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언어의 집이다. 그림 또한 언어의 한 형식이란 점에서 화집 등 미술책 역시 이 정의에 포섭된다. 때로는 문자 텍스트의 형태로, 더러는 이미지 텍스트의 형태로 어떤 의미를 불러일으키고 상기시키고 암시하는 체계며, 사물 자체를 직접 지시하는 대신 사물을 개념으로 치환시켜놓은 체계 곧 상징과 기호의 요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물 자체와 직접 대면하는 일차적인 경험이 아니라, 개념을 통해 사물을 유추하고 추상해내는 이차적인 경험인 것이다. 책은 이처럼 사물 자체와 사물에 대한 개념간의 차이를 인식시켜주며,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은 사물 자체와 사물에 대한 개념간의 의미론적 간극을 주지시켜주며, 그 간극에 대한 인식은 사물과 개념이 불일치할 수도 있는 개연성과 함께 주체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개입과 간섭 즉 능동적인 해석행위를 가능하게 해준다(언어는 해석에 대해 원천적으로 열려져 있다).
한 권의 책 속에 축성된 언어의 체계는 이처럼 그 의미가 열려져 있고(혹 그 의미체계가 닫혀있는 경우를 사전에서 찾아볼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 사전은 다만 결정적인 의미로 축조된 죽은 언어의 집에 지나지 않는다), 주석과 부언과 같은 첨삭행위에 대해서 열려져 있고, 기본적으로 그 사후적 행위는 무한정 가능해진다. 열려진 의미체계와, 끝내 붙잡을 수는 없는 궁극적인, 최종적인, 결정적인 바로 그 의미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차연(차이와 연기)이론은 바로 이런 열려진 텍스트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말해준다.

이렇듯 열려진 의미체계로서의 텍스트에 대한 발상은 롤랑 바르트에게서도 역시 확인된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독자적 텍스트와 작가적 텍스트로 구분한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알려준 대로 따라 읽어지는 경우가 독자적 텍스트라고 한다면, 책에 기술되어진 내용이 책에는 미처 포함되어져 있지 않은 다른 내용을 불러일으키는 경우, 이를테면 부언과 예제, 첨삭과 주석행위를 요구해오는 경우, 나아가 그 부가적 행위가 부풀려지고 치열해져서 적어도 의식 속에서만큼은 사실상 그 책과는 다른 별개의 책을 형성시키는 경우, 책을 읽는 행위가 책을 기술하는 행위를 불러오는 경우, 해서 독서의 과정과 저작의 과정이 동시에 수행되어지는 경우가 작가적 텍스트에 해당한다.

이처럼 책은 언어의 집이고, 그 언어는 세계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끔 유도한다. 이때 세계를 지시하는 언어의 의미는 세계 자체에 부합하거나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그 자체 증명의 대상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도 증명을 해보면 증명이 되는 과학적 진리와, 진즉에 증명의 대상이 아닌 만큼 실제로도 증명을 해보면 증명이 되지 않는 예술적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구분에서처럼. 특히 미학이나 예술에서처럼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의 강밀도가 부각될 때 이를 지시해줄 수 있는 객관적인 언어와 보편타당한 의미는 다만 이상에 지나지 않은지도 모른다.
김성호가 그려 보이는, 집체처럼 쌓여있는 책 더미들이나, 성체만큼이나 고고한 책 다발 그림들에서 책은 이처럼 삶의 지표로서보다는 미로의 메타포처럼 읽히고, 책 속에서 길을 찾게 하기보다는 책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잃으면서 찾아 가는 것, 헤매면서 바로 가는 것이 바로 책 속에 난 길이다. 작가의 책 그림은 바로 이런 책 속에 난 길을, 그 길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 길 그대로 삶의 메타포에 부합한다(삶은 책 속에 난 미로처럼 잃으면서 얻어가는 과정이며, 헤매면서 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성호는 풀 사이즈로 잡은 거대한 책 더미가 보는 이를 압도해 오는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을
라고 부른다. 책들의 탑? 책들의 성체? 이 말은 거의 즉각적으로 바벨탑을 떠올려준다. 주지하다시피 바벨탑은 하늘과 맞닿으려는, 하늘과 대적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신은 인간의 언어를 분화시키는 것으로써 그 욕망을 무력화한다. 언어의 분화? 이 말을 곧이곧대로 읽으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다양해진 것을 의미한다(이를테면 외국어). 그러나 정작 이 표면적인 의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언어의 다양성보다 의미의 다양성이 아닐까. 말하자면 하나의 언어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며, 똑같은 언어가 다른 의미를 의미할 수도 있게 되었으며, 해서 때로 내가 하는 말을 네가 못 알아들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언어의 의미는 그 자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사용하는 주체가 매순간 맞닥트리는 상황, 전제, 문맥, 맥락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 주체는 매순간 다른 상황에 맞닥트리고, 그 때마다 의미 역시 달라진다. 하나의 의미란 상황으로부터 비롯되고 결정된다. 곧 상황이 의미를 낳는다).
책들의 탑은 곧 문명의 바벨탑이 변주된 것이다. 그 속에는 신에 대한 인간의 대적(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탐색)이 놓여있고, 그 미지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신의 단죄와 처벌이 놓여있다. 여기서 미지의 영역이란 어둠의 영역이며, 침묵의 영역이며, 인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이 거주하는 영역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영역은 결여와 결핍으로 나타난 인간 일반의 존재론적 조건을 말해주며, 특히 예술의 특수성에 대해서 말해준다(인간 일반의 존재론적 조건과 함께, 예술이 그 조건을 돌파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예술은 어둠을 보듬어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이분법적 틀을 재편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며, 침묵으로부터 미처 의미화 되지 못한 선 의미의 계기들을 캐내고 발굴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다(이와 관련해 볼 때, 예술이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일이란, 폴 클레의 전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술 혹은 미술 역시 이렇듯 문명의 한 형식이다. 주로 미학, 예술론, 미술 관련 책들로 축조된 작가의 책 그림은 그대로 미술사적 저작들의 기념비성을 보여준다. 아마도 작가가 책 그림을 통해 재현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지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그림들은 무엇을 기념하고 있는 것일까? 미술사의 성좌들, 미술사를 견인해온 힘의 논리 즉 이데올로기의 지점들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술사는 문명의 한 형식임을 넘어, 이데올로기의 한 형식임이 드러나고, 이데올로기 즉 제도의 한 형식임이 밝혀진다. 롤랑 바르트는 문명의 산물을 자연적인 사실인 양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문명의 산물인 미술을 천재와 직관과 영감의 결과인 양 선전할 때 미술은 신화가 된다. 그리고 미술이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한 형식임은 조지 딕키의 예술제도론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미술사적 기념비성을 부각하기 위해 동원된 신화화와 신비화의 장치들에 일종의 오마주로써 반응하는 것 같다. 한편으론 경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그 이면의 제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장치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취미로 미니어처 장난감을 수집한다. 이 장난감들 중 일부가 쌓여진 저작들과 어우러져 재배치된다. 비록 우연을 가장한 것인 만큼 공공연하지는 않지만, 미술저작들과 장난감이 대비되고 충돌한다. 장난감이 미술저작들의 권위를, 신화적인 아우라를, 그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그림은 이런 미술사적 성좌에 대해 가급적 감정적 노출을 절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그림들이 미술저작들의 파사드(그 자체 일종의 사물 초상화와도 무관하지가 않는)를 부각하고 강조한다.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프랭크 스텔라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했던 이 말은 작가의 그림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다만 미술책들일 따름이며, 엄밀하게는 미술책들을 그린 그림일 따름이라고. 그러나 책이든 책 그림이든 이미 그 자체는 어떤 아우라를 내장하고 있어서 단순한 책이나 그림을 넘어서는 그 이상이 되었고, 그로부터 발해지는 기념비성 역시 주체와는 무관한, 그 자체 자족적인 것이 되었다.
여하한 경우에도 책들이 발하는 아우라와 은근하면서도 눈부신 후광에의 매력을,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급작스럽게 사로잡는 도취를 대신할 만한 것들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작가의 사실적인 책 그림들은 시각을 통해 책들을 만질 때 손에 감촉돼오는 촉감을 대신 느끼게 만든다.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인. 시각적 경험이 곧 촉각적 경험이 되는.
평탄한 길로 나 있는 책들은 대개 재미도 감흥도 공감도 없다. 미로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도록 유도하는 책들, 때로는 세상과 완전히 절연될 만큼 멀리까지 데려가는 책들, 그런 책들이 진정한 책들의 성좌가 아닐까. 김성호가 그린 일련의 책 그림들은 다소간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그림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들의 아우라에 감싸이게 하고, 그 책들을 만질 때 감촉돼오는 소박하고 감각적인 쾌감에 빠져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