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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시작을 위한 자리

이선영

반복되는 시작을 위한 자리


13개의 방_knock 전 (3.27—4.23, 대안공간 눈* 예술공간봄)

  이선영(미술평론가)

  

‘13개의 방_Knock’ 전은 대안공간 눈이 있는 수원 일대의 5개 미술대학의 2015년 졸업생 중 13인을 선정하여 기획한 신진작가전이다. 지역의 대안공간이 졸업 후 막막했을 지역의 청년작가들에게 전시기회를 주는 것은 작가들에게나 관객들에게나 의미 있고 반가운 일이다. 작가에겐 작품이 바로 자신의 증명서에 다름없기에, 운이든 노력이든 전시 기회를 확보하지 못하면 졸업장도 큰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신진작가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들로부터 도움 받기를 원하는 갤러리들이 적지 않기에, 커다란 미술관이 아니면서도 공공성을 지켜내려는 대안공간 눈은 작으면서도 큰 마당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졸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예술은 그냥 시작이 아니라 끝없는 시작이다. 자신의 자리를 끝없는 시작의 자리로 만들 자신이 없는 이는 빨리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좋다. 예술에서는 진도나 진보의 개념이 통용되지 않는다. 


예술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소모전이라는 말이 아니라, 끝없는 차이와 반복 속에서 필연적인 것만을 회귀시키며 조금씩 자리를 변동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업이란 학업을 포함하여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뭉뚱그려지는 장이다. 그 중 학업은 극히 일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내가 미술대학을 다녔다는 것, 그래서 나의 전공은 미술일 것이라는 최소한의 사실만을 확인시켜 준다. 물론 서열화 된 대학 출신별로 기득권이 챙겨지는 구조가 사라졌다고 할 수 없지만, 해방이후 누적 졸업생 수가 계속 늘어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작품에 무게중심을 주는 경향도 자리 잡았다. 경쟁이 심해지면 기존에 통용되던 부차적 ‘스펙’도 무화되고 다시금 본질로의 회귀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학창시절이라는 짧은 몇 년을 구가했던 미대생, 즉 미래의 작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규정했던 소우주의 울타리는 졸업을 계기로 한없이 작아지고 멀어지면서 세상이라는 대우주 속으로 티끌처럼 퍼져 나간다.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기에는 낡은 울타리를 대신하여 무한히 확장되는 엔트로피에 맞서게 하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이 응축된 작품이다. 발표된 작품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준다. 작업의 산물과 그 생산자를 일치시키는 경우는 부모 자식의 관계를 빼고선 예술이 거의 유일하다. 대개의 일들은 남 일하듯이 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으로 족하다. 지배적 시스템은 개인과 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다. 필요에 따라 쉽게쉽게 교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이러한 대세에 거스르려는 몇 안되는 지점이다. 작품/작업은 자식 또는 분신과도 같은 위상을 지니기에, 갖은 어려움에도 그것을 지켜나가려고 한다. 보통 ‘00의 방’으로 제목 지어지는 전시를 보면 많은 작가들이 참여한 경우이다. 5개 대학의 졸업생 중 선정된 작가들이다 보니 하나의 주제가 있을 수 없고, 각각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묶음이라는 장치가 필요한데, 방은 그 적절한 비유가 된다. 


전시 장소는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방들의 연속처럼 체험된다. 대안공간 눈이 있는 한옥과 예술공간 봄이 있는 낡은 건물이 좁은 길로 이어져 있으며, 인접된 작은 방들이 각각의 풍경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각 방 속에는 평면이나 입체의 형태로 여러 작품들이 배치되어, 방속에 또 다른 방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13개의 방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공간적 구조와 배치가 아니라, 끝없이 덧붙여지는 미로 같은 공간이며, 마당이 있는 작은 한옥으로부터 점차 공간을 늘려온 대안공간 눈의 궤적을 보는 듯하다. 나무처럼 한 방향을 향해 쭉 자라났다기 보다는 뿌리줄기처럼 그때그때의 상황에 반응하면서 전방위로 나아가는 구조는 예술에게 큰 자리를 내주지 않는 사회에서의 적절한 생존방식이며, 개인의 작업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방향은 예측할 수 없으나 나무보다 더 강인하고 더 지속가능성이 있는 뿌리줄기의 방식은 시공간, 몸과 무의식을 포함한 정체성, 작품 등이 짜여지는 방식에도 널리 퍼져 있다. 


이다영, 두 사람의 시간, 장지에 채색, 130.2x162.2, 2014



남경아, 마음, Mixed Media on table,58 × 43 cm,2014


개별 작품의 면모를 보면, 23세부터 29세에 걸치는 청년작가들이라서 그런지, 그 나이대가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들이 많이 발견된다. 먼저 잘 차려진 상차림 같은 방들이 있다. 유명 맛집에 시간 아까운줄 모르고 길게 줄지어 선 젊은이들을 보면 그들이 굉장한 미식가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전시대 보다 아름다움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세태와 무관치 않다. 가령 너도나도 하는 다이어트는 가장 맛있는 것만을 먹을 시간을 남겨두었고, (안)먹는 것에 대한 관심을 드높였을 것이다. 이다영의 방 [너와 함께하는..]는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찻잔과 다과에서 활짝 피어난 꽃으로 표현했다. ‘이야기꽃이 피어난다’는 일상적 표현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핀 꽃의 짧은 지속시간처럼 빨리 지나가고 만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쓴 시간들이 잠시의 화려함 뒤로 사라지는 것은 전시를 하는 작가의 상황과도 같다. 


남경아의 방 [마음]에는 실제 밥상과 그릇을 오브제로 이용하고 그 위에 음식과 숟가락을 그려 넣은 작품을 걸었다. 작가는 그렇게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에서 작품이 만들어져 소통되는 과정에 대한 비유를 본다. 거기에는 차려놓은 것을 먹기만 하다가 차리는 입장으로 변화한 상황, 그리고 밥 상 차리기도 힘든데 차려놔도 못 먹는 이들이 더 많다는 서글픈 사실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 밥상을 차리듯이, 밥을 먹듯이 작업 하다보면 작업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김지영의 방 [Hot!]은 작은 수퍼마켓을 연출해 놓았다. 매대 위에 올려 진 도자 작품은 자취생활을 하면서 즐겨 먹던 라면, 콜라, 통조림, 생수 등을 옮겨 놓은 것이다. 실제와 동일한 크기와 형태이지만 색이 빠져 있고 좀 더 묵직한 재료인 흙이라는 차이가 있다. 작가는 마켓에 진열된 상품의 방식과 전시장의 작품을 중첩시켰다. 그것은 상품과 작품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대를 반영한다. 작품도 상품의 반열에 올라야 작가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고, 상품 또한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위해 끝없는 혁신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김지영, supermarket 백자슬립, 320×280cm ,2014


정혜정, 골뱅이 대잔치, mixed media, 145.5×112.1cm, 2014

그다음은 관계에 대한 사유이다. 타인과의 관계 뿐 아니라, 무의식 같이 자신 속의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다. 정혜정의 방 [me지의 세계]는 액자와 액자 사이의 공간에도 거미줄처럼 증식하고 있는 선들이 있다. 나는 하나의 경계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그물망으로 얽혀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들을 명확한 형태를 잃고 흘러내리고 엉켜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자신으로 간주한다. 안과 밖의 경계는 끝없는 표면의 출렁임으로 변해 있는 어지러운 공간은 가장 익숙한 내가 가장 낯설 수도 있다는 메시지이다. 윈도 갤러리에 꾸며진 하세희의 방 [fragile-she]는 섬세한 레이스와 도자라는 두 가지 민감한 형식을 결합하여 관계망 속에 깨지기 쉬운 정체성을 표현한다. 특히 그녀가 전공한 도자는 흙과 불로 만들어지며 여러 변수에 노출되는 형식으로, 매 단계마다 여러 힘에 반응하여 변형되곤 한다. 작가는 이러한 도자의 특성을 민감의 정점에 올라있다고 볼 수 있는 ‘사랑에 빠진 여자’와 비유한다.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대표적 편의점에 내걸린 모토가 ‘beauty & health’인 것을 발견하고, 마치 시대의 키워드를 읽은 양 인상 깊었던 적이 있다. 인간관계의 전면에 내세워진 아름다움, 오직 아름답고자하는 그 줄기찬 의지는 엄청난 시장을 낳았을 뿐, 미술에 있는 그 미(美)와는 상관이 없다는 자각이 곧 이어졌지만 말이다. 길민아의 방 [美]는 삼백토로 빚어구운 비너스 상과 그 주변에 흩어진 여러 개의 가면을 보여준다. 비너스도 복제상이며 가면도 같은 형태들이지만 양자는 대조 항으로 설정된다. 하나는 진정한 미, 다른 것들은 허상으로. 그러나 가면 뒤에는 진정한 얼굴이 있는 것일까. 지금의 미의식에 의해 자연적 얼굴이 구조 조정되듯이, 비너스 역시 당시의 미의식이 조합된 산물은 아니었을까. 길민아의 작품에서 조상과 가면이라는 고풍스러운 소재는 시뮬라크르가 고대로부터의 전통임을 확인시킨다. 


하세희, fragile-she, ceramic, 2014


길민아,美, 도자기(삼백토), 60×30, 2014


임소현, On Off, video, motion sensor, LED, shower curtain, variable size, 2014


임소현의 방 [On Off]도 미끄러질 듯 잡을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샤워커튼에 비춰진 동영상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가장 사적인 행위인 샤워장면을 노출한다. 그림자이긴 하지만 목욕 물소리와 함께하는 젊은 여인의 나신은 유혹적이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불이 확 켜지면서 목욕하는 실루엣이 흐려지는 상호작용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갈구하면서도 고립되기를 원치 않는, 두 가지 엇갈리는 욕망의 공존을 말한다. 예술자체가 보여주기와 감추기의 복마전이 일어나는 장이다. 크고 작은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김보배의 방 [정체성]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관계망을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시킨 듯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정체성은 하나의 실체나 본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킨 네트워크임을 알려준다. 점과 점을 잇는 선들은 나 자신을 이루는 타자의 그물망이다. 또한 증식하는 선을 따라 흘러가는(또는 풀려가는) 시간의 흐름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보배, Who am we, acrylic on canvas, 162.2×130.3cm, 2014



최윤경, 툭! FRP, 아크릴채색, 140×130×160cm, 2014



최소현, 상승 leather, canvas, 1120x1250x1450, 2014


최윤경, 최소현, 송유경에게 일상성은 현대성의 이면으로 잔잔하게 또는 화려하게 나타난다.  최윤경의 방 [LOVE IT!]은 그녀가 좋아하는 반짝거리고 컬러풀한 것들로 채워진다. 마당에 거꾸로 꽂힌 거대한 아이스크림, 자연광과 인공광 모두에 반응하면서 영롱하게 빛나는 자개 토르소, 인디언 깃털 장식을 단 여인상 간에 어떤 인과 관계는 없다. 다만 그것들은 작가가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 모아놓은 것인데, 현대의 일상적 환경이 된 스펙터클이 분리된 것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최소현의 방 [철렁]은 롤러코스터를 탈 때와 같은 아찔한 경험을 잘게 자른 가죽을 꼴라주하여 표현한다. 공중에 밧줄로 매달린 인체는 에너지의 발산을 위해 차곡차곡 쌓아지는 긴장감을 압축한다. 긴장이 클수록 풀려나올 에너지는 클 것이다. 그 역학관계 속에서 두려움과 쾌락이 연결된다. 짜릿한 놀이기구, 공포영화, 가학피학적인 관계에서 그러한 에너지의 변환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자기 작품 또한 그렇게 향유되기를 바란다.


송유경의 방 [그림자]는 일상을 탈피하는 주요 경험인 여행이 깔려 있다. 이국적인 벽들 위에 떨어진 나무 그림자가 그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송유경의 그림은 자신의 경험을 보여주는 창을 넘어서 회화의 본질적인 차원을 고민하는 지점이 있다. 특히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그림자가 그렇다. 그림자는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기록된 이래, 창이나 거울만큼이나 회화의 기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림자 진 부분은 질감이 강조된다. 원래 벽면의 질감이든, 붓의 질감이든, 이러한 질감은 매체의 불투명성을 높이면서 그린다는 행위에 집중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해체와 통합이라는 비전을 보여주는 두 작가 이해민과 노정후가 있다. 이해민의 방 [열시美 살자]는 계몽주의적 제목과는 달리 파괴적이다. 공들여 그린 그림을 지우고 분해하여 다시 설치한 어둑한 방은 작가가 말하는 ‘열심히’가 단순한 성실함보다는 예술 본연의 열심, 즉 작가로서 자기 언어를 쟁취하기 위한 고단한 여정으로서의 부단한 파괴와 재구성의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부정과 해체의 방식은 작가노트에 써있는 대로 ‘바로가기 위해 돌아가기’일 것이다. 


송유경, 그림자, 장지에 혼합재료, 장지에 수묵,162.2 x 130.3, 2014



이해민, ALIVE, MIXED MEDIA, 170x100x180, 2014



노정후, Close to 1, acrylic on canvas, 116.8 ×91.0cm, 2014


노정후의 방 [close to]는 어떤 시대에는 시대정신의 정점에 있었지만, 어떤 시대에는 무의식으로 억압받고 있는 종교적 감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신은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언뜻 멋진 자연풍경으로 보이는데 그 안에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얼굴이 새겨있는 이중적 화면이다. 아크릴로 그린 풍경 안에 겹쳐지는 또 다른 형상은 모델링 컴파운드(modeling compound)를 이용한 판화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바다와 구름 등이 그려진 자연은 단지 아름다움을 넘어선 범접할 수 없는 자연, 즉 숭고한 자연이다. 그의 작품에서 숭고한 자연과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는 신은 중첩된다. 전시 주최 측은 13명의 작가를 작품만 보고 뽑았을 테지만—그래서 미술대학의 여초 현상을 반영하는 청일점 작가가 가능했을 것이다--차가운 일상에서 뜨거운 종교의 세계까지 포괄하고 있는 다차원적 우주가 연출됨은 서로 다른 것들이 뿌리줄기적인 방식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출전; 대안공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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