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경계 위의 게임
올해의 작가상 2014 전 (8. 5--11. 9, 국립현대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올해의 작가상 2014’에 초대된 작가들은 1970년대 초 중반 태생으로, 이번 전시는 그들이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력의 중간 평가 쯤 되는 맥락을 가진다. 이 공적인 기회를 통해서 그들은 이제까지 해왔던 작품보다 앞으로 해야 할 작업이 더 많은 작가라는 기대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전 작업을 바탕으로 하긴 하지만, 새로이 시도되는 작품이 많은 것은 그들이 기왕의 익숙함에 안주하기보다는 매번 낯선 길을 택해왔던 진짜 작가임을 알려준다. 동시에 이러한 성과는 작가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구체적 결실을 맺은 것이라 믿는다. 작품은 하나가 투입되면 단지 하나만 나오는 것이 아니며, 작가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파생효과를 낳을 수 있다. 전시로 의미 있는 결과를 맺을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지원이 병행되는 이런 범례가 더욱 활성화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예술에 대한 사랑 그 하나 때문에, 작가 또는 인간으로서의 삶이 갈수록 곤혹스러워지는 사태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미술계는 확보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활용한 미디어는 겹치는 부분이 많았지만, 작품이라는 결과물은 뚜렷하게 4인 4색이다.
구동희, 재생길, 2014년.
칸막이 처진 인접한 공간을 채우는 여러 개의 세계는 그자체로 매혹적이며, 예술은 현실에서 찾기 힘든 이질적인 체험을 가능케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어떤 공통점을 찾는다면, 상징적 점과 점 사이를 잇는 단축 거리로서의 선을 거부하는 태도와 몸짓이다. 각 작품들에는 말소 하에 놓여 진 선(線)이 발견된다. 선은 확실한 경계와 개념을 규정하고, 각 개인들을 끼워 맞추는 환원적 가치로 군림하며, 불확실한 삶을 확실한 기준으로 틀 지우는 억압적 권력이다. 이러한 단선적 사고방식이 생산적이라면 그 생산성은 보편적이지 않다. 효율성, 합리성, 생산성 등으로 불리 우는, 현실을 지배하는 단선적 사고방식은 궁극적으로 소수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가는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생산적인 것이다. 작가는 본능적으로 이러한 단선적 사고방식에 거부감을 보인다. 예술자체가 모두를 하나의 방향으로 몰고 가는 단선적 사고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일시적 합의에 불과하지만, 공리적으로 작동하는 법칙 화 된 규칙을 상대화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선은 신비롭게 또는 과격하게 사라진다. 건축적인 규모로 막다른, 또는 불가능한 길을 연출하는 구동희의 작품은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노란 벽돌 길을 따라 여행하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사건들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다. 김신일은 가장 확실한 의사소동의 매체인 문자를 확장, 해체한다. 여기에서 문자는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지시하는 본래의 역할을 잃고 환경 전체와 함께 작동하는 물질 또는 에너지로 변모한다. 노순택의 다양한 사진들은 그 기원에 분단선이 존재한다.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이 놓여있으며, 그것은 지배자와 저항자들 사이의 전선을 긋는다. 그의 사진은 분단선이 만들어내는 전선 안팎에서 벌어진 사건의 산 증거이다. 장지아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그어진 금기, 그 경계를 넘나드는 불온한 상상력이 있다. 몸은 개인과 사회에게 가장 기본적인 질서 감각을 부여하는 가장 구체적인 경계이다. 초창기 작업부터 자주 등장하는 체액은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이 시도된 작품은 이제 성과 속의 경계마저도 도전한다.
김신일, 마음 믿음 이념, 2014년.
네 작가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구조적 장치이다. 미술이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형식을 통해서이다. 형식이 물화되어 형식주의로 귀결된다 해도, 그자체로 의미가 있을 만큼 미술에서 형식의 위상은 크다.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이 보여주는 것, 단지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주 객체에게 상호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점에서 이 전시의 작가들은 소위 말하는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당면한 문제 해결방식이 집요하고, 이로써 최초의 메시지는 증폭되며 관객에게 강하게 전달된다. 여기에서 전달이라 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가 발신했다고 가정되는 온전한 메시지를 온전히 읽어내라는 불가능한 주문이 아니다. 예술은 결론이 아닌, 최초의 강력한 자극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유혹의 장치는 자발적으로 이어질 추후의 해석들을 이끌어낸다. 관념에서 관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업과정에서 관념이 나온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적 장치들은 작가 내부에 있다고 가정되는 의미를 단지 밖으로 끌어내는 수단 즉 표현이나 재현을 넘어서, 미지의 것으로 재구성 또는 생성된다.
구동희의 작품 [재생길]은 건축적 스케일의 작업으로, 작품 안팎으로 복잡한 잠재적 동선을 깔아 놓는다. 납작한 육면체로 이루어진 전시공간을 최대한 이동할 수 있게 고안된 장치는 36개의 모듈이 270도 회전하는 뫼비우스의 띠 형태의 구조이다. 전시장 가득한 작품 규모는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이상적인 조망지점과 시점을 감춘다. 길을 따라가며 체험하는 시시각각의 풍경이 지각과 기억을 동시에 촉발한다. 예측하기 힘든 굴곡 면을 이동하는 관객은 불현 듯 현재에 침투하는 과거, 과거를 불러오는 현재라는 불투명한 시공간에 놓이게 된다. 김신일의 작품에서 심장 박동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거울,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 수 있는 틀, 글자의 안과 밖을 동시에 주목하게 하는 형태들은 한 공간에서 낮과 밤을, 이성과 감성을, 시각과 청각을, 견고함과 유연함을, 도시와 자연을, 시와 산문을 교차, 중첩시킨다. 문자에 대한 공간적 상상력은 문자로 대변될 수 있는 관념적 체계를 해체한다. 기념비적 스케일로 확대된 문자 내부에는 미로 같은 또 다른 길들이 뻗어있으며, 마치 연골조직이나 나뭇가지처럼 자라나는 듯하다.
노순택,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2013년.
노순택은 우리 사회의 갈등 현장을 누벼왔지만, 카메라를 세상을 보는 투명한 창으로 한정짓지 않음을 반증하는 작품 또한 포함된다. 합법을 앞세운 국가의 폭력과 그에 대항하는 또 다른 힘인 정의가 맞부딪히는 역사적 현장에 작가는 있었지만, 이러한 폭로만으로 충분치 않음을 안다. 어떠한 강력한 증거를 들이대도, 무심히 소비하는 현대적 소통구조가 더 문제이다. 그는 사진 아래에 깨알만한 글자로 사진으로 현장에서 포획한 장면을 보충한다. 현실의 단면이지만 진실까지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사진을 시각적으로만 소비하지 말고 천천히 읽어보라고 권한다. 개막 퍼포먼스와 함께 선보인 장지아의 작품은 노동의 기구이자 고문의 도구였던 바퀴에 올라 탄 12명의 여성들을 보여준다. 여성들이 부르는 노동요과 성가가 조합된 기묘한 음률은 성적 희열이라는 의외의 방향을 향한다. 육체를 교란하는 가학피학적인 도구들을 종종 등장시켜온 작가는 다양한 매체로 사랑과 고통의 관계를 탐색해왔는데, 그 역설적 관계는 이번작품에서 모순되는 범주가 바퀴처럼 돌고 도는 신비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각 구조들은 구조를 위한 구조가 아니라, 작동하는 구조, 즉 몸과 밀접하다. 그들의 작품에는 단순히 앞에 놓인 대상을 넘어서, 작품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으며, 나올 때는 이전과 달라짐을 체감한다. 구동희의 [재생길]은 놀이기구, 클라인병, 삼반고리관 등으로부터 영감 받은 것으로,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총괄적으로 파악 가능한 이상적 위치가 없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불거리는 통로는 몸이 그러하듯 시간이라는 불안정한 축에 의존한다. 김신일의 전시 공간의 리듬을 주도하는 것은 심장 박동소리이다. 소리는 구조에 그냥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거울이나 틀을 변형시킨다. 구조에서 구조가 재현,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변형시키는 미지의 힘이 제시된다. 몸은 이성적 관념이 추후에 행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는](전시부제)있는 것이다. 마음처럼 유동하는 구조는 생명력으로 추동된다. 움직이는 빛이 가세하면서 문자라는 견고한 구조체도 흔들린다. 투명하거나 반짝이는 재질로 된 채워진 문자 내부는 환경 전체로 복잡하게 짜여 진 텍스트성을 확장한다.
장지아, 아름다운 도구들, 2014년.
노순택의 사진에는 몸의 자유와 자율이 억압되고 침해되었다는 근본적인 사태에 대한 고발이 있다. 매향리 미공군 폭격장, 평택 대추리, 용산, 쌍용 자동차 공장, 제주 강정마을, 밀양의 송전탑 등, 지난 10여 년 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건의 장소들은 몸과 몸이 맞부딪히는 갈등의 장이었고, 작가의 몸 또한 그 현장에 있었음을 말한다. 동시에 그가 보여주는 ‘잔인한 풍경’ 이면의 ‘무능한 풍경’은 몸 대신 눈과 손만 까딱거리는 스펙터클의 문화이다. 누군가로부터 끝없이 폭행당하는 초기 작업부터 숭고한 외관을 갖춘 대형 자위기계들이 에워싼 장지아의 작품 한가운데는 몸이 있다. 몸이라는 미묘한 경계는 그것이 침해되는 오염이나 위반의 경험을 야기한다. 오염과 위반은 삶의 극단인 죽음마저도 포괄한다. 경계를 나누는 금기의 위반은 그 시작과 귀결이 몸이기에 더욱 섬세하고 내밀하다. 그래서 반향도 크다. 그 반향이 상식적 인간의 무지와 오해이든 일탈 대한 무조건적 추종이든, 오늘날 예술작품이 물질도 정신도 아닌 것들(정보)로 둔감해진 몸과 감각을 가격하는 강력한 충격이어야 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출전; 아트 인 컬처 9월호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