 경험을 만들고자 한다. 맥락은 서사를 낳는다. 추상미술은 주제로부터 탈피하는 경향을 보여주지만, 정명근의 작품에는 분명한 주제가 있다. 그러나 그 주제가 다름 아닌 음악이기 때문에 회화의 자율성과 상치되지 않는다. 가령 사과를 그리는 수많은 방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비발디의 [사계]를 표현할 수 있는 방식보다 많지는 않을 것이다. 모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율적 회화는 특정한 대상이나 내용에 얽매이지 않는, 그것 자체만을 위한 것이 된다. ‘그것 자체’에 내포된 자기지시성은 미술을 풍부하게도 빈약하게도 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끝나는 시점에서 자기지시성과 자기 동일성의 문제는 다시금 문제시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저것 잡탕식의 혼합은 작품의 밀도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획일성을 야기한다. 정명근의 그림은 획일화된 포스트 모던적 ‘경계 넘기’에 대한 대안의 방식으로 눈길을 끈다.


출전 | 미술세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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