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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욱 / 기본을 보여주다

이선영

기본을 보여주다

 

이선영(미술평론가)

 

홍정욱은 기본을 중시한다. 기본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함축하는 바가 크다. 세계사에 유례없이 서로가 관계망을 이루고 살게 된 현대에, 기본이 없다함은 큰 허물에 해당한다.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는 대사건은 대개 기본의 부재로부터 비롯된다. 기본이 되는 것들은 점점 더 비가시적인 것이 되어서 통찰력을 통해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되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재하기에 잘 인지되지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기본(basic)’으로 작가는 ‘인간관계에 기본이 되는 가족, 생명체가 숨 쉬고 살기위해 필요한 공기, 지면에 붙어 생존하게 해주는 중력’의 예를 든다. 0이나 십진법 같은 것도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그것이 없다면 가장 기본적인 산술조차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이자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기본은 무엇보다 사회적 차원에서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기본이란, 기본이 없어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새삼 요구되는 진리일 법하다. 

 


in situ_convex lens, green laser, plastic ball, spring,wood_installation_2013

 

in situ(부분), 2013년 김종영미술관에서의 전시전경

 

우리사회는 물질과 외형에 대한 쏠림현상이 강하면서도, 그렇게도 사회의 구성원들이 떠받드는 것의 배분은 평등하지 않기에, 물질적으로 성취된 ‘진보’에 비해 행복지수가 매우 낮은 편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세월호 사건이나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10년째 1위라는 지표--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언론자유 순위 68위, 국제인권 순위 91위, 여성 불평등지수는 100위권 밖 등의 통계도 찾아진다--를 보면,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국사회의 기본이 삐그덕 거리는 상황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면 홍정욱이 하고 있는 미술은 우리 사회가 갖춰야할 기본에 속해있는가. 외형적으로 보면 그렇다. 수많은 미술대학, 미술관, 미술잡지, 작가에 대한 각종 지원제도, 비엔날레같은 큰 전시 등이 번듯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외형과 내용간의 괴리는 심각하다. 가령 100억 짜리 미술관은 쉽게 지어도, 그 미술관을 제대로 돌리는데 필요한 또 다른 100억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실제로는 작동하고 있지 않은 파르테논 신전 풍의 공간은 얼마나 많은가. 실제로는 활용되지 않는 ‘스펙’들은 얼마나 많은가. 

 

홍정욱의 문제의식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은 다소간 추상적이다. 눈에는 명확히 보이지 않는 기본을 상징하기 위해, 원자처럼 가장 작은 단위로의 감축이나 환원이 일어난다. 그의 작품들은 그림의 기본이 되는 캔버스나 3차원 구조물의 기본이 되는 기하학적 도형들이 많이 등장한다. 세상을 이루는 기본처럼, 조형을 이루는 기본을 추리해보고 기본들이 조합되고 확장되면서 상징적 구조체를 만든다. 기본이란 플라톤의 이데아같은 이상일지 모르지만, 이상에 근접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현실적일 수 있다. 어떤 부류에게 이데아는 현실만큼이나 현실적이어서, 기발한 발명품이나 예술작품을 비롯하여 우리 현실을 이루는 상당수의 것들이 이데아에 근접하려는 초인적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0을 추구해야 1-2라도 제대로 실현 될까 말까한 것이 현실이다. 홍정욱의 작품에는 시각의 기본이 되는 도형들인 삼각형, 사각형, 원 등이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가시적이지만 잡히거나 만질 수 없는 별을 꿈꾸며 사는 인간의 본성’을 상징하는 이상형(ideal type)이다. 

 


across the universe_cloth, formex, magnet, wire and wood-ball on transformational canvas_2013

 

기본요소들은 외따로 존재하지 않고 긴밀한 상호관계를 이룬다. 그의 작품에서 기하학이 감성으로, 시각적 논리학이 윤리로, 공간이 시간으로 뫼비우스 띠처럼 전환되는 경우는 흔하다. 작품의 기하학적 모양새 자체가 ‘선의 연속으로 면을 읽고 면의 연속으로 공간을 구성’ 한다. 동일성 속에 차이가 있듯이, 이러한 연속성에는 불연속성 또한 포함되어 있다. 작년에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in situ’전의 작품들은 기본에 대한 홍정욱의 미학이 구체화되어 있다. 작품 [in situ](2013)는 삼각형과 사각형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입방체가 매달려 있고, 틈을 통해 내부의 빛이 새어나와 별모양의 그림자가 어두운 전시장에 비춰 주는 작품으로, 우주 같은 공간 속 또 다른 무한반사의 공간이 특징이다. 기본단위들의 조합이 덩어리를 넘어서 공간으로 확장된다. 캔버스 안쪽에 준 요철이 표면의 굴곡을 만들고, 다른 벽면과 연결망을 이루는 작품 [across the universe](2013)는 회화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캔버스를 변형시켜서 캔버스라는 환영의 공간과 3차원 현실의 연결망을 구축한다. 

 

작품 [-gon](2012)은 오각형(pentagon), 육각형(hexagon) 등, ‘각형’이라는 단어의 접미어에서 제목이 따왔다. 기하학의 기본이 되는 도형들로 조합된 입체를 매달고 바닥에 놓아 서로의 관계망을 구축한다. 공중에 매달린 화이트는 바깥으로 선을 뻗고, 거울 위에 놓인 블랙은 안쪽으로 선을 뻗는다. 시각적인 대립 항을 이루는 두 입체는 하나를 건드리면 하나가 흔들리는 관계를 이룬다. 기본에 대한 관심은 전시 제목 및 작품제목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접두어나 접미어에 대한 취향을 낳았다. 2011년 가인화랑에서의 전시 ‘co-’전이 그러하다. 이 전시에서는 캔버스라는 기본 형태를 변주한 요소들이 연결망을 이루는 작품과 모서리에 한쪽 각이 걸친 검은 삼각형이 시차에 의해 달라지는 형태 등을 선보였다. 이 전시의 작품 [common](2008)은 기본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입체인데, 유기체적이고 건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제목처럼 일상적인 것을 예시한다. 

 


common_formex, magnet, silicon, wire and wood_65x130x65cm_2008

 

접착제 없이 연결된 이 구조는 보기보다 견고하다. 홍정욱의 작품은 기본구조와 그 조합을 다루기에,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작품마다 모눈종이 위에 꼼꼼하게 그려진 설계도가 있고, 어떤 작품에는 수십 장의 설계도가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컴퓨터를 활용하지 않으며 수공을 고집하고, 최종작품에도 기계장치가 사용되지 않는다. 부가적 요소는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손수 하는 제작과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우연적, 감성적 요소들을 작업에 포함시킨다. 홍정욱의 초기 작업은 2006년 노암갤러리에서 열린 ‘axis’ 전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캔버스 테두리와 표면에 다양한 요철을 주어 표면을 땡기는 작품들이 대거 선보였다. 작품 [axis](2005-2006)는 캔버스 표면 위에 뭔가 그리지 않아도 그 다양한 형태와 관계들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캔버스 표면에 생겨난 긴장감 있는 굴곡은 배후에 있을 잠재력에 주목하게 한다. 

 

마누엘 데란다는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현실성과 잠재성을 가르는 날카로운 선은 없다고 본다. 홍정욱의 작품에서 캔버스 표면이 현실성이라면 캔버스 전체는 잠재성이다. 사회적 현상들이 현실성이라면 심층적인 구조와 생성은 잠재성이다. 잠재성과 현실성은 역동적인 관계를 이루며, 잠재성은 현실화된다. 땡겨진 캔버스는 다양한 굴곡 면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잠재적인 연속체를 이룬다. 들뢰즈는 잠재적 존재들을 미분적 관계들로서, 즉 변화들 또는 차이들 사이의 관계들로서 정의한다. 이러한 잠재적인 연속체는 혼효면(plan of consistency)이라고 지칭된다. 홍정욱의 변형 캔버스는 이질성들이 종합 연속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들뢰즈적 용어로 다시 표현한다면, 현실적 과정들에서 잠재적 사건들을 추출함으로서 그것들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혼효면에서 펼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다양한 가능성들의 공간이 생겨난다. 

 


axis, 노암갤러리 전시전경, 2006년.

 

물론 이러한 현실성/잠재성의 역학관계는 본질과 유형으로 모든 사태를 정의하는 이상적(이데아적) 형식과는 차이가 있다. 구조들의 군집이 만드는 율동감은 작가의 관심이 공간적 구조를 넘어서 관계와 운동, 즉 시간성에 뻗어있음을 알려준다. 홍정욱의 작품을 이루는 기본요소들은 기하학적이지만, 숫자나 공식이라는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오반 로버츠는 기하학자 콕세터의 전기인 [무한 공간의 왕]에서 기하학에 대한 정의--‘기하학이란 이 사안에 대하여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과 직관적 느낌, 그리고 전통을 따라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수학의 일부’(오스월드 베블런)이다--를 인용한 바 있듯이. 기하학은 성향, 직관, 전통, 관례 등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기하학은 예술만큼이나 철학과 종교에도 걸쳐있다. 홍정욱이 작품의 요소로 사용하며 ‘기본’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하는 도형들은 과학, 철학, 종교, 예술의 공통적 기원의 하나가 되었던 플라톤의 이데아와 연관된다. 

 

[무한공간의 왕]에 의하면 플라톤은 이데아적인 기하학 형상들—원, 구, 정사각형, 정육면체—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물리적 세계와는 독립적인 그들이 속한 보다 높은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아적 개념은 수학처럼 그 자체가 실재가 될 수 있다. 수학자들이 수학을 독자적인 실재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듯이, 예술가 역시 이데아의 세계를 현실 공간 속에 구현하려는 욕망을 가진다. 뭔가 꼼짝달싹 못하게 인간을 붙잡고 있는 듯한 덫이 느껴지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가치의 상대화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이 시대에는 진리와 그 영구적인 실재성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만도 큰 위안이 될 것이다. 홍정욱의 작품에는 이데아의 세계가 예시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엄밀함과 순수함에 대한 이상이 있다. 이러한 매력 때문에 플라톤의 세계는 오랫동안 영향력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근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 방법론을 제공해 왔다. 

 

 

axis, 2005-6년.


 가령 [우주 구조의 신비](1596)를 쓴 과학자 케플러는 다면체적 행성체계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다섯 개의 플라톤 입체의 비율이 당시 알려져 있던 여섯 개의 혹성의 경로를 지배한다는 학설과 관련된다. 기본 도형이라는 홍정욱의 아이디어는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고전적인 원소들을 다섯 개의 정다면체와 짝지은 것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그 아름다움이 탁월한 입체의 형태들이고, 그 아름다움은 등변등각(regular) 혹은 일률성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킨다’고 말한바 있다. 플라톤은 원소들이 특정한 공간적 구조들을 지닌다고 여겼다. 플라톤의 도형들은 4면체, 6면체, 8면체, 20면체로 간주되었다. 5개의 볼록 정다면체 중에서 4개가 각각 불, 흙, 바람, 물이라는 4 원소를 상징했다. 다섯 번째 입체는 우주 전체를 감싸는 모양이어야 했다. 12개의 오각형 면을 가진 12면체는 전체 우주의 모형이다. 세계를 이루는 기본 요소와 그에 상응하는 기하적 형태는 수학적이면서도 시각적이다. 그래서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형식주의는 수학적 요소만 강조하고 시각적 요소를 등한시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몰아내려고 한다. 그러한 흐름을 대변하는 부르바키 그룹은 단 한 장의 그림도 없는 대수적 수학사전을 집필하려고 했다. 시오반 로버츠에 의하면 도형에 대한 이러한 혐오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적 인식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눈에 의한 주관성과 오류에 희생당하기’(부르바키) 때문이다 시오반 로버츠는 부르바키 스타일이 대수적이고 공리적인, 무미건조한 형식주의적 경향의 전형이라고 비판한다. ‘순수한 논리적 추론에 근거하였고, 인간의 나약함을 용인하는 시각적 통찰은 가능한 한 배제하는’(부르바키) 형식주의의 흐름은 그림에 의한 기하학을 절대적인 연역의 힘을 통하여 수학적, 대수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남은 것은 숫자와 방정식뿐이었다. 이러한 공리적이고 대수적인 방식 속에서 직관적 방식은 배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기하학을 선택하는지는 ‘단순히 편의의 문제이고 규약의 문제’(푸앵카레)이다. 

 

 

co- exhibitions view_2011년 가인화랑에서의 전시전경.  
 

막스 야머는 [공간개념]에서 자연법칙들을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게 해주는 기하학 체계를 선택함에 있어서, 순수 공리적 기하학의 체계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다. 필요한 것은 추상적 체계의 기하학적 개념들과 물리적 대상들이나 물리적 과정들 사이를 서로 연결하는 일이다. 기하학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이다. 괴델의 전기를 쓴 레베카 골드스타인도 [불완전성]에서 ‘수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자체적으로 완전한 계를 추구해야 한다’(프레게)고 주장하는 흐름, 즉 공리계의 구축을 통해 수학적 확실성을 보장받으려는 경향을 비판한다. 형식체계(formal system)란 직관에 대한 호소를 완전히 제거한 공리계이다. 그러나 괴델은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이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확실성은 불확실성에, 유한은 무한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무한에 대한 직관을 거부하는 과학은 삶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고, 그 규약적 언어를 공유하는 소수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되어갔다. 

 

서사에 강한 과학자, 수식에 강한 예술가라는 독특한 인물들이 없다면, 기하학에서 인간적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매개 고리는 희미해진다. 그 과정은 현대 예술이 밟아온 과정과 매우 비슷해서 흥미롭다. 기본을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는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아버렸다. 현대의 작가 홍정욱이 들추어내려는 것은 이렇게 숨겨지고 억압된 전통이다. 가령 그는 2011년 가인화랑에서의 전시에서, 부르바키라면 타도하자고 외쳤을 삼각형을 전시장 메인 공간에 강력하게 그려놓았다. 그것은 오류를 범하기 쉬운 물리적인 두 눈을 전제하면서도, 오류를 보정할 수 있는 물리적 맥락 또한 제시한다. 2013년 김종영 미술관에서의 전시 작품에 사용된 거울반사 역시 고전 기하학적인 방식을 최대한 활용한다. 이 전시에서 거울반사를 통해 만들어진 다차원 모양들은 초다면체(polytope)이다. 시오반 로버츠에 의하면 초다면체는 ‘많은 모양’이란 뜻으로, 2차원 초다면체는 다각형(polygon)이다. 2012년에 gym project에서 열린 ‘-gon’ 전의 작품들은 ‘많은 각들’이라는 의미로, gon은 무릎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었다. 

 

-gon, 2012년 김프로젝트에서의 전시전경

 

3차원 초다면체(polyhedra)에서, 폴리헤드라란 ‘많은 면들’이라는 의미로, 앉을 수 있는 많은 자리 혹은 면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가장 유명한 다면체는 4, 6, 8, 12, 20면체를 어우르는 플라톤의 입체(Platonic Solids)이다. 이 전시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된 거울은 초다면체의 대칭적 성질을 활용한다. 초다면체의 기하학적 대칭의 상당수가 거울면 대칭 같은 반사에 의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련의 만화경은 반복되는 일련의 반사를 일으키며, 거울들이 만나는 각도에 따라 반사된 상이 무한히 증가되어 무한한 패턴을 만들어 낸다. 아날로그 스타일의 기하학자 콕세터는 ‘플라톤입체의 대칭을 만화경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차원의 유추과정은 단면과 투영이라는 두 방법 중하나로 이루어진다. 홍정욱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과정과 조형적 실험이 겹쳐진다. 자신을 과학자보다는 연금술사와 비교하는 홍정욱은 손수 재고 그리고 접고 자르고 풀칠하고 색칠하고 설치하는 시각적이고 직관적이며 실천적인 접근법을 택함으로서, 점차 형식주의화 되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기본을 구체화하려한다.

 

출전; OCI 미술관 창작 스튜디오 작가연구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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