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욱의 <초상화> 질 들뢰즈는 머리와 얼굴을 구분하고 있다. 머리가 미처 사회화되기 이전의 자연성과 본성을 의미한다면, 얼굴은 이러한 본성을 은폐하는 연출의 소산이며 사회화된 기호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성이란 개념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진정한 인간성이란 자연성과 본성을 말하며,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자연성과 본성을 상실했거나 억압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성 회복을 흔히들 사회화된 인성(예컨대 도덕적 인간이나 제도적 인간과 같은)에서 찾는데, 이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사회화된 인간과 자연인은 서로 맞잡을 수 없는 단절의 관계에 있으며, 불통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반사회적 주체, 반제도적 주체를 실현한다는 말과도 같다. 이처럼 얼굴은 몸에 새겨진 사회적 장치 혹은 기호이며, 그 이치는 옷과 화장으로 나타난 모드가 작용되는 방식과 같다.
김정욱의 초상화는 대체로 자화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일련의 그림들에 나타난 표정이 가식적이지 않거니와, 꾸며내거나 연출돼 있지도 않다. 작가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의지에서 더 나아가 자기 내면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무표정해 보이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음울해 보이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하게조차 보인다. 정면성을 취한 초상화에서 얼굴 한쪽으로부터 큰 귀가 기형적으로 돋아나 있는가 하면, 드라큘라의 송곳니가 공공연한 적의를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의 안쪽으로 이목구비가 쏠려 있는가 하면, 잔털이 얼굴 전면을 뒤덮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일부 그림에서는 눈동자가 새까맣게 칠해져 있어서 마치 눈이 얼굴 안쪽으로 뚫린 구멍 같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들뢰즈의 논법으로 보자면, 그 이미지들이 얼굴보다는 머리에 가깝다. 이는 그대로 얼굴의 이면에 가려진 작가의 자연성, 본성, 억압된 욕망,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를 드러내 보여준다. 단순한 자화상을 넘어 무의식과 치유 불가능한 상처로써 공감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희의 <숲의 소리, 숲의 호흡> 김현희는 자연을 감각적인 기호로서 환원한다. 올이 가늘고 섬세한, 그 이면이 비쳐 보이는 반(半)투명 실크천 위에 펜으로 드로잉을 한 것으로서. 이때 나무나 숲 등 자연의 대상이 드러나 보이는 가장자리 선을 따라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이를 새겨 넣는다. 대상을 최소한의 가장자리 선만으로 환원한 이 그림은 선과 선이, 그려진 부분과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내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일종의 사이공간을 드러낸다. 이는 마치 전통적인 회화에서의 여백을 시적인 형식으로 승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그림은 단순한 드로잉 혹은 선 그림으로 부르기가 주저될 만큼 수공성이 강하면서도, 시적인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 일면적으론 자수 혹은 수예를 연상시킬 만큼 섬세하며, 밀도감 또한 상당하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시적인 암시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표면 위로 끌어내려는,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형상화하려는 욕망과 통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자연이 내포하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서 나타난다. 즉 자연은 자연을 이루는 성분 혹은 요소들이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로서 고립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연결돼 있고,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다만 암시적으로만 느껴지는 소리와 연결돼 있다. 나무는 바람과 연결돼 있고, 공기와 연속돼 있다. 숲은 어둠과 연결돼 있고, 빛과 연속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 속의 숲은 실제의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숲과 관념이 그려낸 숲의 이미지 사이에 위치한다. 그 사이 만큼의 여백과 더불어 숲이 마치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아득하여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시상(詩想)을 불러일으킨다. 실재의 흔적, 실재의 그림자, 실재의 잔상, 신기루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숲을 고정된 순간으로 환원하는 대신에 현재진행형의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림 속에선 나무가 낙엽을 벗는 소리가 들리고, 숲이 어둠을 끌어안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숲은 그 속에 동화, 설화, 우화, 전설과 같은 온갖 서사를 품고 있다.
오연화의 <더 스페이스> 오연화는 일상적인 공간을 떠낸다. 먼저 두꺼운 하드보드지나 투명한 아크릴 판을 일일이 재단하고 이를 중첩시켜 쌓아올리는 방법으로써 틀을 만든 다음, 이 틀을 바탕으로 실리콘으로 떠내는 식이다. 이때 흰색 실리콘으로 떠낸 조형물로써 심플하고 금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고, 실리콘에다가 일정 양의 안료를 섞어 떠낸 조형물로써 일말의 장식적인 인상을 더하기도 한다. 이렇게 떠낸 조형물은 실리콘 고유의 부드러운 표면 질감과 함께 마치 속이 비쳐 보일 것 같은 반(半) 투명한 감각이 두드러져 보인다. 더불어서 조형물을 떠낼 때 생긴 비정형의 에지가 실리콘 소재 고유의 물성(물질적인 성질)과 함께 자연스러움을 더한다. 평면인 동시에 입체인 이 조형물은 마치 사각의 프레임 속에다 공간을 압축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거기에는 비록 암시적인 형태로나마 실제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원근감과 깊이감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여기서 공간을 떠내는 행위는 곧 시간을 떠낸다는 것이다. 공간 속에는 시간이 배어 있으며, 시간은 공간으로 인해 비로소 몸, 형태, 실체를 얻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간과 시간의 상호 내포적인 관계는 작가의 작업에서 중첩된 지층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즉 중첩된 평면의 판들은 그대로 중첩된 공간의 지층을, 그리고 시간의 지층을 암시해준다. 또한 공간을 떠내는 행위는 자기 반성적인 행위에 그 맥이 닿아 있다. 나의 삶이 전개되는 지평, 나의 정체성을 구성해주는 지평, 지금 여기에 대한 현실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일상은 반복적이고, 공간의 구조는 비슷하기 마련이기에 작가가 떠낸 공간은 쉽게 공감을 얻는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타자의 일상에 대한 엿보기를 유도하는 개별적인 공간, 심리적인 공간을 넘어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와 함께 작가의 작업은 공간의 본질과 구조를 겨냥한 일종의 환원주의에도 그 맥이 닿아 있다. 공간을 플랫한 평면의 중첩된 레이어로 환원함으로써 실제의 공간에 대한 재현적인 암시와 함께, 실제에 대한 조형적인 해석마저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문주의 <쓰레기 산수> 이문주의 작업은 도시 근교의 재개발 현장이나 버려진 산업 쓰레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작업에서는 반문명적인 메시지가 먼저 읽혀진다. 그려진 이미지와 전사된 이미지, 심지어는 방수천과 폐목 위에 그림을 그려, 이를 재구성한 설치작업이 어우러져 있다. 이로써 재개발 현장이나 산업 쓰레기가 그려 보이는 삭막한 풍경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산처럼 쌓인 산업 쓰레기 더미와 폐자재 혹은 폐비닐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의 이면을 관통하는 현대판 산수(山水)의 또 다른 한 버전을 보는 것 같으며, 이로부터 문명의 허구를 꿰뚫는 시니컬한 풍자가 읽혀진다.
작가의 작업에서는 복사된 이미지가 광범위하게 차용되고 있다. 주로 용도 폐기된 채 아무렇게나 버려진 산업 쓰레기들이나 재개발 현장과 철거 현장의 을씨년스런 풍경을 포착한 복제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그 위에다가 그림을 덧그리는 식이다. 그 이미지는 생리적으로 표면적이며, 이미지에 나타난 원근감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표면을 뚫고 이면의 깊이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외관상의 사실적인 묘사(실사)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이 평면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작가의 작업은 신사실주의자의 문명사적 비전에 맞닿아 있다. 온갖 산업 쓰레기들에게서 동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리얼리티를, 아이콘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 쓰레기들은 정크아크라는 이름으로 현대미술의 문맥 속에 등재돼 있으며, 일상성의 이름으로 일상사회학의 문맥 속에 등재돼 있다. 이 쓰레기들의 이면에는 페티시즘(물화)과 인간소외, 정체성 상실과 정체성 혼란 등 문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즉 버려진 것들은 그대로 개인의 자기정체성인 아이덴티티를, 사회의 자기정체성인 패러다임을 반영하는 문명사적 거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거울에 비친 산업 쓰레기들이 거대한 산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도심 한가운데나 변두리의 철거 현장에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들에게서는 마치 느와르 영화를 보는 것과도 같은 황량하고 스산한 심리적 풍경마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