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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욱 / 존재의 매듭

이선영

네모난 또는 둥근 틀을 싸는 듯한 천의 형상이 다양한 형태로 꼬여있거나 매듭지어 있다. 일상어에서 ‘꼬이다’, ‘묶다’, ‘풀리다’라는 어휘들이 내포하듯, 매듭의 다양한 양태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상징한다. 전시부제인 ‘자의식’은 물질적 형태와 심리적 내용과의 연관관계를 강조한다. 평평한 천이 당겨지고 감겨 올라가며, 때로 절단되는 형상은 전체의 부분에서 잘려진 판 위에 올려져 부조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사각 기둥이나 정다면체와 길항작용을 하는 천의 형태를 가시화한 입체작품은 작품 제목 [의식의 기둥]이 예시하듯, 의식과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드러낸다. 3개의 기둥에 여러 각도와 간격을 가지는 천 주름 모양을 표현한 [의식의 기둥]에서 사각기둥은 의식을 상징한다. 지상에서 우뚝 서있는 그 형태는 도시를 비롯한 인류 문명을 형성한 힘의 구현이다. 이 기둥을 휘감아 올라가는 천의 형태는 구조적 형태에 일련의 관계를 부여한다. 구조와 구조 사이를 연결하는 주름진 형태를 통해 심리적 드라마가 펼쳐진다.

주물로 완성된 부조작품들은 천으로 직접 형태를 만들어 미세한 주름들을 하드 코팅하고, 연마해서 고착화한 것이다. 연마 정도에 따라 음영의 대조가 생겨나며, 주름은 각 작품마다 다양한 굴곡을 보여준다. 작가는 유동적인 천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태화 되는 것은 의식이나 의지에 물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조 작품에는 사각형 판에 매듭이 하나 있는 것, 둘 있는 것이 있고, 둥근 틀을 감싸 올라가는 마디가 단호하게 잘려진 모습도 있다. 중심부로부터 올라오는 주름이나 두툼한 머리타래처럼 꼬인 매듭이 바닥에서 융기되는 형태는 잠재적인 것이 부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천을 감겨 올라가게 하는 나사 같은 구체적 형태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이나 이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며, 정육면체를 두 개의 매듭이 당기고 있는 작품은 상반되는 힘의 길항 작용을 나타낸다. 천 자락은 판의 형태를 벗어나 자신들끼리 성긴 그물망을 짜면서 공간적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관계성이나 과정 그자체가 실재를 구성 한다.




이 전시에서 매듭은 단순히 재미있는 형태를 넘어서 상징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염상욱의 작품에서 그것은 일차적으로 심리적인 것이지만, 그것의 역사적 차원, 즉 신화적인 상징성으로 소급될 수 있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이미지와 상징;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대한 시론]에서 매듭의 형태와 연관되는 인도-유럽 신화의 예를 든다. 공포의 최고신 바루나의 무기는 끈, 매듭, 포승 등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묶는 자와 푸는 자의 양극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선사시대에 올가미를 무기삼아 실제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근거하며, 원시적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무기라도 주술적 수단이 된다. 질병과 죽음, 이것은 전 세계에 가장 대중적으로 유포되어 있는 결박의 주술적 종교적 복합체를 구성하는 두 요소이다. 결박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의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염상욱의 작품에서도 매듭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그것은 인생에 던져진 문제를 풀어주는 힘이면서, 결합시키는 힘이다.

엘리아데는 민간요법과 마법에서 밧줄, 매듭, 올가미 등이 가지는 주술적 가치를 언급한다. 첫째는 전쟁이나 주술에서 적에 대항하여 사용된 주술적 결박, 또한 결박 끊기라는 역작용이고, 둘째는 야생동물이나 질병, 주술, 악마, 죽음에 대한 방어수단으로서의 상서로운 매듭과 결박이다. 그것은 공격과 방어, 질병과 치유라는 양가적인 상징을 가진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어떤 결박에, 모든 묶는 행위에 존재하고 있는 힘에 가해지는 방향성이다. 이 방향성은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이러한 대립성을 사람들은 상서롭거나 불길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결박의 주술적-종교적 복합체는 우주의 직물, 인간 운명의 실, 미궁, 존재의 사슬 같은 원형을 이룬다. 그것은 특수한 역사적 사례를 넘어 보편적 인간 심리 및 실존적 조건에 대한 상징이 된다. 엘리아데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 위에 그물 하나가 펼쳐져 있다’는 랍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생명의 끈은 많은 나라에서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운명의 여신들은 인생의 실을 잣는다. 우주자체가 하나의 직물, 거대한 그물로 생각되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사변에서 바람은 실로 꿰듯이 이승과 저승, 모든 존재들을 연결시켜 대우주를 직조한다.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상징이 두 개의 핵심적 사실을 표현한다. 우주에 있어서나 인생에 있어서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짜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물을 결합시키는 우주의 원리에는 항상 결박, 속박, 포박 등의 개념을 내포하는 키워드를 통해서 표현된다. 인간을 삶 또는 죽음에 묶여져 있고, 더 나아가서 삶 그자체가 직물이거나, 인간 각자의 삶을 매달고 있는 실로 비유된다. 신화라는 거시적 상징으로부터 미시적인 차원으로 이동하면, 염상욱의 작품은 심리적 존재의 위상학topology과 연결된다. 사각 판, 원판, 사면체, 기둥 등으로 나타나는 기하학적 구조와 관계망을 이루는 부드러운 천의 형태에서 서로의 존재에 의지하는 연결고리로서의 매듭은 복잡한 심리적 드라마를 표현한다. 그것은 매듭의 구조로 인간 심리를 해석한 라깡의 보로매우스 매듭을 연상시킨다.




페터 비트머는 라깡의 해설서 [욕망의 전복]에서에서 직물이나 편물과 같은 실제적인 것도 매듭과 연관 짓는다. 염상욱의 작품에서 천의 모티브는 성긴 그물의 형태가 되기도 한다. 조직과 조직이 얽힌 부분은 매듭이 된다. 직물 짜기와 같은 활동은 매듭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한 직물은 언어처럼 짜여진다. 물질적인 것의 얽힘으로서의 언어라는 비유는 많은 것을 암시한다. 라깡의 가설에 의하면 보로매우스의 매듭은 인간 존재의 세 전제조건을 가리킨다. 첫째는 존재한다는 것,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 무엇인가 정립되어 있다는 것이다(실재계). 둘째는 상징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없이는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상징계). 세 번째 조건은 보르매우스의 매듭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상상계). 염상욱의 작품 또한 풀리지 않는 매듭이 실재의 영역을 나타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엮여지며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상상적이며, 서로 구분되는 구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그의 매듭은 실재가 표상되고 말해지는 단계를 나타낸다.

그것은 말하기의 위상을 나타내는데, 말하는 행위 속에서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는 서로 매듭을 짓는다. 비트머에 의하면 라깡이 구분한 세 가지 차원에서 실재는 항상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 육체, 저항하는 것, 무의식, 반복 강박증, 비(非)존재자, 탈존재, 불가능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실재를 ‘실현하다’라는 동사와 연결시켜 생각하면 실재는 어떤 고정된 것으로부터 풀려남 즉 ‘분석한다’라는 의미에도 접근한다. 실재, 상상, 상징이라는 세 가지 질서는 상호 의존하면서 자아에 대한 심리적 분석에 진입한다. 언어로 대변되는 사회의 상징적 질서는 욕망의 한계를 규정한다. 상징적 질서는 억압을 낳고 금지는 위반에의 욕망을 낳지만,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가져다주는 대상은 부재하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가설이다. 그래서 부재와 무의미를 감추려는 환영과 물신이 고안된다.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욕망의 공허함, 실재라는 심연과의 만남을 회피하게 하는 보호막, 즉 증상이 나타난다. 매듭의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염상욱의 작품은 결핍과 실재의 규정 불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심리적 구조를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서 매듭들은 바탕에서 떠오르거나 침전되는 양상을 가지는데, 그것은 억압된 무의식이 용출하고 사라지는 잠재적인 형태이다. 잠재형태는 과감하게 잘려짐으로서 의식화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부조 작품들은 자족적인 장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부터 잘린 부분 같은 양상을 띤다. 매듭은 판이나 기하학적 구조의 중심에 있지 않다. 매듭이나 절단 같은 이미지는 무의식이라는 무한을 한계 짓는 의식의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이 파편으로 드러나는 것은 의식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억압된 무의식은 수수께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난다. 주체의 구조를 형성하는 존재의 매듭들은 헐거워지거나 다시 묶여질 뿐 영원히 풀어지지 않을 듯하다. 작업은 신경증 환자의 정신구조에서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차원이 된다. 그것은 실재의 규정 불가능성 및 의미의 상실로부터 보호받으려는 반복된 행동, 요컨대 물신의 창조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과정은 실재와의 만남을 계속 연기하는 것이지만, 자기 분석을 통해 주체의 존재를 경험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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