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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 공간의 재구조화

고충환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유례없이 다양한 양식들과, 양식화 또는 정전화를 거부하는 실험적인 모색들이 공존하는 동시대 미술의 현상에 대해 혹자는 ‘정체성 없는 시대’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체성 없는 시대’는 엄밀하게는 ‘다(多) 정체성의 시대’란 말로 고쳐져야 한다. ‘정체성 없음’의 관념은 양식화 또는 특화된 정체성을 전제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양식화(특화)된 정체성이 없음을 지시하는 것이지, 그것이 양식화(특화)되지 않은, 혹은 일부러 양식화(특화)를 거부하는 수많은 다양한 정체성들의 존재를 무효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특화된 정체성의 요구가 자기 외적인 정체성들의 억압을 실행해온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디 미술뿐이랴. 모든 인간 문명의 흔적들은 이러한 자기 정당화를 위해 자기 외적인 곳에다가 억압의 지대를 설정하는 것이며, 나아가 정체성과 탈정체성 사이의 긴장과 갈등과 가역(可逆)과 불가역(不可逆), 그리고 교환으로 이어진 역사요 산물인 것이다.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특화된 정체성이 모더니즘을, 그리고 다(多) 정체성이 포스트모더니티를 각각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모더니즘이 정체화의 과정을, 포스트모더니티가 탈정체화의 과정을 거쳐왔다고 할 수 있다.

자기를 정체화하는 모더니즘의 과정은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어떤 선험적인 원리에 회화의 과정을 소급시키는 환원주의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세잔의 세계적 환원주의, 몬드리안의 기하적 환원주의, 그린버그의 회화적 환원주의, 주드의 프라이머리 스트럭처(최소한의 구조), 그리고 프리드의 리터럴 오브제(문자적 오브제)로 이어진 일련의 논리적 전개가 그렇다. 그 진정성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일련의 전개는 사실상 그동안 화가가 참조하거나 재현해온 세계의 흔적을 화면으로부터 지워나가는 점진적인 과정에 다름아니다. 이렇듯이 세계의 흔적은 물론이거니와 회화와 작가의 흔적마저 지워나감으로써, 회화는 마침내 순수한 익명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이렇듯이 익명성을 획득한 회화는 회화와 탈회화, 조각과 탈조각, 그리고 재현된 이미지와 실제하는 오브제와의 사이에, 나아가 아예 이러한 구분 외부에 위치하는 애매한, 중성자적인 정체성 또는 탈정체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예컨대 텅 빈 캔버스가 그렇고, 쉬포르 쉬르파스의 프레임 없는 캔버스와, 캔버스 틀로부터 벗겨진 캔버스 천과 캔버스 틀이 그렇다. 또한 조각에도 회화에도 그렇다고 실제하는 오브제에도 속하지 않는 주드의 구조물이 그렇고, 좌대로부터 바닥에 내려온 조각과 좌대 자체가 그렇다.

이때 회화이건 조각이건 오브제이건 그것은 예술가가 참조한 세계의 흔적이거나 그에 의해 재현된 세계이기를 그치고, 대신 세계 자체와 구분되지 않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가역적인) 분기점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프리드가 연극적인 맥락에 도입된 소품에 빗댄, 리터럴 오브제는 사실상 각색되거나 연출된 세계 (문맥) 속에 존재하는 오브제를 지시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는 실제하는 감각 세계가 사실은 각색되거나 연출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는 있지만, 적어도 프리드가 제시한 리터럴 오브제가 실제 오브제와 갖는 차이가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여하튼 자기 정체성을 향한 모더니즘의 논리적 전개가 끝나는 지점에서, 모더니즘은 세계의 배제와 함께 세계 자체를 차용하는 아이러니의 지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의 지점 곧 가역적인 분기점에 설치미술이 위치한다. 즉 설치미술은 세계를 참조하거나 재현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이기보다는 세계 자체를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세계를 제시한다는 것은 세계를 직접적으로 차용하는 설치미술의 소재적인 국면을, 세계를 실행한다는 것은 세계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설치미술의 전략적인 측면을 말한다.
이렇듯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의 변화는 동시대 미술의 변화를 대변한다. 그 변화는 대략 형식미학으로부터 내용주의 미학으로의 변화로 대별된다. 스타일 곧 양식 또는 형식에 주어진 의미 비중이 내용 또는 질적인 국면으로 옮아간 것이다. 설치미술은 현란한, 그리고 때로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외관 곧 형식적인 국면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는 질적인 국면에 기울어진 내용주의 미학의 리바이벌인 것이다. 기존의 내용주의 미학의 성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설치미술이 더 이상 대상화된 세계를 전제하지 않는, 현저하게 세계 자체와 구분되지 않는 점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설치미술의, 탈정체화를 실행하는 전략적인 국면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탈정체화는 설치미술이 기본적으로 내용주의 미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용이란 의미를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의미란 여하한 경우에도 고갈되는 곧 정체화하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보면, 순수 형식의 성취라는 모더니즘의 목표는 진작에 그 최종적인 귀결점으로서의 정체화가 예시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상 모더니즘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최종적인 지점에 이르기를 일부러 지연시키거나 보류하거나 중간에 멈추어 선 혐의가 없지 않다. 가장 최근의 성과랄 수 있는 리터럴 오브제조차 순수 형식의 성취를 위해 화면으로부터 세계를 지운 순간, 세계 자체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모더니즘이 자기 정체성을 향한 행보를 시작한 최초의 지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던가.




<설치미술

얼마 전 서울 강남의 포스코 센터 앞 광장에 설치된 프랭크 스텔라의 환경설치조각 ‘아마벨’이 철거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사례 이상의, 건축비의 1% 내에서 환경 구조물을 설치해야한다는 건축법 자체의 적용과 성과에 대한 미술계 내외적인 격렬한 논란으로까지 증대되었다. 지난 1996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매년 한 작가를 선정해서 초대 전시하는 ‘올해의 작가전’에 무대설치미술 작가를 선정한 것을 들어, 미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주와 관련해서 역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호암미술관이 ‘프랑스 설치작가 8인 연출전’(1995)을,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이 ‘볼탕스키전’(1997)을 여는 등 특히 90년대에 들어서 국내의 유명 미술관과 화랑들이 앞다투어 국외의 유명 설치작가전을 유치한 적이 있다. 그리고 광주 비엔날레가 특히 환경과 정보 매체적 성격의 기획전을 중심으로 설치미술을 집중 소개한 적이 있으며, 국내 유명 공모전에 설치미술이 한 장르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세계적인 규모의 미술 행사에 참여해서 수상하는 작가들의 주된 이력 역시 설치미술이 되고 있으며, 판화 역시 입체판화니 설치판화니 해서 탈평면을 시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재에도 이러한 추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설치미술은 이제 더 이상 낯선 구경거리가 아닌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경과하면서 국내의 설치미술은 도입기와 정착기를 지나 심화기와 반성기로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대외적으로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를 앞두고 재차 수공과 페인팅의 방법론으로 회귀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일각에서는 설치미술이 드로브의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보듯이 단순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거나 마치 유행이 그렇듯이 잠시 머무르다 지나가는 한시적인 현상이라고도 한다. 과연 그럴까. 설치미술은 한시적인 유행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설치미술의 형식적인 국면에만 주목한다면 그 형식은 단지 감각적이고 현란한 세계의 외관을 반영할 따름인, 알맹이를 결여한 껍데기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어필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현란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설치미술은 다름아닌 내용주의 미학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내용은 거대담론이 그렇듯이 정전화한 수직적 구조로서보다는, 더 이상 권력이기를 포기한 수평적 구조와의 연장선에 있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설치미술은 예컨대 회화와 조각 등의 전통적인 미술 장르의 구분과 경계를 해체해서 여타의 장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탈장르 또는 크로스오버의 형식을 띤다. 여타 장르의 성과를 도입한다는 점에서 ‘절충적인 미술’로 불리기도 한다. 설치미술은 또한 대지미술이나 대안공간에서 보듯이 화랑이라는 특정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아가서 화랑의 구조물 자체를 아예 예술가가 의도한 의미화의 일부로 종속시키는 것에서 보듯이 전통적인 공간 개념을 넘어서기도 한다. 키네틱 아트와 프로세스 아트에서 보듯이 전통적인 공간 개념에 시간 개념을 도입하기도, 그리고 특히 소통적인 면에서 멀티미디어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때로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관객의 참여에 의해 비로소 의미를 발생시키거나 완성(완결)되는 상호작용의 형식을 취한다. 시각은 물론이고 청각과 촉각과 후각 등 오감 전체를 작업에 도입하며, 따라서 단순한 시지각적인 경험에 한정된 미술로부터 총체적인 감각 체험으로서의 예술로 그 의미가 옮아가거나 증대된다.

설치미술에 대한 인상을 전통적인 시지각 방식과 비교해볼 때 이렇듯이 생경하게 느껴지게 하는 주범은 다름아닌 변화된 소재에 있다. 이를테면 동시대 미술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들인 폐기처분된 공산품 쓰레기(신사실주의), 폐 타이어(정크아트), 폐 플라스틱 조각(토니 크렉)이 기존의 회화 또는 조각의 주요 소재들인 안료와 캔버스, 대리석과 브론즈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달라진 소재를 전시하는 방법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이를테면 아상블라주(집적미술)가 그렇다. 한마디로 정신이 달라지면 소재가 달라지고, 소재가 달라지면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 역시 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설치미술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세계를 참조하거나 재현하는 대신 아예 세계 자체에 속한 일부를 차용하는 것에 있으며, 그리고 공간이 작품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프레임으로서보다는 자기와 분리할 수 없는 의미화의 일부로 다룸으로써 전통적인 공간 개념을 넘어서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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