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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예술

이선영

역사와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얼마 전 폴 고갱의 작품 [언제 결혼하니](1892)가 중동 산유국인 카타르의 왕족에게 3천 272억 원에 팔려 그 전까지 미술품 거래 사상 최고가였던 폴 세잔의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1890-1895)의 기록인 2천 7백억 원을 깼다는 뉴스가 있었다. 비공식, 공식 거래를 합쳐서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는 근현대미술—그 뉴스는 천 억대 이상에 오른 작가로 프랜시스 베이컨, 뭉크, 피카소, 자코메티의 예를 든다—은 종종 미술계 너머서 까지 화제가 되곤 한다. 이러한 작가들은 서양미술사에 일찍이 이름을 올리며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명작을 낳은 천재들로 회자된다. 정작 그걸 그린 화가도 놀랬을 이러한 액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격이 매겨지는 수수께끼 같은 과정을 생각하게 하며, 미술이란 것이 귀중하고 어떤 실체를 가지는 활동임을 반증한다. 반대로, 종종 일어나는 이러한 믿기 어려운 사건들은 여전히 예술이 환상적인 것임을 확인시킬 것이다. 

 


폴 고갱, [nafea_foa_ipoipo], 1892년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1890-1895년, 오르세이 미술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의식으로 충만한 청년기를 보냈으나 ‘아직도’ 작품의 ‘가격 경쟁력’이 없어서 매 순간 작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해야 하는 작가들에게 그토록 절박한 그 ‘실체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예술성? 그러나 예술성이라는 평가 자체에 불확실한 요소들이 너무나 많기에 대답이 될 수 없다. 사회적 평가의 최첨단에서 종종 벌어지는, 놀랄만한 가치평가는 보이지 않는 체계를 예시한다. 교과서 속의 작품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가격이라는 형식으로 재현되는 것에는 물신적 구조가 필수적이다. 고갱의 작품 속 두 원주민 여성은 운 좋게도 예외적이지만, 구조의 밑바닥에는 가시화되지 못한 수많은 타자들이 있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인상주의 전후의 작가들과 당대의 무명작가들 뿐 아니라, 그 이후 사회 속에서 미술이라는 제도를 유지해오고 있는 수많은 미술계 구성원들의 그림자 노동(shadow work)으로서의 작업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그런 천문학적 가격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기야 그렇게 따지면 체계가 어떤 한 작품에 몰아 준 3천 272억 원이라는 액수도 그다지 큰 것은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 해당 작가가 살아생전에 그 액수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작품을 팔았을 때, 그 작가가 지금 남아있는 명작들에 쏟은 만큼의 작업을 치열하게 했을지도 의문이다. 체계라는 물신적 기구는 공시적이면서도 통시적으로 작동하면서 사건을 만들어낸다. 특히 역사적 배경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는 작가들 대부분은 근대이래, 미술의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평가된 이들이다. 최고라고 상찬되는 가치평가에는 논리와 역사적 순서를 중첩시키는 맥락이 필요하며, 이러한 선적 맥락 속에서 역대 최고가로 평가되는 것이 당연할 ‘최초’와 ‘유일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모든 가치를 가격으로 환원하려는 경향 속에서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가치가 있다는 다원적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단선적 역사화와 관련된 담론들은 권력이다. 

 

다수의 타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들이 극소수에게 귀속되는 놀랄만한 가치로 만드는 것은 체계이다. 물신주의는 체계는 합리주의만큼이나 비합리주의를 확대한다. 모든 가치평가에는 물신주의를 추동하는 서열화가 깔려 있다. 세상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때로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들까지도 한 줄로 세우려는 특정한 역사의 한 경향, 즉 역사주의는 대표적인 물신적 장치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식민주의와 세계화를 통해 역사주의의 혜택을 선점해왔던 ‘선진국’ 이외의 주변 지역들을 지배하는 것은 발전주의로 변신한 역사주의이다. 저기에 따라가야 할 전범이 있고, 지금 여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원인이 어딘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와 저기, 그때와 지금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선적 질서 속에서 다수의 욕망을 집중시키는 물신적 체계가 구축된다. 역사주의는 새로움, 진보, 창조, 실존, 자유, 해방 같은 예술과 근접한 논리들을 생산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진정한 다원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하는 예술과는 차이가 있다. 예술적인 것(그와 연동되는 새로움과 진보, 자유와 해방)을 높이 사는 척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배척한다. 예술이 역사주의에 편승했을 때 스스로를 부정하게 된다. 역사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논리와 수사학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역사에 대한 거리두기의 한 방법은 역사를 역사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 역사 또한 종교적 맥락으로 설명한다. 그는 근대에 와서 인간적인 경험으로 가득한 역사의 시간이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주적, 순환적인 무한한 시간 안에 다시 통합하려는 고대적 감성을 파괴한다. 엘리아데는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저항, 자신의 자율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역사적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다. 현대인은 역사적인 사건들, 즉 새로움에 점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인간에게 그 새로움은 무의미한 우연이거나 규범에 위배되는 것이고, 따라서 주기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역사적인 의식의 관점이란 근대인의 관점을 말한다. 역사가 내포하는 온갖 새로운 것과 비가역적인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를 원했던 고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역사의 비(非) 가역성과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삶에서 최근의 발명품에 속한다. 전통적 인간에게 모든 것이 동일한 원초적 원형들의 반복에 불과하다. 원형의 반복은 원형적인 행위가 계시되었던 신화적인 순간을 재현함으로서, 세계를 그 최초의 동일한 여명의 순간 속에 끊임없이 머물게 해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진화론이 득세하면서 역사에 대한 선적이고 진보주의적 관념은 대중화되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인간은 역사적인 한에서만 창조적일 수 있었다. 현대인이 뽐내는 자유란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자유이다. 현대의 초창기에는 역사적인 실존이 내포하는 자유가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역사적이 되어갈수록, 그 자유는 도달 불가능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고대적인 전통사회는 해마다 무구한 잠재성과 더불어 새롭고도 순수한 삶을 시작하는 자유를 허용하였다. 봄이면 회복되는 자연의 무구한 가능성과 함께 그렇게 했다. 고대인은 더없이 창조적인 행위인 우주창조의 반복에 해마다 참여한다. 동방은 인간존재의 운명이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방의 수행기법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거나 무효화시키려고 애쓴다. 이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나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의 창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제는 그야말로 새로운 인간의 창조이고, 인신(人神)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한편 유대-기독교에 의해 최초로 원형들과 반복의 지평이 초월되었을 때 자유란 믿음으로 대치된다. 가령 자신의 원천과 보증과 근거를 신 안에서 발견하는 자유만이 현대인을 역사의 폭압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현대적인 인간, 역사적인 인간의 종교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순환적인 시간 대신에 지속적인 시간을 동시에 발견해낸 인간의 종교였다. 여기에서 인간은 신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 자유를 획득한다. 자유는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인간에게 자율성을 부여해준다.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 안에 새롭고 독특한 존재양태 하나를 창시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엘리아데는 서구 사상의 근본을 이루었던 기독교가 명백히 ‘전락한 인간’의 종교임이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현대인이 돌이킬 수 없이 역사와 진보에 동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역사와 진보 모두 원형들과 반복의 낙원에 대한 결정적인 포기를 내포하는 일종의 전락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근대는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자 총체적인 체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근대성은 19-20세기의 역사철학들을 해방의 이념으로 물들였다. 칸트는 [세계주의의 견지에서 본 일반 역사의 구조]에서 ‘보편적인 역사’라는 개념을 제창하였는데, 여기서 역사의 최종목표는 인간자유의 실현이었다. 헤겔 또한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발전’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보편사를 쓰려고 애써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유의 발전이라는 것을 역사의 중심 테마로 잡았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메타이야기’, 즉 보편사의 끝은 비록 희망사항이긴 해도, 보편적인 자유, 전 인류의 해방이었다. 이러한 메타이야기의 전형은 계몽주의 사관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들에게는 과거는 비이성적이었으며, 현재는 이성과 비이성 간의 갈등이며, 오직 미래만이 비이성적인 것에 대한 이성의 승리, 완전한 통합과 구원으로 파악되는 시간이었다. 방향성을 가진 역사 발전이라는 관념에 깔려있는 대표적 메커니즘으로 근대 자연과학을 들 수 있다. 근대 자연과학은 막스 베버가 언급했듯이,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자유사회로 인도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동시에 관료적인 전제정치의 악몽으로 인류를 몰아넣었다는 양면성을 가진다. 물론 과학은 근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경제효율의 원리에 따라서 철저한 합리화를 꾀하는 것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이 합리성의 추구야말로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는 사회 모두에 획일적인 발전을 초래했다. 인간이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품고 있는 한, 근대과학의 논리는 인간 사회를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근대적 산업발전은 일관된 성장의 패턴을 걸어왔고, 마침내는 국가와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균질적 사회, 정치구조를 산출했으며, 근대사회는 세계시장이나 보편적인 소비문화를 통해 점차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자연과학은 근대초기에 제한 없는 부의 축적을 가속화시켰는데, 이것은 이성과 욕망이 손을 잡은 덕분에 가능했다. 서양의 전통에서 ‘보편적인 역사’라는 사고방식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독교 문명에서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 색을 배제하고 보편 사를 쓰려던 움직임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근대의 과학적 방법론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다. 계속 축적되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곧 진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 와서는 모든 것이 역사화 되었고 역사성(historicity)이 과장되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역사 속의 존재, 역사의 산물로 보는 것은 근대의 특징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시대를 바라본 결과 각 민족국가가 역사 발전에 근거해서 그들의 정당성을 확보했으며, 특히 근대화 과정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태적인 사고를 전세대의 정태적인 사고와 대조시키면서 혁명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졌다. 모더니스트는 새로운 것과 전대미문의 것을 추구함으로서 ‘창조적 파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갔다.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이란 유일한 계획의 점진적인 전개를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역사가는 역사적 과정에 내재해 있는 계획을 해독하고 숨어있는 목적을 점친다. 역사주의(historicism)에 대한 현대의 강력한 비판자는 칼 포퍼로서, 그가 비판하는 역사주의는 역사적 예측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역사와 진보 밑바닥에 있는 규칙적인 흐름이나 패턴, 법칙, 경향들을 발견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편사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과학과 역사를 혼동했기에 실패했다. 전체론적 교조적 역사주의의 결과는 현대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우익 독재와 좌익 전체주의로 양분된 세계였다. 파국적인 근대성의 결과 근대적인 메타이야기는 불신되었다. 대표적인 메타 서사인 역사주의는 극복되어야 했다.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종말이 왔다고 주장한 것은 심각한 대사건을 포함한 역사적 사실의 발생이 아니라, ‘역사’ 그자체 이다. 즉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의 경험에서 생각하더라도 유일한, 그리고 일관된 진화과정으로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보편적인 인류 역사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물으며, 역사주의의 목적론적 논술형식은 운명의 전개나 법칙의 현현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그것은 사건의 패턴을 발견하려는 이성의 능력이나 어떤 패턴을 사건 위에 놓으려는 경향을 낳았다. 

 

후쿠야마는 인류가 천년왕국의 끝(즉 20세기)에 가까워짐에 따라 우익 독재도 사회주의적 중앙정부의 계획경제도 모두 비슷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세계는 역사를 벗어난 지역(민주주의적인 유럽)과 ‘아직도’ 역사에 매달려 있는 지역(역사세계)로 나뉠 것이라고 본다. 그의 탈역사주의 이론이 예술에 주는 영감은 패기에 대한 이론이다. [역사의 종말]은 근대를 추동해 왔던 욕망과 이성에 ‘패기’라는 또 다른 요소를 도입한다. 이것은 근대는 이성이, 탈근대는 욕망이 지배한다는 잘못된 단순화를 피하면서, 역사의 변증법 안에 예술적 활동이 차지하는 역할을 예시한다. 후쿠야마는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영혼이 욕망, 이성, 그리고 패기(thymos) 세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귀족문화의 핵심은 자진해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려는 탁월한 우월감인데, 이는 자신의 자유를 인정(recognition)받기 위한 것으로, 욕망과 이성보다는 패기와 관련된다. 패기란 예술이란 것이 잘 먹고 잘사는 것 이상의 과제와 연관됨을 알려준다.

 

욕망과 이성은 자본주의와 자연과학이 연합됨으로서 근대를 관통해 왔다. 그러나 진보는 욕망과 이성 이외에 패기가 필요하였다. 즉 진보는 개인적 욕망에 가득한 인간, 경제적인 인간, 천성적인 부르주아의 손익계산에 의해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후쿠야마는 홉스로부터 비롯되는 전통, 즉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보다는 자기를 보존하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앵글로 색슨적인 자기만족의 전통과, 헤겔로 대변되는 전통 즉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협소한 육체적 관심사를 희생하고 지고한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기극복의 전통을 대조한다. 홉스나 로크같은 근대초기의 자유사상가들의 생각했던 시민사회는 (정열을 포함한) 패기보다는 욕망과 이성을 중시하였다. 앵글로 색슨의 전통은 귀족적인 우월감보다는 자연법적인 욕망 충족의 평등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 안전과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결과를 낳았고, 현대 대중사회가 보여주듯이 균질화 된 문화를 낳았다. 

 

자유보다는 억압을 낳는 균질성에 대해 일단의 패기에 찬 사람들은 새롭고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기를 주장한다. 예술로 대표되는 그것은 어떤 공리주의적 목적과도 무관하며, 새로운 규칙과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역사가 종말을 맞은 후’에 일어날 수 있는 뛰어난 인간적 활동으로 간주된다. 이때 예술은 근대적 분업화의 격벽에 갇힌 채 주변화 되거나 지배 사회의 동일적 논리를 또 다른 차원에서 반복하면서 억압을 재생산하는 차원을 넘어설 것이다. 역사 이후에 예술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탁월한 비전은 니이체에서 찾아진다. 니이체는 역사주의가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이미 이에 강력한 회의를 표명했다. 그는 당대의 부르주아 뿐 아니라 서민들도 배척했던 귀족적 급진주의자로서 패기의 옹호했으며, ‘초역사’를 주장했다. 니이체의 ‘계보학’은 역사에 대한 대안이다. 계보학은 근대적 역사의 근본적인 비판자의 역사철학이 압축되어있다. 

 

니이체는 당대의 역사주의에 대항하여, 보편성에 대한 주장과 초연한 표정의 배후에는 특정한 이해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계보학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역사주의가 기원과 목적을 중시함에 비해, 니이체가 고대에서 재발견한 영겁회귀는 현재성을 중시한다. 현재성을 중시하는 것은 회상보다는 망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망각의 힘으로 인간은 자유롭게 현재를 고찰할 수 있고, 투명한 시각과 의지를 가질 수 있다. 회상하는 힘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정된 과거나 특정한 미래에 자신을 결합시키는 나쁜 성향이다. 니이체에 의하면 개인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기억도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산물이다. 니이체는 사회든 자연이든 진화 사상에 나타난 적응 대신 활동을 중시했다. 변화와 생성은 최후의 의도와 최종상태를 지향하지 않으며, 진리 그자체도 확실하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과정이다. 니이체는 상호 관련된 대상들의 방대한 총합으로 세계를 파악했고, 이러한 결합체와 이들을 연결하는 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계보학이라고 보았다. 

 

현대의 니이체주의자 미셀 푸코가 말하듯이 계보학자가 밝혀낸 사물의 배후, 그 비밀이란 본질은 없으며, 본질이라는 것도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엉성하게 조작된 결과에 불과하다. 니이체는 사물 그 자체의 본질, 기원, 목적을 거부하였고, 기원을 찬양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했다. ‘어디에서나 모든 기원은 조야하고 형체가 없으며, 공허하고 추하다. 기원을 향한 여행은 야만에 이르기 마련이다’(니이체) 계보학자는 역사의 기원과 목적을 거부하기에, 니이체에게 최악의 가설은 현재의 이러한 제도의 목적과 의미 및 최종결과가 초기에도 잠재해 있었다는 주장이다. 미술의 예를 들자면, 모더니즘에서 물신화된 회화의 평면성은 애초에 그러한 형식에 관심도 없었던 작가들에게서 그 흔적이 찾아진다.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마네? 그러나 근대적인 그의 작품의 많은 부분은 전통이나 알레고리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다. 비록 마네에게 역사란 당대의 아카데미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역사화와는 달랐지만 말이다. 

 

기원과 목적을 추적하려는 역사가들의 의도에는 특정 시점이나 지점을 절정화 하려는 ‘권력에의 의지’가 작동한다. 이 의지가 이윤추구와도 연결됨은 서양미술사를 물신화한 블록버스터 급 전시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니이체는 제도의 기원을 추적함으로서 그것의 진정한 목적과 본질 및 역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러한 추적이 원래의 조건이나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초기의 단계로부터 후기의 단계로의 발전 방법은 비논리적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단선적 논리를 거부한 결과 니이체는 급진적 상대주의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는 ‘원근법주의(perspectivism)'의 개념을 통해 투시하는 것만큼의 많은 공간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다원적 관점에 의하면 세계자체의 특징이나 인간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거나,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견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란 단지 해석에 불과하게 된다. [권력에의 의지]에서 니이체는 사물이란 그 영향의 총합이며, 관찰자인 우리자신까지도 포함해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대하여 갖는 영향이 그 사물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그는 세계의 불확정성 및 가치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근대적인 주/ 객체에 대항하는 유목적(normadic) 자아, 다양성으로서의 주체 개념을 낳았다. 니이체에게 세계과정은 합리적,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심미적, 순환적이었다. 세계의 모든 것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하나의 변화가 모든 것의 변화를 동시에 초래한다. 이것의 이상적인 모델은 예술작품이었기에 니이체는 세계를 텍스트로 보았다. ‘텍스트로서의 세계 읽기, 변화시키기, 창조하기’를 통해 객관성, 중립성, 실증성이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역사에 대한 근대적 관점, 즉 역사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특히 역사를 과학으로 변모시키려는 경향이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작용에 치명적이라고 하면서, 근대성을 탈피하자고 하였다. ‘근대는 이성과 객관성을 삶의 최상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비난하는 니이체는 근대의 낙관주의와 전망을 부정하였다. 니이체에게 역사의 장은 개념화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를 창조하는 무대로 간주된다. 

 

역사조차도 심미적으로 보았던 니이체에게 있어 예술이란 삶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 놓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철학자의 철학이나 정치가의 철학, 또는 과학자의 철학이 아닌, 예술가의 철학이 될 수 있다. 역사와 철학을 심미적으로 보는 것은 세계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에게 객관성이란 최고의 형식으로 구성된 것인데, 그 결과 그 구성물은 역사적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진정한 작품이 된다. 니이체의 세계관은 탈역사 시대에 삶의 전위(예술의 전위가 아니라)로서 강력한 예술가상을 예시한다. 니이체의 이상적인 삶의 비전인 초인의 삶이란 많은 다양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모델로서 예술가적 자아를 의미한다. 그 예술가는 근대의 합리적인 자아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고 통제된 충동들의 결합의 산물이다. 예술가는 유사 과학자나 유사 정치가가 아니라, ‘광대이며, 신이고, 성자이며, 깡패’(니이체)일 수 있다. 

 

니이체는 사실주의를 유사 과학이라고 하면서 비판했고, 모더니즘 역시 파괴만을 일삼는 허무주의라고 보았다. 그의 예술적 이상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가 조화를 이루는 고대에 있었다.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의 전제 자체가 의심되고 있는 시대에 그 토대를 이루었던 ‘보편적 진보’와 역사주의는 그자체가 역사화 될 필요가 있다. 이때 탈(post) 역사주의 이론은 하나의 방법을 예시한다. 가령 앞서 길게 인용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산업자본주의와 근대 자연과학이 전제하는 욕망과 이성중심의 패러다임이 종국에는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 그리고 ‘예술의 종말’을 예시하는 파국적 상황을 도래시켰다고 본다. 그리고 이성과 욕망을 넘어서 자신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패기의 발현을 옹호한다. 패기는 무엇보다도 예술과 관련된다. 역사의 종점에선 최후의 인간들과 대항하는 이는 니이체가 제시한 패기에 찬 초인적 예술가에서 찾아진다. 가치중립이라는 근대적 가치가 승자 독식의 시스템에 알리바이를 대주고 있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적 삶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서 예술 편향적, 또는 예술 중심적 사고일 것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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