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 판화 2004 - 새로운 모색과 실험전
개요, 한국현대판화가협회의 역사한국현대판화의 산실인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이 올해로 40회전을 맞는다. 지난 1968년 발족한 한국현대판화가협회는 그 동안 39회에 이르는 회원전, 18회에 이르는 국제판화교류전, 그리고 23회에 이르는 판화공모전을 각각 개최해왔다. 특히 지난 1981년 신진작가 발굴과 등용을 목적으로 신설된 판화공모전은 사실상 국내 유일의 판화전문 공모전으로서, 가장 권위 있는 공모전시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창립 초기에 13명으로 출발하여 2004년 현재 260명을 상회하는 회원작가들을 가진 대규모의 협회로 성장했다. 40회를 맞는 이번 전시에서는 정통판화는 물론이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다변화된 현대판화의 양상을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현대판화가협회의 역사는 그대로 한국현대판화의 역사와 일치한다. 그리고 한국현대판화사는 특히 그 초기의 경우에 있어서 한국현대미술사와 그 맥락을 같이한다. 흔히 한국현대미술사에 대해서는 대개 그 시점을 1950년대로 잡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에 이르는 국내 화단은 소위 뜨거운 서정 추상을 표방하는 앵포르멜 경향과, 상대적으로 차가운 추상을 표방하는 탈앵포르멜 경향, 그리고 설치와 해프닝을 통한 탈평면의 경향이 공존했다. 그리고 70년대는 모노크롬 회화가 대세를 이룬 시기로서, 예술의 자율성과 장르적 특수성의 추구로 특징 된다. 이는 서구 모더니즘 회화의 순수주의, 형식주의, 절대주의, 환원주의의 논리를 바탕으로 회화에 있어서의 모더니티를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연이은 80년대는 현실주의 미술과 순수주의 미술과의 이념 논쟁이 첨예화된 시기로서, 진작에 현실참여를 표방한 민중미술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제도권 미술에서 마저 소위 한국적 개념주의 미술과 미니멀리즘을 아우르는 모노크롬 회화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 경향이 시대정신과는 동떨어진 예술의 자기논리에 한정된 지적 유희에 머물러 있다며, 이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국내 화단은 80년대 중반에 도입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바탕을 둔 다원주의 경향을 보이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초창기에는 판화를 회화를 위한 형식실험의 한 방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만큼, 화가가 판화를 제작하는 형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후, 판화 자체의 장르적 특수성을 인식하고 판화만을 전문으로 하는 본격적인 판화가가 등장한 것은 유학파들이 교육 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한 70년대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초창기의 현상을 형식실험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판화의 내적 특수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것만큼이나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분방하고 치열한 판화제작환경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현대판화의 도입과 현대미술의 도입이 그 시기를 같이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국현대판화의 태생적 배경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말하자면, 현대판화는 회화와 밀접한 관련하에서 태어났고, 이를 근거로 자기 정체성을 발전시켜온 것이다.
1968년 창립된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작가들이 한국현대판화의 제 2세대라고 한다면, 1958년에 창립된 한국판화협회 작가들은 제 1세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현대판화가협회의 창설에는 한국판화협회가 그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현대판화사의 시점을 50년대로 설정한 것도 한국판화협회가 창립된 해에 따른 것이다. 한국판화협회는 1958년 국내 최초로 석판화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한,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석판화가로 알려진 이항성이 창립했다. 그의 석판화는 전통적인 먹그림과 붓글씨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편이며, 먹의 번짐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판종 고유의 특징을 살린 것이다. 그는 1958년 미국 신시내티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국제현대컬러리토그래피전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이항성은 본 협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에 제 1회 한국판화가협회전을 중앙공보관에서 개최했다. 당시 이항성을 비롯한 유강렬, 이상욱, 김정자, 최영림, 정규, 임직순, 장리석, 변종하, 차혁, 박성삼, 박수근, 최덕휴, 전상범, 이규호 등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흥미로운 점은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우드컷으로 판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본격적인 판화제작이 어려운 당시의 열악한 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목판화의 전통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공감이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그 대략을 보면 목판의 무늬를 그대로 살려낸 유강렬의 목판화에서는 전통적인 서체의 자유분방한 변형이 돋보이며, 닥지에 찍어낸 이상욱의 목판화는 심플하면서도 서정적인 화면이 특징이다. 향토성 짙은 최영림의 목판화는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 유학 시절, 당시 일본의 목판화가 무나카타 시코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리 부는 소년과 나체의 여인들을 소재로 한 목가적인 전원 풍경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934년과 40년에 각각 일본창작판화가협회전에서 입선하기도 한 그는 국내 최초의 현대판화작가로 평가된다. 또한 1956년 국내 최초로 목판화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한 정규의 목판화는 심플한 구성과 회화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화면이 특징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석재인 화강암의 표면질감을 도입한 박수근의 목판화는 당시 한국의 서민들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우둘투둘한 표면질감과 굵고 간략한 선으로 축약된 인체 표현을 통해서 그의 목판화는 그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경우로 생각된다.
한국판화협회는 정기적인 협회전과 함께 1968년에 처음 개최된 이후 1975년까지 존속된 신인 공모전을 통해서 송번수, 이승일, 김진석, 김태호, 백금남, 이인화 등 차세대 판화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포토스크린 판화 <판토마임>(1972)으로 제 2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송번수는 근작에서 페이퍼캐스팅을 통한 가시나무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승일은 공(空)을 주제로 한 릴리프와 새리그래피를 혼용한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그리고 김태호의 판화는 그의 회화에서처럼 재료로 도입된 안료의 물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한편, 그라데이션 기법에 의한 색면 구성과 함께 중첩된 화면에 바탕을 둔 추상화면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백금남의 실크스크린 판화는 글자를 변형시키고 양식화한 일종의 문자조형 작업이랄 수 있는 칼리그래피의 한 전형을 내놓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인화는 마치 무수한 비정형의 얼룩들이 중첩된 추상화면을 연상시키는 딥 에칭 작업, 회화의 자율성과 목판 고유의 물질적 특성을 극대화한 목판화, 그리고 전통적인 기물이나 소품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컬러 메조틴트 작업을 각각 선보이고 있다. 사물의 장식적인 재구성을 보여주는 메조틴트가 구상화적인 감수성을, 그리고 에너지의 방출이 느껴지는 딥 에칭과 목판화가 추상화적인 감수성을 각각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8년에 창립된 한국판화협회에는 강환섭, 김민자, 김상유, 김정자, 김종학, 김훈, 배륭, 서승원, 유강렬, 윤명로, 이상욱, 전성우, 최영림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여기서 일부 작가들이 한국판화협회 창립작가와 겹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한국현대판화가협회와 한국판화협회는 그 정체성이 구별되기보다는 연장된 경우로 봐야 할 것이다. 1968년 제 1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을 신세계화랑에서 개최한 본회는 1970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를 개최하는 데에 결정적인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우선 김상유는 정상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대신 독학으로 판화를 습득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판화사에 있어서 특이한 존재로 생각된다. 그는 실크스크린과 목판화 기법을 혼용한 <출구 없는 방>으로 1970년 제 1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흑백의 모노톤의 화면에 담아낸 함축적이고도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가 암울했던 당시 시대적 정황에 대한 인식을 고지시키는 한편,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 평가받았을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마치 전통적인 문양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일종의 모자이크화를 보는 듯한 에칭 동판화를 내놓고 있는데, 이로부터는 전통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런가하면 연못을 끼고 있는 정자 한가운데에 정좌해 있는 노인을 소재로 한 근작들은 전통적인 선비 정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배륭의 실크스크린 판화에서는 컬러풀한 색면 대비 효과와 함께, 문자의 도입으로 인해 팝아트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와 함께 기하학적인 구조물 속에 위치시킨 인물에게서는 일말의 명상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또한 탈앵포르멜을 표방한 오리진의 맴버이기도 한 서승원의 석판화 <동시성> 시리즈는 기하학적인 형상과 중첩된 색면 구성이 특징이며, 근작에서는 색면이 더 유기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윤명로가 60년대 초 실크스크린 판화로 제작한 <문신> 연작은 당시 앵포르멜 경향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석판화로 제작한 <얼레 짓>과 <익명의 땅> 시리즈는 해먹에 의한 석판화 특유의 미세 얼룩과 번짐 효과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근작에서는 겸제 예찬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과 함께, 리토그래피 제작에 토너를 이용하기도 한다.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창립에 자극 받은 이항성은 1968년에 <한국현대판화 10년전>을 기획 전시했는데, 당시 이항성을 비롯하여 김영주, 정규, 유강렬, 최영림, 배륭, 김정자, 강환섭, 이상욱, 윤명로, 김상유, 김종학 등이 전시에 참여했다. 이들 작가의 명단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판화협회작가와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작가들을 아우르는 사실상의 당대의 현대판화가들을 망라한 전시였다. 이외에도 판화를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기획전시를 개괄해 보면, 1970년 동아일보가 창간 5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그리고 1980년 월간 건축미술문화 잡지 공간의 창간자인 고 김수근에 의해 창설된 공간국제판화전이 있다. 특히 공간국제판화전은 공간국제소형판화전이 원래 명칭이며,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형 판화의 미학적 가치를 지향했다. 실제로 출품판화의 규격을 10x10cm로 제한함으로써 판화 고유의 작은 맛과 세밀함을 중시했으며, 특히 출품작가의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는 공모전 형식을 취한 것은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와 다른 점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제한 규정이 본 전시의 특수성과 관련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고, 향후 보다 자유분방한 현대판화를 수용할 요량으로 소형 판화의 규격 제한을 폐지했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관련 전시들로서는 1980년 <한국현대판화 드로잉 대전>, 1993년 <한국현대판화40년전>, 1999년 <한국현대판화전>,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판화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 2003년 <한국현대판화모음전>이 있다. 또한 1995년에는 한국판화미술진흥회가 설립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판화 전문 아트페어인 서울판화미술제를 개최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시 1995년 내일의 판화전이 열렸으며, 이 전시는 연이은 3회 전시 이후 폐지되었다. 서울판화미술제가 판화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를 꾀했다면, 내일의 판화전이 순수판화의 표현 가능성과 실험적 모색에 있어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사료된다. 이렇듯 판화를 대상으로 한 모든 전시들에 있어서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작가들이 때로는 견인차 역할을, 더러는 견제책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한국현대판화를 선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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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판화판화는 편의상 전통판화와 정통판화 그리고 현대판화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전통판화와 정통판화와의 구분이 비교적 뚜렷한 편인 반면, 정통판화와 현대판화의 구분은 상대적으로 더 유연한 편이다. 시기적으로는 전통판화가 과거에 속한 것인 반면, 정통판화와 현대판화는 현재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연하면, 전통판화란 옛날에 제작되어 현재에 전래되고 있는 고(古)판화, 고판화를 제작하는 방법을 현재에 계승하고 되살려낸 판화, 고판화를 복제한 복제판화를 말한다. 그리고 정통판화란 일반적으로 판화를 일컬으며, 전체 공정이 수(手)작업에 의해서 진행되고 제작된 판화를 말한다. 또한 현대판화는 새로이 등장한 각종 신매체를 도입하고, 작업의 상당 과정이 그 매체의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제작된 판화를 말한다.
정통판화는 판재(版材)의 종류에 따라서 목판화, 고무판화(리놀륨판화라고도 한다), 동판화, 석판화(아연판이나 알루미늄 판으로써 석판을 대신하기도 한다), 실크스크린 판화(새리그래피 또는 스텐실 판화라고도 한다), 지(紙)판화로 구분된다. 그리고 판법(版法)의 종류에 따라서 볼록판화, 오목판화, 평(平)판화, 공(空)판화를 기본으로 하여, 이 가운데 둘 이상의 판법을 혼용한 판화, 이상의 기본 판법을 응용한 판화를 포함한다. 그 밖에도 정통판화에는 여러 이질적인 오브제들을 조합하거나, 안료를 두텁게 올려 바른 화면을 판재로 하여 그 위에 잉킹하고 이를 종이에 대고 찍어낸 판화(콜라그래피)가 포함된다. 이로써 정통판화에서는 작업의 전체 과정이 수작업에 의한 것, 평면성의 한정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 처음부터 에디션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혹은 에디션이 가능한 것) 등의 여부가 전제 조건이 된다.
정통판법을 주로 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우선, 우드컷의 김형대, 김상구, 김익모, 안정민, 오경영, 강동석의 작업이 주목된다. 목판의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표면에다가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화염문을 형상화한 김형대의 후광 시리즈는 빛의 현상학을 떠올리게 한다. 좌우대칭형의 구도를 엄격히 적용하는 편인 판화에서 작가는 빛과 불의 형상을 그 자체 초월적이고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메타포와 결부시키고 있다. 그리고 흑과 백의 대비가 두드러진 모노톤의 화면, 세부가 생략된 심플한 화면, 최소한의 형과 선으로만 이루어진 절제된 화면, 그리고 판을 중첩시키지 않고 한번에 찍어낸 프로세스가 특징인 김상구의 목판화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한 폭의 심상 풍경을 그려 보이고 있다. 또한 80년대 아쿼틴트와 에칭을 혼용한 기법의 판화를 제작하기도 한 김익모의 근작 목판화 <몽상적 풍경> 연작은 멀리서 바라다 보이는 안개에 잠긴 남해의 고즈넉한 인상을 추상화 기호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메시지가 강한 편인 안정민의 목판화 연작은 거칠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며, 이념성이 강하고 서술적인 점이 특징이다. 이미지를 최소화하는 대신, 색채가 갖는 의미에 메시지를 의탁하는 식의 상징적인 문법이 확인된다. 작가는 목판화와 함께 음과 양의 이분법적인 세계를 함축적으로 표상한 메조틴트, 그리고 최근에는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성적인 정체성을 소재로 한 설치 판화 형식에 주력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국내 판화계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이경희의 우그인그래이빙에서는 정치한 묘사와 함께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느껴진다. 목판화의 대표적인 판법으로는 이처럼 우드컷, 우드인그래이빙과 함께 소멸법을 들 수 있다. 한판다색판법인 소멸법은 하나의 이미지를 판 위에 새겨 종이에 찍어내고, 다시 같은 판 위에 다른 이미지를 새겨 찍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겹겹이 찍히면서 드러나는 중첩효과로 인해, 목판화의 다른 판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밀도감 있는 화면을 얻을 수 있다. 중첩된 색면들과 스크래치 그리고 두터운 마티에르로 인해 판화 이상의 회화적인 느낌에 강하다. 그 주요 작가로는 신장식, 임영재, 허은영, 김중걸, 홍진숙이 있다. 이 가운데 신장식의 목판화는 초롱이나 촛불을 반복 열거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국적인 이미지를, 금강산 등의 산수를 소재로 한 전통적인 미적 감수성을 표출시킨다. 그리고 둥지를 소재로 한 임영재의 목판화에서는 화석 이미지와 함께 시간의 지층을, 그 편린을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목판화의 판법으로는 수인(水印)목판화 혹은 수성목판화가 있고, 그 주요 작가로는 이민과 최종식을 들 수 있다. 보통 유성잉크를 사용하는 일반 목판화와는 다르게 수용성의 먹과 수성안료를 사용하며, 종이와 안료가 일체화된 자연스런 스밈과 번짐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볼록판의 대표적인 판종으로는 목판화와 함께 리놀륨판화 곧 고무판화가 있고, 그 주요 작가로는 정원철을 들 수 있다. 정원철은 대석리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터전을 소재로 한 서사적인 판화와,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메시지가 강한 연작 판화에서 보통사람들의 초상의 한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개인사 곧 개인의 삶의 역사가 집약된 일종의 상징이자 기호이며 삶의 지도로서의 초상이 갖는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작가의 판화를 특징짓는 요소로는 초소형 핸드 그라인더에 의한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대상의 세밀한 부분까지 포착해내는 특유의 선묘를 들 수 있다. 조각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속도감이 회화적인 깊이를 더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생리를 그대로 빼 닮은 유연한 선묘와 스크래치가 초상에 각인된 삶의 상처를 보는 듯하다. 근작에서 작가는 기왕의 초상과 함께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납판의 표면에 천연기념물과 같은 여러 곤충들, 새들 등 사라지는 동식물을 프린트로 기록하는데, 이 작업들에서는 일종의 박물학적인 개념이 발견된다. 어느 경우이건 작가의 작업은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둔 리얼리티의 실천에 맞춰져 있다.
조각칼 대신 치과용 소형 드릴을 이용하여 선묘하는 작가로는 정원철과 함께 박영근을 들 수 있다. 정원철이 이 연장을 이용하여 대상의 세부를 정치하게 묘사하고 있다면, 박영근은 같은 연장을 이용하여 오히려 견고한 형체를 해체시킨다. 말하자면 그의 판화에서는 연장에 의한 빠른 속도감과 함께 드로잉이 강조되고, 이로써 그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을 환기시킨다. 주로 만찬과 시간을 주제로 한 일련의 판화에 나타난 주제의식은 검은 화면으로 나타난 암울한 색채 감정과 맞물려 바니타스 곧 삶의 덧없음을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이 흐르는 시간 속의 한 과정으로서 나타나며, 본래의 형체로서보다는 최소한의 흔적과 궤적 그리고 자취로서 드러난다. 흑백의 모노톤의 화면 속에 나타난 스크래치가 어둠 속에 부유하는 빛의 편린들로 화한 파편화된 사물들을 보여주며, 이렇게 드러난 사물들의 흔적이 모든 물질적인 존재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동판화는 판면에 직접 이미지를 새기는 직접판법과 판의 부식과정을 통한 간접판법을 아우른다. 단일판법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예컨대 에칭과 아쿼틴트를 혼용하는 등의 둘 이상의 판법이 혼용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 주요작가로는 김봉태, 하동철, 한운성, 곽남신, 강승희, 이영애, 장영숙, 조성애, 오이량, 최미아, 김란희, 유권열, 강준, 이성구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정형과 비정형의 원과 사각형의 변주에 바탕을 둔 특유의 기하학적 화면을 구사하고 있는 김봉태의 70년대 판화에는 일말의 이국적인 정취가 배어 있다. 말하자면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장식문양을 변주한 색면 구성과 함께 원주민 미술의 토템 폴을 변주한 기하학적 형태가 돋보인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 토템 폴 형상에서는 물활론이나 범신론에 대한 일정한 관심과 함께, 모뉴멘털한 특성이 감지된다. 그리고 이후 근작에서는 전래하는 태극과 팔괘에 대한 작가 특유의 해석이 작업의 지층을 이루고 있다. 그 형상은 추상적 무브망을 통해 표현되며, 마치 전통적인 칠보 공예의 끊음질 기법을 연상시킨다. 근작을 지배하는 주요 개념으로는 드나름 개념이 있는데, 이는 들어가고 나가는 것,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일원론에 바탕을 둔 동양적 사유 체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기하학적인 화면과 그라데이션 기법을 통한 인공적인 색채 프리즘에 바탕을 둔 하동철의 판화에서는 빛에 대한 형식실험이 엿보인다. 근작에서는 기계부품이나 동전, 나무의 한 단면, 그리고 기타 오브제를 이용한 프로타주와 탁본 기법을 응용하고 있다. 1980년 표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문>으로 동아미술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한운성의 판화에서는 시대에 대한 발언이 감지된다. 예컨대 찌그러진 코카콜라 캔을 소재로 한 판화 <거인>으로써 자본 잠식을 목적으로 한 신제국주의를 비판하는가 하면, 천과 끈으로 동여매진 신호등을 소재로 한 판화 <신호등>과 <매듭> 시리즈에서는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에 대해서 논평하고 있는 것이다. 근작에서는 석류와 감 피망과 같은 과일과 채소류로 소재를 다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복사이미지를 도입, 컴퓨터프로세싱을 통해 확대 변형시키는 등의 형식실험에도 주력하고 있다.
그 동안 곽남신은 일관되게 기호가 내재한 의미에, 기호가 발생시킬 수 있는 아우라에, 기호를 어떤 상황이나 문맥 속에 놓는 방식에 주목해 왔다. 이는 <우리 시대의 이콘> 연작으로 나타나며, 여기서 이콘이란 일종의 기원 내지는 주술적인 치유력을 암시하는 기호의 한 성질을 말한다. 이런 이콘 시리즈와 함께 근작에서는 미세한 번짐을 수반하는 실루엣 형상, 정형의 점들, 판 자체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나타난 암시적인 평면을 꽃잎이나 기물 등의 소재와 일치시킨 심플하고도 장식적인 화면을 내놓고 있다. 강승희의 초기 작업은 주로 정적과 여명에 싸여 있는 도심의 변두리 풍경을 통해서 삭막한 도심의 이면을 들추어내 보인다. 그리고 근작에서는 새벽녘의 한강변을 소재로 하여 어스름하고 파르스름한 대기의 분위기가 강한 시적이고 서정적인 화면을 재구성해내고 있다. 형상을 실루엣으로 단순화시키고 화면의 상당 부분을 여백에 할애함으로써 새벽녘의 대기를 강조하는 작가의 방식은 대상을 즉물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작가의 내면에서 한차례 걸러진 내면화된 풍경을 보여준다.
또한 주로 마른 나뭇잎과 꽃잎을 소재로 한 이영애의 판화에서는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이 대비되고 있으며, 정적이고 관조적인 화면 구성이 특징이다. 근작에서는 어망을 소재로 하여 이런 암시적인 화면 효과를 다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장영숙의 판화에서 화면의 대부분은 여백에 할애된 채로 남겨지며, 화면은 최소한의 선과 면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절제된 화면이 실제와 비실제가 공존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을 열어 놓는가 하면, 판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풍경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희박해서 마치 망각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아스라한 심경을 갖게 한다.
오이량은 에칭 처리한 판면에 일종의 종이 납을 엠보싱한 물질성이 강한 <존재> 연작을 내놓고 있다. 이로부터는 납 고유의 금속성과 함께 연성의 부드러움이, 그리고 물질감 만큼이나 강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납 고유의 물질성, 딥 에칭에 의한 손에 만져질 듯한 표면 요철효과, 절제된 단색조의 화면, 그리고 이 모두를 담아낸 기하학적이고 심플한 화면구성에 바탕을 둔 그의 판화는 비교적 정통적인 판법에 충실한 편이면서도 그 자체 독자적인 오브제를 상기시킨다. 근작에서는 실리콘을 소재로 한 작업으로써 판화와 회화, 평면과 입체를 아우르는 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최미아의 판화는 재구축된 조형적 원리로써 일종의 질서에 대한 메타포를 암시한다. 또한 비스코시티 기법에 의한 김란희의 동판화는 드로잉이 강조된 회화적 화면이 특징이며, 이는 씨 뿌리기를 주제로 한 근작에서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런가하면 유권열은 전설상의 고대도시 아틀란티스를 소재로 하여 이상향과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아틀란티스는 인간의 의식을 과거와 함께 미래로 옮겨주는 통로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주제의식은 낭만적이고 SF적이다. 이런 환상적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작가는 평면을 넘어서는 저부조와 공간설치의 형식실험을 꾀하고 있기도 하다.
동판화 가운데서도 여타의 판법과 비교적 뚜렷이 구별되는 편인 경우로는 메조틴트 판화를 들 수 있다. 메조틴트 판화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 초상화 제작에 널리 이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정통적인 판법 중에 하나이다. 이는 아마도 판법이 요구하는 정치(精緻)한 묘사가 구상성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구상성은 판법 자체에 대한 충실을 요구하는 한편, 구상 이외의 보다 현대적인 판화로의 이행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판화가 반드시 현대적일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에 속한다. 그 주요작가로는 김승연, 박정호, 전경자, 이순희, 김소영, 한소영이 있다. 이 가운데 김승연은 주로 마치 사진과도 같이 정교한 도심의 밤거리를 포착해 보여주고 있다. 구도상으로 부감법을 구사하여 도심을 스펙터클 하게 조망하는가 하면, 근접시점을 사용하여 그 야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도시민의 삶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박정호는 주로 여체와 꽃 그리고 달이 떠 있는 텅 빈 밤의 정경을 결합시키는 방법으로써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정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절대 침묵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생명의 상징들이며, 그 상징의 편린들이 화면을 일종의 내면화한 우주의 메타포로서 재편해내고 있다. 흑과 백의 대비가 강한 공간 속에서 생산을 암시하는 여체와 대지 그리고 달의 신화적 의미가 결합된 정적인 화면이 명상의 계기를 열어 놓는다. 여체는 밤과 함께 어둠 속에 던져진 인간 실존의 표상이며, 나뭇잎과 꽃 그리고 열매는 밤이 열어 보이는 자연의 신비다. 이처럼 밤의 베일에 가려진 시적 서정성이 작가의 판화를 감싸고 있다.
석판화에서는 김용식, 황용진, 홍재연, 구자현, 유희경, 정환선 같은 작가가 주목된다. 이 가운데 김용식의 <영원과 한계> 시리즈는 십자가의 변형 이미지와 시계의 차용 그리고 빛 이미지의 도입을 통해서 영원성에 바탕을 둔 일종의 기독교적인 도상학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말이나 소와 같은 동물과 최근에는 인간을 소재로 한 황용진의 판화는 일말의 도상성과 함께 우화적이고 신화적인 멘탈리티를 느끼게 한다. 김용식과 황용진이 일정한 구상적 소재로부터 작업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다면, 홍재연과 구자현의 작업은 실제 하는 어떤 대상에 기대는 대신, 석판화 자체의 내재적 특수성에 근거하고 있다. 해먹에 의한 자연스런 번짐 효과와 미세 얼룩효과가 전면화한 판화로서, 석판화의 프로세스에 나타난 현상을 그대로 작품으로 끌어온 것이다. 나아가 예컨대 홍재연의 작업에서 부도(浮屠)와 같은, 그리고 구자현의 작업에서 나뭇가지와 같은 일말의 형상성이 발견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연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석판화 고유의 판법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석판화의 성질에 천착하는 과정과 방법으로써 고유의 자기 언어를 구축한 예로 사료된다.
유희경의 작업은 동시대의 다양한 지평으로부터 사회학적인 기호들을 채집해 놓은 일종의 이미지 백과사전에 비유된다. 인쇄 매체로부터 발췌한 이미지와 유명 상표와 로고, 숫자와 광고 문구들을 조합해놓은 것이 일견 복잡한 화면을 연상시키지만, 채집된 단편들에 대한 일정한 추상화의 과정과 흑백 모노톤의 절제된 색채가 들뜬 화면을 조절해준다. 이때 이미지를 조합하는 콜라주 기법과 전사기법이 반복 교차된 중층화된 판이 물질감을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반쯤은 추상화된, 흔적으로만 남은 최초의 이미지들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실존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광고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익명인으로서의 동시대인의 정체성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환선의 석판화에 등장하는 인간군상은 비록 꿈꾸는 듯한 비현실적 풍경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획일화된 익명적 존재, 개체성을 상실한 소외된 존재로서의 현대인의 초상을 숨기고 있다. 외적으로 드러난 꿈과 몽상은 오히려 현대인이 저당 잡힌 것, 상실한 것을 환기시켜 줄뿐이다.
여러 이질적인 판법을 혼용한 콜라그래피는 판을 만들기 위해 도입한 오브제가 갖는 물질적 성질 곧 즉물적인 효과에 뛰어나며, 다양한 회화적 효과가 가능한 화면을 얻을 수 있다. 그 주요 작가로는 정경희, 서유정, 김승수, 김연숙, 윤윤주, 이선원이 있다. 이 가운데 정경희의 판화는 수지의 결정체가 굳어서 만들어진 투명하고 맑은 호박 속에 딱정벌레나 장수하늘소 등의 곤충 화석을 각인 시키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정지된 시간의 한 순간을 포착한 듯한, 시간의 순수한 결정체를 추출한 듯한 정적이고 세련된 느낌이다.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공간감, 빛의 아우라를 포착해낸 절제된 색채 감각, 그리고 소재의 밀도 있는 재현이 작품의 완성도를 더한다. 호박 속에 갇힌 곤충 화석을 자아라고 명명한 것에서는 일말의 자기반영성을 엿보게 한다. 틀 속에, 시간의 굴레에 갇힌 자의식을 표출한 것이다. 이처럼 자연으로부터 취해온 소재를 자의식에 결부시킨 작가의 작업은 최근의 생태 논의에 그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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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화, 새로운 실험과 모색현대판화에 대한 논의는 정통적인 판법을 보존함으로써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 또는 그 순수성을 지켜나갈 것인지, 혹은 다른 장르와의 경계를 허물고 현대미술 일반과 그 흐름을 함께 할 것인지에 맞추어지기 마련이다. 이때 판화의 정의를 조금만 유연하게 생각해보면 판화가 포괄할 수 있는 범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떠한 형태로건 판법을 자기 작업의 일부로서 차용하는 작가나 작업의 사례는 거의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인쇄로부터 태어난 판화의 출생 배경 역시 이런 판화의 광범위한 적용을 가능케 한다. 한마디로 판화는 인쇄매체와 기록문화의 변화하는 양상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로는 일상으로 접하는 책을 들 수 있다. 광의로 볼 때, 책은 분명 판화의 한 형식이다. 여기서 회화가 그려진 직접적인 이미지라고 한다면, 판화는 판이라고 하는 중간 매개체를 통해서 찍어낸 간접적인 이미지다. 인쇄술이 아무리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책은 여전히 활판이라는 중간 매개체를 요구하고 있고, 또한 찍어낸다는 메커니즘을 통하고 있다. 게다가 한정매수 내에서 찍어낸 판화 한 장 한 장에 대해서 오리지널을 인정해주는 에디션 개념은 판화와 함께 책에도 적용된다. 판화와 마찬가지로 책 역시 원본과 사본과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나아가 현대판화는 일상 속에서 접하는 여러 기성품들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판화와 함께 대량 복제된 기물들 역시 복제와 복수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판화 아닌 것이 없고, 나아가 판화가 곧 일상이라는 말조차 가능해진다. 적어도 판화를 개념으로만 이해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현대판화는 대개 화면 크기의 확대, 재료의 다양화, 평면성의 탈피, 기법의 확대, 정통적인 판법과 타 장르와의 결합, 그리고 각종 첨단 테크놀로지의 도입으로 나타난다. 우선, 전통적으로 판화는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화면 속에 담겨진 함축된 표현을 통한 정치한 묘사를 미덕으로 여겼다. 예로부터 판화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도서관이 주요 소장처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심지어 돋보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우표 크기의 소형판화도 그 예가 적지 않다. 이처럼 작은 크기의 화면에 함축된 표현을 중시하는 소형판화에 대한 인식은 공간국제판화전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최근에 공간국제판화전이 이런 소형판화의 한정을 철폐한 것은 판화만의 정치한 묘사와 함께, 상대적으로 더 큰 사이즈에 담겨진 보다 자유분방하고도 회화적인 표현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여진다. 이처럼 현대판화에 있어서 화면의 크기가 확대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소형판화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회화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재료의 다양화에 대해서는 기왕의 종이를 비롯한 가죽, 여타의 잡지나 책자 그리고 영화와 연극 포스터 등의 인쇄물, 유리와 아크릴 판, 투명 또는 반투명의 비닐 소재, 엑스레이와 네거티브 필름, 심지어 철판이나 납판 등의 금속성의 소재를 광범위하게 포함한다. 여기서 인쇄물을 화면으로 이용하는 것은 프린트와는 별개로 기왕의 화면에 인쇄된 각종 정보와 이미지들을 통해서 동시대적인 문화 현상과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문제 의식 또는 시대적 감수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현장성 있는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인쇄물은 직접 화면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파편화된 이미지의 편린들을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적용되기도 한다.
또한 유리 또는 아크릴 판을 소재로 하는 경우에는 부식기법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도 하고, 이미지를 투사하는 투명한 성질에 착안하여 프린트한 여러 장의 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일루전적인 착시효과를 꾀하기도 한다(강애란). 비닐 소재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런 투명한 성질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프린트된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이미지의 실상과 허상을 묻는 식의 개념성이 강한 작업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엑스레이 필름과 각종 네거티브 필름은 예컨대 인간의 신체 조건과 개인의 정체성을 결부시키는 식의 몸 담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일련의 작업에서 널리 차용되고 있다(박광열, 고길천). 또한 납판은 특유의 유연성으로 인해 판화의 찍는다는 프로세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특징을 십분 살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오이량, 정원철, 안정민).
재료의 다양화와 관련해서는 특히 서정희와 임정은의 작업이 주목된다. 주로 플랙시글라스에 나뭇잎이나 숲의 이미지를 스크린 한 서정희의 판화는 실제 하는 자연과 관념 속의 자연을 대비시키며, 그 이면에서 생태주의에 접맥돼 있다. 목판이나 유리판 그리고 스테인리스스틸 망과 같은 지지대를 다변화한 것이나, 특히 유리판에 선각(線刻)하는 방법(유리에칭)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에서는 정통적인 판법과 재료를 확대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형식실험의 일면이 엿보인다. 그리고 사포 질 처리한 간유리(샌드블레이션)의 표면에 여러 정형 비정형의 사각형 형태를 변주시킨 임정은의 <다중존재> 연작에서는 빛에 의한 이미지의 변형 효과와 함께,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유희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확대된 소재는 판화의 기본 개념 중의 하나인 평면성을 표면성으로 전이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평면성을 탈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가죽이나 비닐 그리고 납판의 소재는 종이처럼 그 지지체로서의 기능이 안정적이지 않은 대신 유연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주름까지 생긴다. 이렇듯 주름 사이에 프린트된 이미지도 그러하거니와, 곡면에 프린트된 이미지에 대해서는 평면성보다는 표면성의 개념 적용이 더 적합하다. 평면성의 이러한 탈피에 대해서는 여러 형태의 입체판화에서 그 예를 접할 수 있다. 입체판화는 평면에 프린트 한 후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자르거나 조립하는 형식으로 입체화하며, 더러는 공간을 작업의 일부로 적극 수용하는 설치의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설치판화). 이보다 더 일반적인 경우로는 릴리프 형식의 종이부조판화와 석고 또는 점토(세라믹)의 소재를 빌려 입체를 표현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런 석고 주형과 함께 실리콘 주형이 널리 쓰이고 있으며, 석고 주형에 비해 더 유연하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이점이 있다. 이런 입체판화, 설치판화, 릴리프판화는 대개 캐스팅과 몰딩의 방법에 바탕을 둔 각종 거푸집 이미지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 가운데 입체판화와 관련해서는 평면으로 나타난 이미지의 편린들을 마치 등고선을 쌓듯 여러 겹으로 중첩시켜 3차원의 입체를 연출한 여동헌의 판화가 주목된다. 그리고 윤동천, 박훈, 백승관, 황재숙의 판화는 설치판화에 대한 사례를 예시해준다. 윤동천의 작업에서는 행위가 주요 개념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설문지를 배포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작가의 행위는 일종의 정치적인 참여행위이자 의사표현의 행위로 나타난다. 그리고 작가는 식빵의 표면이나 종이 네프킨에 특정의 문장을 타이핑하는 등의 메시지가 강한 개념주의 성향의 작업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오브제의 생산이라는 전통적인 맥락보다는 행위 자체를 강조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의 개념에 가깝다. 그리고 박훈의 작업은 주로 환경오염을 경고하는 환경프로젝트의 형태를 띠며, 이는 예컨대 DMZ 일대를 유네스코의 세계환경보존지구로 등재하려는 DMZ 프로젝트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는 박훈의 작업에서는 일정한 계몽성과 함께 퍼포먼스의 성향이 발견된다. 그런가하면 사진전사기법에 의한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각종 차트플레이트를 디스플레이하고, 이를 오브제와 혼용한 백승관의 작업은 개념성이 강한 설치판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릴리프판화와 관련한 주요 작가로는 김현실, 김희자, 신지원, 이미숙, 최정윤, 하원의 예가 주목된다.
그리고 현대판화에 나타난 기법의 확대는 사진전사기법, 레이저 커팅 기법, 그리고 각종 캐스팅 기법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협의로는 정통적인 판법 내에서 그 기법이 다변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광의로는 정통적인 판법과 타 장르가 결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현대판화에 나타난 가장 일반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포토에칭이나 포토 리토(포토 리토그래피)와 같이 판화 기법과 사진 기법을 결합한 경우, 아예 사진 자체를 판화로 간주한 경우(젤라틴실버프린트, 시바크롬프린트), 판화와 회화가 결합한 모노타입 혹은 모노프린트, 판화와 조각이 결합한 멀티플, 멀티플 개념이 확대 적용된 아트북 혹은 아티스트북(예술가가 만든 책), 그리고 각종 혼합매체판화 또는 다중매체판화를 포함한다.
이들 가운데 판화와 사진이 결합한 형태의 사진전사기법이 가장 일반적인 경우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현재 판화는 물론 회화 일반에서도 광범위하게 확인되고 있다. 프로세스로나 그 생리상 판화와 사진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친근한 관계에 있다. 말하자면 에칭과 실크스크린 그리고 석판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정통적인 판종에서 사진기법은 사실적인 이미지를 얻기 위한 효과적인 한 방편으로서 작가들에 의해 널리 차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회화와 마찬가지로 일품성을 중시하는 모노타이프 또는 모노프린트 역시 이런 확장된 판화 개념이 적용된 예로 봐야 한다. 여기서 모노타이프나 모노프린트가 기본적으로는 하나같이 복수제작이 불가능한 일회적인 판으로 찍은 판화를 지칭하지만, 그 세부에 있어서는 조금 다르다. 그러니까 모노타이프는 판각되지 않은 평판에 순전히 회화적인 방법만을 동원하여 그림을 그리고 찍어낸 경우로서, 단 한 장의 판화만을 찍어낼 수 있다. 반면, 모노프린트는 판각된 판 위에 회화적인 방법을 응용하여 잉킹하거나 여기에 일정한 가필의 과정을 거쳐서 찍어낸 경우로서, 어느 정도 비슷한 이미지의 에디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주요 작가로는 송대섭, 김찬일, 엄정호, 김선정, 이서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송대섭의 모노타이프 <갯벌> 시리즈에서는 중층화된 화면과 회화성이 두드러져 보이며, 최근의 생태와 환경 논의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리고 김찬일의 모노프린트는 점자 이미지와 함께, 마치 금속성의 표면질감을 연상시킨다.
또한 멀티플은 삼차원의 입체작품이 복수 제작되는 경우를 말하며, 기존의 조각이 재주조된 레플리카와도, 판화의 복수성과도, 그리고 책과 같은 인쇄 복제와도 구분된다. 그러면서도 멀티플은 판화와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에디션으로 복수 제작되며, 그 하나하나가 오리지널리티를 인정받는다. 멀티플은 기왕의 판화는 물론 사실상 무한정 복수 제작이 가능한 브론즈 조각, 테라코타, 도예, 금속공예, 기타 혼합재료를 이용한 릴리프를 포함한다. 또한 멀티플은 책과 마찬가지로 출판의 형식을 통해 출간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여타의 개념미술가들의 자료적 성격이 강한 각종 기록물들, 조각가들이 복수 제작한 조각들, 그리고 각종 아티스트 북이 포함된다.
아트북 혹은 아티스트북과 관련해서는 특히 이명숙과 강애란의 작업이 주목된다. 여기서 이명숙이 정통적인 수작업의 한정 내에서 아트북을 제작하고 있다면, 강애란은 책 자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사색을 전개시킨 경우로 볼 수 있다. 강애란의 책 작업은 원래 책을 싼 꾸러미 혹은 보자기를 알루미늄 소재로 캐스팅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책 작업은 현저하게 설치의 형태로 진화하는데, 예컨대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 폴리 소재로써 책을 캐스팅하고 여기에 내부조명을 도입한 작업, 동영상을 도입한 일종의 전자책, 그리고 최근의 도서관이나 서가를 재현한 사진과 영상 작업에 이르기까지 책의 포름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일견 책의 역사를 재구성해낸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책 속에서 인간의 역사를 그리고 지식의 역사를 본다. 곧 그의 작업에 나타난 책은 그대로 인간의 지식이 투영된 일종의 메타포로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확대된 판화개념의 일종으로서의 혼합매체판화 또는 다중매체판화는 둘 이상의 여러 이질적인 매체들을 복합 혼용한 판화를, 그리고 특히 각종 미디어를 수용하여 제작된 판화를 일컫는다. 여기에는 박광열, 조명식, 한수정, 강문경, 김민섭, 김수연, 민경아, 배상하, 백성혜, 손철호, 신경희, 신수진, 양선희, 유동희, 이숙현, 정미영, 정미선, 최성욱 같은 작가들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박광열은 소재로나 형태 면에서 다양한 형식실험에 주력해오고 있다. 예컨대 신축성 있는 가죽 표면에 사진전사기법을 통해 얼굴을 프린트한다든지, 엑스레이 필름을 일종의 프린트로 제시한다. 그리고 복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여 이를 마치 상품처럼 디스플레이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시멘트로 구조물을 캐스팅하기도 하고, 근작에서는 목화 성분의 팰트를 소재로 하여 이를 캐스팅한 저부조 판화를 내놓고 있다. 그리고 우표, 상표, 전화번호부, 직인이 찍힌 엽서, 사진 등을 종이 위에 전사하기도 하고, 마치 오브제처럼 붙이기도 한 조명식의 작업은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기호의 편린들을 아우르고 있다. 또한 기성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이를 현실에 대비시키는 한수정의 작업은 이미지와 현실, 선입견과 기대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현대판화는 동시대의 다양한 첨단의 매체들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판화의 지평을 증대시킨다. 이는 오프셋, 디지털프린트, 제록스프린트, 청사진, 네코프린트, 메일아트, 그리고 동영상판화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오프셋은 정밀한 판을 빨리 선명하게 인쇄하는 평판인쇄의 하나로서, 순수판화작업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기술이며, 대신 고급서적이나 달력 등을 제작하는데 많이 쓰이는 대중적 인쇄방식이다.
그리고 디지털프린트는 컴퓨터프린트 또는 잉크젯프린트라고도 한다. 디지털프린트는 모든 이미지를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제작하는 방법과, 드로잉이나 사진 또는 인쇄물 등 기존의 이미지를 컴퓨터로 불러들여 재생산하는 방법이 있다. 말하자면 마우스로 불러들인 판화 혹은 차용해온 이미지를 모니터 상에서 재편집, 재조작, 재출력한 과정의 산물 등을 아우르는 것이다. 때로는 이렇게 출력된 작품 위에 드로잉이나 페인팅을 가해 일회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출력된 이미지를 재출력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최초의 이미지로부터 상당할 정도로 멀어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디지털프린트는 그 자체로서 완결되기도 하고, 정통판화기법과 결합하기도 하고, 아예 컴퓨터 출력을 위한 정보만을 저장한 CD롬 형태로 제시되기도 한다. 나아가 인터넷에다가 작품의 정보를 띄우고 원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출력할 수 있는 형태의 작품도 선보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디지털프린트의 가능성이 실험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프린트가 인터넷아트 또는 웹아트에 접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주요 작가로는 정상곤, 이수연, 임영길, 정미옥, 김유철, 김선, 김진, 김태철, 김필구, 김효숙, 박수경, 서성석, 양만기, 오영재, 유혜진, 이민경, 이정화, 이항아, 정신공, 하혜리 등의 작가가 주목된다. 이 가운데 이미지를 컴퓨터에 입력시켜 임의의 형태로 변형시킨 후 이를 한지에다가 출력해낸 정상곤의 판화는 디지털판화에서 가능한 다양한 변형의 양상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자잘한 조각들로 분해되어 크게 확대되기도 하고, 그 부분들이 연속된 형태로 출력되기도 한다. 소형의 출력물을 모은 연작의 형태로 제시되기도 하고, 때로는 필름으로 출력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실크스크린이나 오목 판화로 번안되기도 한다. 한지의 유기적인 질감의 소재가 출력된 이미지 특유의 기계적인 느낌을 상쇄하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수연의 디지털프린트는 90년대 이후의 몸 담론 중 특히 유사 신체와 유사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마치 소박파 화가 앙리 루소를 연상시키는 원시림 가운데에 남녀 바비 인형을 배치한 작품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의미론적으로 더미(운명으로서의 몸)와 마네킹(상품으로서의 몸)의 연장선에 있다. 플라스틱과 스팽글 등 온갖 조야한 싸구려 복제품으로 치장된 의사 낙원이 진정한 낙원의 상실을 반증하며, 키치적 감수성을 상기시킨다. 근작에서는 홀로그램으로 시각적 일루전을 확대시키고 있기도 하다.
또한 임영길이 제작한 일련의 판화들은 문명 비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무장된 수족관> 연작에서 수조에 침몰된, 조작된 이미지의 제시를 통해서 자연과 문명 그리고 허구와 실제를 대비시키고 충돌시킨다. 문제는 작가가 디스플레이하는 방법이 현대판화가 존재할 수 있는 또 다른 한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는 점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를 종이 위에 잉크젯 방식으로 출력하기도 하고(컴퓨터프린트), 컴퓨터 프리젠테이션 방식에 의해 빔 프로젝트로 출력하기도 하고(동영상판화), 인터넷을 통해 유포시키기도 한다(인터넷아트). 그리고 근작에서는 전자파의 유도방출에 의한 레이저로 조각도를 대신하여 컴퓨터에 입력된 그림을 목판에 새기는 레이저 커팅 기법을 선보이기도 한다. 주역(周易)에 바탕을 둔 근작에서 작가는 컴퓨터프로세싱과 레이저 커팅 기법을 통해서 신체와 자연을 접목시키고, 전통적인 소재를 현재적인 문제의식에 접속시킨다. 이외에도 작가는 시간성을 도입하는 등 현대판화의 형식실험에 진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마치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착시효과가 특징인 정미옥의 근작에서 컴퓨터 프로세싱은 작업의 한 과정으로서 적극 도입되고 있다. 컴퓨터 프로세싱에 의한 일차 이미지 작업 후 이를 필름으로 떠내고, 그 필름을 바탕으로 하여 실크스크린 판화로 찍어낸다. 말하자면 작가는 컴퓨터상에서 패턴을 다양한 방식으로 중첩시켜본다든지, 그 위에 적절한 색상을 덧입혀본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실제 작업에서 예상될 수 있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최소화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컴퓨터 프로세싱의 도입으로 근작에서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하고 다양한 화면을 내놓고 있다.
그밖에 제록스프린트는 복사미술 또는 카피아트라고도 한다. 제록스프린트는 비교적 손쉬운 방법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는 이점으로 인해 현재 널리 보편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때 복사기를 통해 원본을 복제한 사본은 원본과는 다른 또 하나의 원본으로 간주된다. 그런가하면 주로 팩시밀리를 매체로 한 각종 전송 이미지의 형태로 나타난 메일아트에 대해서는 그 생리가 순수한 조형적 산물로서보다는, 상대적으로 개념미술의 그것에 가깝다. 말하자면 조형적 성과물로서보다는 소통의 가능성을 중시한 것이다. 그리고 동영상판화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조작으로 일련의 연속적 그림을 움직이게 하는 식의 영상작업 자체를 판화의 확장된 한 개념으로 인식한 경우이다. 스틸 화면을 컴퓨터프로그래밍으로 재 출력한 동영상 판화는 일종의 다중매체판화의 한 형식으로서, 동시대 매체를 적극 수용한다는 의미와 함께, 고정된 한 순간의 포착에 머물고 있는 조형예술에다가 시간성의 표현을 결부시키려는 노력과 연관된다. 말하자면 동시성의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협의로는 판화의, 그리고 광의로는 조형예술 일반의 지평을 증대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통판화의 특수성은 판화 고유의 프로세스로부터 온다. 회화가 그려진 이미지라고 한다면, 판화는 찍혀져 나온 이미지로서, 그 이미지의 성질이 서로 다르다. 판화의 특수성은 이렇게 회화와는 다른 판화만의 장르적 특질을 인정하는 것, 판화만의 본질을 헤아리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를테면 프레스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일정한 압력으로 인한 밀도감 있는 이미지, 미세하지만 손에 오돌토돌한 요철이 만져지고 느껴지는 이미지야말로 판화의 묘미인 것이다. 그리고 세밀한 이미지는 물론이고 거친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그 행위와 과정 그리고 흔적을 고스란히 보전하는 생생한 표현과 함께, 손에 잡힐 듯한 물질감 역시 판화만의 특징이랄 수 있다.
반면, 현대판화의 특수성은 복수성으로부터 온다. 현재 판화를 대상으로 한 국제적인 규모의 각종 관련 전시에서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판화는 물론 사진, 멀티플, 아티스트 북, 그리고 디지털프린트를 포괄하는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사진과 프린터 그리고 컴퓨터 등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이런 출력물이야말로 아마도 현대판화의 지형도를 바꿔 놓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일 것이다. 현대판화에 나타난 이러한 양상은 동시대의 매체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판화의 지평을 증대시킨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수작업에 의한 정통적인 판화와 동시대의 매체를 적극 도입한 소위 매체 판화를 구분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겨 놓고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정통판화와 현대판화는 서로 구분되는 것이기보다는 상호 내포적인 관계에 있다. 정통판화와 현대판화는 어디까지나 개념상의 구분인 것으로서, 그 속에 어떠한 가치론적 개념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정통판화와 현대판화가 균형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서로를 견인할 수 있는 발전적 계기가 찾아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