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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 지속과 순간

이선영

지속과 순간

  

이선영(미술평론가)

  

한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미국에서 회화를 영국에서 조각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의  작가 이도가 해왔던 다양한 작품들에는 지속과 순간이라는 키워드가 발견된다. 작가가 요즘 읽고 있는 바슐라르의 [순간의 미학]이나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같은 책은 순간과 지속이라는 개념을 논구하는 고전으로, 철학 뿐 아니라 조형예술에도 영감을 준다. 지속과 순간은 몸과 시각, 시간과 공간, 기억과 지각, 생성과 구조, 주변(표면)과 중심, 유목과 정주, 타자와 주체, 사물과 예술 등의 범주들과 줄줄이 연결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같은 문화예술 사조의 차이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양 범주는 그 차이만큼이나 서로를 포함한다. 지속의 단면이나 순간들로 이루어진 지속 등, 지속에는 결정적 순간이 존재하며 찰라와 같은 순간에도 전후의 맥락이 있기 마련이다. 신화와 종교, 역사 등의 서사와 결별한 근대미술은 일순간 작품의 진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명료한 순간을 중시했다. 



이도, [무제](2012년)

그것은 미술사의 향방을 추상미술로 결정지었지만, 각 매체에서 가능한 효과를 최대한 중시하는 모더니즘 미학은 오히려 매체의 한계 내에 갇히는 역효과도 낳았다. 미술에서는 알레고리를 비롯한 서사가 억압되었고, 시각성이 물신적으로 경배되었다. 순수를 위한 진화는 역설적으로 예술과 상품의 차이를 소멸시켰다. 상품이야 말로 즉시적인 시각적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매체 외적인 특수한 효과의 실험을 통해 공간예술에서 시간적 연속성을 그려내고, 시간예술을 통해 공존적 환상을 전달하려는 노력을 지지하면서, 예술이란 그 매체의 시간성과 공간적 한계 내에서 측정 될 때 최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레싱의 견해를 반박한다. 예술가의 중대한 실험이나 개혁은 그들 각자의 매체에 고유하는 특질의 완전한 개발에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체의 특질을 초월하고 한정적인 매체의 엄격한 용량을 넘어서는 효과와 환상을 전달하려는 노력에 기인한다는 말이다. 


‘회화는 공존성을 특질로 하는 구도에 있어서, 행동의 단 한순간만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가능성이 풍부한 순간, 그 앞의 것과 뒤의 것이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순간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 레싱은 영속적이고 절대적인 불변의 현재에 대해 언급했지만, 회화나 조각에 의해 영구화되는 ‘가장 가능성이 풍부한 순간’에 관해서는 과거와 미래도 함축할 수밖에 없었다. 조각, 회화, 사진 같은 형식과 영상의 결합은 순간과 지속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며, 예술 뿐 아니라 현대의 일상 속에서도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된 가상현실에 대한 체험 역시 순간과 지속이라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각성의 순간이 없는 몰입이나 몰입되지 않는 순간은 소외의 증후인 것이다. 예술은 그러한 소외, 즉 무의식속에서의 흐느적거림이나 진부한 현실 모두와 거리를 둔다. 건축 자재 등을 활용한 이도의 다소간 건조한 작품들은 순간과 지속 간의 상호작용을 위한 실험적 장치라고 할만하다. 이전의 선택을 배반하며 다양한 교육적 배경을 가진 작가에게 미술이 공간에 한정된 예술이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다. 


[무제](2011년)



[조망, 움직이는 풍경](2013년)


이도의 작품에서 지속과 순간이라는 키워드는 초창기 작품부터 추적될 수 있다. 은박지 돗자리로 만든 동네 지도에 기억나는 장소를 돌멩이로 표시하고 그 위에 깃털로 만든 신발을 설치한 작품 [무제](2009)는 작가가 머물렀던 각별한 장소들을 맘껏 이동한다는 상상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 작품에 포함된 이동과 머무름이라는 개념은 이후의 작업에도 자주 나타난다. 특히 프레임은 두 범주가 교차하는 장이다. 프레임은 시선 또는 몸이 통과하는 곳이면서 어떤 문턱—역치(threshold concentration)--을 예시한다. 귀국 후 처음 발표한 [조망, 움직이는 풍경](2013)은 안산 원곡동의 리트머스 커뮤니티 옥상에 설치한 작품으로, 이 프레임을 통해 경치를 보게 만들었다. 작가는 프레임을 채운 투명 필름에 주민들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여 그렇게 생겨난 층들이 뒤의 풍경과 만나 색다른 풍경으로 거듭나게 했다. 표면과 프레임 뒤의 풍경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프레임은 이러한 지속에서의 한 순간을 강조한다. 


그 작품은 2011년에 영국의 한 공원벤치 앞에 설치했던 창문 프레임과 같은 맥락에 있는데, 창 너머로 지속되는 현실은 프레임에 의해 일순간 재현된 장면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도의 작품에서 두 범주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창, 문, 방, 통로 같은 건축적 구조물과 거기에 더해진 영상들이다. 2012년에 제작된 작품 [무제]는 샤워 커튼을 벽 삼아 만들어진 미로 형식의 방인데, 관객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러 길을 선택하며 나아갈 수 있다. 벽에는 복도나 계단을 이동하거나 풍경 사진이 나오는 영상이 투사된다. 닫혀있는 공간은 시간매체인 영상에 힘입어 확장되지만, 영상 속 이동과 관객의 이동 속도와의 차이 또한 느껴진다. 이 작품은 앉아서 시각만으로 마주하는 인터페이스를 넘어서, 실제 움직임과 연동되는 가상현실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얼마 전에 개봉되었던 영화 [엔더스 게임]처럼, 가상현실은 인터페이스 이편에 몸을 남겨두고 눈만 이동하는 단계를 넘어서, 온몸과 직관을 활용하는 차원으로 확장될 것이다. 


[무제](2012년)


영화는 훨씬 스케일이 크고 그럴싸했지만, 결국 관객을 어두운 객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반면, 3차원 상에 구현된 이도의 작품은 서로 다른 차원간의 관계를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하게 한다. 최종 목적지를 계속 유예하는 미로라는 형식,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은 중심과 주변, 전체와 부분간의 유기적 관계에 기초한 명료한 시공간 질서 감각을 교란 한다. 이 작품에서 영상과 함께하는 미로적 구조는 현재의 순간을 명료하게 각성시키기 보다는, 모호한 지속의 느낌을 강조하며 즐거운 또는 불안한 방황을 야기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된 2014년의 작품에는 멀지 않은데 먼 것 같은 효과를 주는, 원근법이 과장되어 있는 구조물이 첨가 되어 있다. 최근 버전에서는 긴 복도 형 공간을 활용하여 시선이 여행할 수 있는 프레임들을 설치한다. 시선이 들어가는 구멍은 여럿이며, 관객의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각 체험이 가능하지만, 몸은 물리적으로 그 너머로 통과할 수 없다. 


프레임들과 영상은 시선을 유도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물리적 이동을 막는 방해물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이 이런저런 인터페이스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이동의 환상은 실제의 경험을 대리한다. 기술은 현실과 허구를 하나의 차원으로 통합하려는 방향성을 가진다. 지배적 기술이 추동하는 문화는 각 개인을 독특하게 했던 그만의 체험과 기억, 심지어는 얼굴과 몸마저도 같은 정보(코드, 상품)라는 결과물을 낳는다. 그러나 예술은 기술-문화와 달리, 양자의 차이를 말한다. 이도의 작품에서 통과할 수 있다는 기대감의 배반은 열수 없는 두 개의 문으로 된 [두개의 문](2014)에서도 발견된다. 움직임의 환영을 주는 연속 장면으로 이루어진 [책들의 이글루](2011)도 머무름(정지)과 떠남(이동)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글루같이 아늑한 은신처에서의 독서삼매경은 어디론가 떠남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공간 안에 붙은 멋진 풍경사진들이 그것을 예시한다. 동시에 책은 한 개인을 가둔다. 


[책들의 이글루](2011년)

그것은 독서를 하는 동안 움직일 수 없다는 1차적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원천으로부터 공급받아 형성된 세계관이 빠질 수 있는 폐쇄성을 말한다. 처음과 시작이 한 줄로 이어진 문자는 정연하긴 하지만, 단선적 논리에 물들기 쉽다. 그것은 상호적 주체의 대화가 아닌 독선적 주체의 독백을 야기하곤 한다. 현대미술 역시 개념화를 통해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증진되긴 하였지만, 그것은 제도화되어 가는 예술계에 맞춰진 전략적 코드로 전용, 또는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 나름의 논리적 선명도를 쟁취하기 위해 예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식이 지식인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예술이 예술가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경우만큼이나 흔히 발견된다. [책들의 이글루]는 독서에 의해 가능할 법한 지적 통달이 구멍이 숭숭 뚫려있으며,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질 듯한 엉성함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구축된 것들은 자족적인 우주가 아니라, 몸 하나 제대로 들어갈 입지도 못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마샬 맥루한이나 월터 옹같은 미디어 이론가들이 지적한 바 있듯, 문자성(literacy)에 기초한 지적 체계의 한계성이 있다. 월터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말한 2차적 구술성의 문화, 즉 문자성에 기초한 구술문화 역시 가상현실에 칩거하는 은둔자들을 양산하곤 한다. 두 개의 텐트를 붙여 공중에 붕 띄워놓은 2013년의 작품이나 침대 한가운데 구멍을 뚫고 침낭을 걸쳐놓은 2014년 작품은 완전한 사적영역도 공적영역도 아닌 어중간한 은신처들을 표현한다. 개인은 구체적 자리가 아니라, 추상적 공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공적 영역에서의 노동이 소외를 거듭해감에 따라 사적 영역에 대한 기대치가 커졌지만, 공/사 영역은 연동된다. 개인화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증대시키기 보다는 전체주의의 지배를 더욱 용이하게 한다. 각각의 영역에 개인을 배치하고 감시를 넘어서 스스로 조절하고 욕망하게 하면서 체계는 더욱 공고해지는 것이다. 사회와 공동체의 붕괴 한편에 유아론적 몽상이 만연하고, 이를 기업 이익의 추진력으로 삼는 자본의 그물망이 촘촘해진다. 


[책들의 이주](2010년)

각자 자기일로 바쁘지만 모두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험이나 취향 같은 미세한 사적 영역 또한 상징적 우주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채 공급, 소비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비슷해지면 비슷해질수록 우리 앞의 바다는 더욱 붉은 빛을 띄게 될 것이다. 책들이 구름 낀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작품 [책들의 이주](2010)는 바람에 펼쳐진 책장들이 마치 펄럭이는 날개 같은 운동감을 준다. 허공에 던져진 책의 순간 포착 사진이 포토샵으로 합성되어 날아가는 새의 운동 같은 지속성이 느껴진다. 책은 땅에 묶인 인간을 정신적으로 비상시키며 지식의 총아인 책들은 국경이라는 경계들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준다. 그러나 초월적이며 국경을 넘는 ‘보편적’ 지식들이 진보나 행복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가 알려주듯이, 그것은 더 많은 인류의 고통과 불행에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이도의 작품 속 지속과 순간이라는 키워드는, 작가란 존재가 살아있는 몸들에 둘러싸여 타자들의 소리를 듣고 공감하는 지속 속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포획하는 자여야 함을 알려준다. 

  

출전; 청주미술창작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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