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자연설치미술의 생태학적. 환경적 의미와 그 형식들

고충환

2006년. 바깥미술회 25주년 기념 세미나

자연설치미술의 생태학적. 환경적 의미와 그 형식들



‘생태계의 개념은 환경의 개념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두 개념은 모두 생명과 관계된다. 그러나 환경에서의 생명이 인간만을 의미하는 반면, 생태계에서의 생명은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말한다. 환경이 인간 중심적이고 문화적 개념이라면, 생태계는 생물 중심적, 생물학적 개념이다. 또한 환경의 개념이 구심적이거나 원심적인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나타낸다면, 생태계의 개념은 관계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 박이문의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중



1. 자연설치미술의 개념

자연설치미술에는 자연과 생태, 그리고 환경의 개념이 함축돼 있다. 허나 이 개념들은 단지 편의상으로만 구분돼 있을 뿐, 사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는 만큼 그 경계가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자연설치미술을 인간의 삶과는 동떨어진 자연의 자족적인 존재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시각이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삶은 상호내포적인 관계에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인의 삶은 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도시와 농촌의 구분은 실제의 생활양식의 관점에서 봐야 하며, 이에 견주어 볼 때 모든 현대인은 사실상 도시인이다). 따라서 자연과 문명, 자연과 도시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함으로써 문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는 있으나, 이는 자칫 현대인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연관을 도외시할 수가 있다.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관이며, 따라서 자연설치미술은 자연의 자족적인 존재(자연의 본성, 자연의 원형)와 함께 삶의 현장 속에 편입된 변형되고 변질된 자연 또한 포함해야 한다.

창작 현장에서의 자연은 대지미술처럼 조형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가 하면, 생태미술처럼 생리적인 개념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조형적인 수단으로서의 자연(관)과 생리적인 개념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관)은 상호내포적인 관계에 있다. 한편, 대지미술은 조형성을 그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왕의 조각과 설치미술의 연장선에 위치해 있으며, 때로는 아이디어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선 개념미술의 한 부류로 인식되기도 한다. 더불어 장소특정성이 강조되기도 하고 작업이 일시적으로만 존속됨으로 인해 기록에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기록과 작업, 기록물과 작품이 동일시되는).

이에 비해 생태미술은 자연의 본성에 작업을 일치시키는 경향을 띤다. 이를테면 자연으로부터 취한 소재로써 자연의 습성을 좇아 형태를 만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썩어서 마침내는 소멸되고 마는 리사이클링의 형태를 띠는 점이 특징이다. 이로써 생태미술에서는 프로세스 아트와 생물학적인 변태,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작업의 실질적인 변화(예컨대 광물질 소재의 부식과 유기적인 소재의 부패와 같은), 그리고 이에 따른 작업의 자연스런 소멸이 중시된다.

생태미술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처럼 자연의 생리에 합치되는 미술을 뜻한다. 그런가하면 생태미술은 흔히 에코페미니즘으로 명명되는 제 3세대 페미니즘에서 보듯 내부적으론 페미니즘과도 통한다. 본질주의로 나타난 제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성과 자연성을 동일시(남성과는 다른 여성 고유의 생리적 특수성을 인정)한다면, 급진주의로 나타난 제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성과 자연성에 대한 동일시를 거부(여성을 자연이 아닌 문화의 산물로 보는 만큼 성의 결정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후 에코페미니즘은 사실상 본질주의 페미니즘의 이념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자연성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태도와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이렇듯 생태미술이 자연의 생리를 그 대상으로 한다면, 환경미술은 삶의 장을 그 대상으로 한다. 환경미술은 미술의 사회적 의미와 기능을 묻는 한편, 그 장(대상)이 다름 아닌 삶의 장임을 강조함으로써 현실 참여적인 현장미술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는 낯설게 하기, 소외효과, 소격효과를 통해서 삶의 장을 모순의 장으로 바꾸어 놓는(삶의 장에 내재된 모순의 계기를 발견하는) 것에서 그 당위성을 찾으며, 그 자체 삶의 질(환경적인 조건)에 대한 논평의 형태를 띠는 점이 특징이다.

이처럼 환경은 문명을 중심으로 한 삶의 조건과 결부돼 있으며, 생태 또한 자연을 중심으로 한 삶의 조건과 연관돼 있다. 그러니까 환경미술이 문명의 폐해나 환경오염, 그리고 제도적인 문제 등 주로 미술의 사회적 의미와 기능에 초점에 맞춰져 있다면, 생태미술은 자연의 속성에다 작업의 속성을 일치시키는 식의 인간의 삶 자체보다는 자연의 속성에 경도돼 있다. 허나 이러한 표면적인 구분에도 불구하고 환경미술과 생태미술은 그 물질적 지반인 문명과 자연이 결국 생명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같이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개념들이란 점에서 내부적으론 서로 통하고 있다. 자연설치미술은 이처럼 그 이면에 환경미술 또는 생태미술과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는 것이다.


<2. 국내 자연설치미술의 유형학

자연생태미술

자연생태미술은 김주연의 작업에서 일종의 ‘살아 있는 미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숙 異熟>(2002)이란 작업에서, 식물의 생장을 통해 생태계의 성장과 소멸에 따른 일련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면서, 이를 여성의 성적 정체성에 결부시키고 있다. 그 자체 여성성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순백의 웨딩드레스의 표면에다가 각종 식물들의 씨앗을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두고 심어서, 그 생장하는 과정을 가시화한 것이다. 이때 시간의 경과와 함께 하얀 드레스가 녹색으로, 그리고 점차 죽어버린 식물들로 인해 갈색으로 변화해간다. 씨앗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심어짐으로써 녹색의 표면과 갈색의 표면이 공존하는, 생장과 소멸이 공존하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보여주게 된다. 여기서 드레스 자체는 여성의 몸이 연장된 것이며,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기 위한 대지를 대신한 것이며, 이로써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생명원리에 연루된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드레스가 생명을 위한 숙주 내지는 자기희생을 통한 모성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박혜수의 작업에서는 생태미술이 자연에서 취해온 향을 이용한 작업과, 인간의 시간과는 비교되는 자연의 시간을 기록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각종 나뭇잎과 꽃잎을 채집하고, 말리고, 이를 고운 가루로 빻은 후, 그 가루를 이용한 여러 형태의 조형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 가루가 일정한 크기로 구획된 공간 속에 흩뿌려져 설치되는가 하면, 마치 지층의 단면처럼 일종의 퇴적층을 형성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오랜 시간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자연의 생리를 체득하며, 자연의 시간을 체감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때로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만 일년 이상이 걸리기도 하는 그 과정은 인간의 질서와는 다른 자연의 질서를 드러내 보이며,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자연의 시간을 추체험케 한다.

더불어 작가는 자연의 시간을 기록한다. 횡단면으로 자른 나무둥치의 표면에 난 나이테의 문양을 따라 돋보기로써 선을 그리는 것이다. 산발적인 햇빛을 모아들이는 돋보기에 의한 이 그림은 실상은 햇빛이 그린 그림이며, 여기서 작가는 단지 자연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돕는 조력자 혹은 매개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서 신체의 움직임을 맞추어야 하는데, 이때 그 결과로서 나타난 드로잉의 길이는 그대로 태양의 길이에 일치한다. 태양의 움직임을 쫓는 작가의 신체의 행위가 중요한 과정으로서 드러나고, 이는 그대로 결과와 함께 과정이 강조되는 프로세스 아트의 일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낱낱이 기록한다. 순서대로 배열된 사진에는 자연스레 계절의 변화가 담겨 있고, 그것이 일종의 색 띠의 조형적인 요소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연과 더불어 작가가 보낸 시간의 기록이란 점에서는 일종의 사사로운 일기, 일지의 성격마저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재효와 임근우의 작업에서의 자연생태미술은 삶의 필요에 의해 조성된 각종 조형물들에 착안한 형태로서 나타난다. 이재효는 겨울을 나기 위해 쌓아 놓은 장작개비 더미나 사찰 가는 길가에 조성된 돌무더기(돌탑) 등 자연과 삶이 만들어낸 조형물과의 유기적인 결합의 예를 보여준다. 삶의 현장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미의식에 착안하여 가급적 인공적인 조형을 최소화하는 한편, 현저하게 자연의 원형에 가까운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절제된 감각이 돋보이는 조형 작업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자연미와 생활미가 맞닿아 있는 접점에 위치해 있으며, 더불어 자연의 원형을 추출하려는 욕망에 맞닿아 있다.

임근우의 작업은 전통적인 재식(齋式)을 소재로 하거나 형상화한 것이다. 작가는 <우주목 Cosmic tree>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무수한 오방색의 깃발 천들을 통해 전통적인 신당수(神堂樹) 또는 세계의 중심 신화를 형상화한다. 여기서 깃발의 오방색은 전통적으로 우주 또는 자연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자연 숭배 사상에 대한 공감을 내포하고 있다. 깃발과 함께 자연과 환경에 대한 염원과 메시지를 적은 리본을 매달아 기복적인 신앙과 염원, 샤머니즘의 의미를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인공적인 숲을 재구성하는 강효명의 작업은 자연을 매개로 한 치유미술의 형태를 띤다. 나뭇가지에다 갈색 계열의 종이로 만든 나뭇잎을 매달거나, 촛대와 초를 설치한다. 나뭇잎에는 격언이 쓰여 있고, 관객들은 나뭇잎에 적힌 글귀를 읽어보고 이를 촛불에 태운다. 그리고 바닥에는 수조를 설치해 일종의 연못 혹은 작은 정원을 재현한다. 이때 연못은 모든 생명의 원인이 되는 근원적인 물 즉 생명의 물을 상징하며, 그리고 물 특유의 반영성으로 인해 자기 반성적인 성찰로 이끄는 거울을 암시한다. 여기서 최초 갈색의 나뭇잎이 달려 있는 나무는 가을을, 그 나뭇잎들이 관객의 참여로 인해 떨어져나가고 마침내 앙상해져버린 나뭇가지는 겨울을, 그리고 이렇듯 빈 나무를 지키고 있는 촛불은 겨울에 잠재돼 있는 도래할 봄을 각각 예시한다. 이로써 작가는 자연의 순환하는 시간성을, 그 원리와 섭리를 암시한다. 관객 친화적인 쉼터로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휴식과 명상의 계기로 유도하는 것에서 작업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이외에도 차기율, 김보중, 홍현숙, 박훈 등의 작업이 자연생태미술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논점들을 시사해주고 있다. 지속적으로 <땅의 기억>을 테마로 작업해온 차기율은 버려진 손수레에 덩굴식물의 줄기와 뿌리가 서로 얽혀 있는 오브제를 통해 마치 자연이 만든 듯한 조형물을 보여준다. 작가의 작업에서 땅의 기억은 나무토막을 떠낸 테라코타로 기둥을 축조하거나, 껍질을 벗긴 단풍나무 가지에 조약돌을 매단 오브제를 설치하는 등의 형태로 변주된다. 때로는 자연의 원형에 주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과 문명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근작에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각종 아이콘이 담겨져 있는 수조 작업을 통해 문명 비판적인 작업을 내놓고 있다.

김보중의 <숲의 순례자, 숲 풍경 - 집>에서의 자연은 숲의 형태로 대리된다. 그에게서 숲은 근원적인 생명이 숨쉬는 곳이며,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유래한 자궁이며, 모든 생명이 되돌아갈 집이다. 숲은 생명을 주관하고 순례자를 정화하는,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영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숲은 거듭남 즉 진정한 생명을 충전 받아 새로이 태어나기 위한 통과의례의 장인 것이다.
홍현숙의 근작인 <은닉된 에너지>는 인체 중 머리카락을 비롯한 각종 털이 자라나는 모습과 함께 땅에서 자라나는 생명 있는 것들의 생장 모습을 비디오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잠재돼 있는 에너지에 관한 일종의 영상 보고서이다. 이로써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은닉하고 있는 에너지를 탐구하는 한편, 에너지의 변환 형태를 추적하고 있다. 이렇듯 인체를 비롯한 자연이 내재한 에너지에 대한 탐구는 흙이 내재한 생명력을 일종의 사회학적 기호인 옷과 결합시킨(옷의 층과 흙의 층을 마치 지층처럼 중첩시켜) 전작과도 통하는 것으로서, 자연의 잠재 에너지를 표출하거나 자연 에너지를 사회학적 맥락으로 전용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박훈은 웹상에서 진행되는 ‘DMZ-Web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생태미술이 개념미술과 결합된 예를, 그리고 그로부터 일종의 사회운동의 실천논리를 끌어낸 경우를 보여준다. 여기서 DMZ-Web 프로젝트란 전 세계적으로도 그 예가 드물 만큼 자연 환경이 잘 보존된 비무장지대를 세계 환경보호지정지구로 등록시켜, 그 지역에 대한 인위적인 개발을 막고 기존의 환경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인데, 작가는 관련 프로젝트를 홍보하고 이에 따른 관객의 참여를 유도해내는(관심을 끌어내고, 필요한 서명을 받아내는) 식의 일련의 과정 전체를 작업의 형식을 통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택과 전수천의 작업에서의 자연생태미술은 대지예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행위미술가 이승택은 <죽어가는 지구>에서 그 표면에 지구 그림이 그려진 거대한 풍선을 허공 중에 매달거나 바닥에 끌고 다니는 식의 환경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환경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하나 밖에 없는 지구의 현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승택과 함께 국내 대지예술을 대표하는 전수천은 특수 제작한 흰색 천으로 둘러싼 기차를 타고 미 대륙을 횡단하는 환경 프로젝트를 실현했다. 이로써 광활하게 펼쳐진 자연을 내달리는 기차를 통해 마치 (움직이는) 드로잉을 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 것이다.

손정은의 작업에서의 자연생태미술은 일종의 반어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작가는 녹음된 맑은 물소리와 흐르지 않는 강, 에어컨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정지된 시간, 그리고 온갖 플라스틱 조화(造花)와 박제된 새로 꾸며진 정원을 통해 가짜 낙원, 키치 정원, 자연의 시뮬라크르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를 <복락원>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작가는 현대인이 자연 자체보다는 각종 매체를 통해 유포되는 (자연의 원형과는 거리가 먼) 자연의 이미지에 더 길들여져 있으며, 따라서 진정한 자연을 상실한 것으로 진단한다.


학제간 연구, 자연생태미술과 고고학의 만남

자연생태미술은 학제간 연구방식으로 나타난 여타의 인문학적인 성과와의 제휴를 통해서 그 논의의 진폭을 넓혀가고 있다. 이는 크로스오버와 장르 넘나들기, 탈장르와 탈경계의 논리로 나타난 동시대미술 현상과도, 퓨전과 하이브리드로 나타난 동시대 문화 현상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학제간 제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유형으로는 자연생태미술과 고고학의 만남을 들 수 있으며, 이를 실현한 경우로는 국내 최고(最古)의 구석기 유적지를 배경으로 한 전곡포럼프로젝트와, 개별작가들 중에서는 조덕현과 고길천 등을 들 수 있다.

조덕현은 전남 영암 구림 마을을 배경으로 한 가상 발굴 프로젝트(2000)와, 이후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350년 전 하멜이 표류한 흔적들을 발굴하고 복원해내는 과정을 통해 이를 실현한다. 실제의 역사적인 사건 혹은 설화에다가 가상현실을 결부시키는 식의 일종의 가상의 역사 만들기 프로젝트인 것이다. 고고학적인 현실과 가상적인 현실을 결합시킨 일종의 유사 고고학에 그 맥락이 닿아 있는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역사 속에 자기를 개입시키는 과정을 통해 역사를 탈맥락화하고 재맥락화한다.

이러한 발굴 프로젝트는 고길천의 작업 <출토 - 부활 서기 2010>에서는 타임캡슐 식의 시간 넘나들기에 근거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미래의 특정 시기에 출토된 현재 상황을 가정해본 것이다. 출토된 내용은 멸종 위기에 처한 각종 동식물의 표본들이다. 작가는 이런 동식물의 표본과 고도로 인공화된 이미지를 대비시켜, 이들 동식물이 멸종하게 된 원인이 다름 아닌 문명임을 암시한다.

한편, 발굴 프로젝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백기영의 <대동여지도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작가는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지명을 탐사하고, 그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다.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이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간극만큼이나 벌어진, 땅에 대한 살림의 논리(지도를 제작할 당시의 땅에 대한 김정호의 논리)와 죽임의 논리(땅에 대한 동시대인의 논리)간의 차이를 본다. 그리고 현지에서 채집해온 익명의 흙에서 키워낸 싹으로부터 땅이 내재한 살림의 논리를, 그 재생의 가능성을 본다.


<도시생태미술

자연은 도시와 도시인의 삶 속에도 있다. 판자 집 지붕이나 아파트 베란다를 장식하고 있는 화분과 옥상에 가꿔놓은 텃밭 등. 이렇게 도시인의 일상 속으로 이식된 자연의 이면에는, 원래의 목적이나 기능에서 벗어나 다른 목적이나 기능으로 전용된 기물들(화분으로 전용된 스티로폼 박스나 폐타이어, 기존의 건물에 달아낸 별도의 구조물, 주차금지 표식으로 대용된 시멘트 구조물)처럼 자연과 문명간의 왜곡된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은 환경적인 조건(삶의 질)과 구분되지 않으며, 그 자체 장소 특정성이 강한 편이다.

이들 부류의 작업들로는, 아파트 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철거된 달동네의 황량한 풍경을 놀이 공간으로 전이시킨 고승욱의 작업, 특정 지역의 삶의 질을 집중적으로 조망한 김태헌의 <성남 프로젝트>, 버려진 탄광촌의 폐 사옥을 배경으로 한 21세기 청년작가협회의 <탄광촌미술관>,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비고(일부 사람들만이 사정상 남아 있는) 버려진 탄광촌 주변의 삶의 흔적을 지난 2001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기록해오고 있는 류장복의 <철암 그리기 프로젝트>, 청계천변 사람들의 삶의 양상과 그 흔적을 수년간에 걸쳐 작업으로 축적해오고 있는 플라잉시티의 <청계천 프로젝트>, 그리고 윤현옥의 <재건축 프로젝트>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윤현옥은 <잠실주공재건축아파트 프로젝트>나 <안양천 발굴 프로젝트>와 같은 현장성이 강한 프로젝트 성의 전시를 주로 실천해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예컨대 2001년 10월 강동구 둔촌동의 한 연립을 배경으로 행한 재개발 프로젝트의 실행 과정과, 이를 모니터한 영상 자료, 일종의 청사진으로 제시된 드로잉, 재개발 현장의 정경을 찍은 사진들을 보여준다. 이로써 작가는 한 시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주거의 흔적들을 기록하고 보존하며, 이런 주거의 형태가 망각 속으로 잊혀져 가는 과정을, 시간의 풍화와 더불어 소멸되는 과정을, 그리고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편 도시생태미술과 관련해서는 장소특정성 개념과 함께 스트리트 퍼니처 개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트리트 퍼니처는 일상을 그 자체 잠재적인 예술의 한 계기이자 장으로서 보는 개념이다. 이는 작게는 도시의 미관을 위해 설치된 여러 환경 조형물들을 지시하며, 크게는 도시 계획까지를 아우른다. 형형색색의 간판들, 육교와 다리와 고가도로, 지하철 출입구 지붕 장식(차양)과 환기구, 건물 옥상에 설치된 환풍기와 노랗고 파란 물탱크들, 그리고 나아가 모델하우스와 재건축 아파트 등 도시의 인공적인 풍경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 스트리트 퍼니처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결정적이고 독립적인 장르이기보다는, 기왕의 장르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장르적 개념이고, 학제간(學制間) 개념이다. 도시계획과 사회공학, 그리고 디자인이 서로 맞닿아 있는 스트리트 퍼니처 개념은 장소 특정성 개념과 함께 도시 사회학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는 미술과 삶과의 경계를 허물어 진정한 생활미술을, 삶의 미술을 실현한다는 강력한 실천논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자연설치미술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로부터 유래한 삶의 흔적(자연관)의 기록이란 점에서 개념미술과 연관되며, 이는 자연설치미술이 일종의 아카이브 개념의 형태로 현상할 수 있음을, 그리고 이로부터 삶에 봉사하는 실천논리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함을 말해준다. 또한 자연설치미술은 특정의 장소를 배경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현장성과 장소특정성 개념, 그리고 작업 자체가 자연의 순환원리 곧 시간의 과정과 더불어 진행된다는 점에서 프로세스 아트(과정예술)에 맞닿아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