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평론 일반〕
융합예술의 개념
김성호 (미술평론가)
(3편에 이어서)
6. 융합/통섭을 지향하는 예술의 고유 위상과 창발성(emergence)
문제는 예술의 입장에서 다른 영역들과 융합 혹은 통섭을 시도할 때 겪는 어려움이다. 통섭의 각 주체들이 대개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번거로움으로 예술과의 통섭을 거리끼거나 아예 예술장르끼리 시도하는 융합예술의 통섭 원리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통섭의 다른 주체들이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들이 다반사이다. 특히, 수학, 기술공학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예술은 대립되는 것으로부터 대립 자체의 통섭을 시도하길 즐겨한다. 전혀 닮아 있지 않음마저 선뜻 공유하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이론으로 이런 특징을 살핀다면, 예술은 태생적으로 ‘복잡계’를 지향한다.
상대성이론, 양자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3대 이론인 ‘복잡계(複雜系, complex systems)’ 이론은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구성성분 간의 다양하고 유기적 협동현상에서 비롯되는 복잡한 현상들의 집합체’ 이론으로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종래의 견해가 하나의 원인에 대응하는 하나의 결과라는 단순한 관계의 설정이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된다. 복잡계는 ‘소소한 미시적 사건이 주변에 다양한 작용으로 영향을 미치고 융합되어 점차 거시적 영향력을 갖게 되는 시스템’에 다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복잡계는 외형상으로 질서를 판별하기 어려운 혼돈과 무질서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복잡계의 실체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면에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균형을 이루고 보다 발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예술의 정체성과 닮아 있다.
조직 경영과 관련해 설명되고 있는 한 복잡계 모델
이러한 예술들이 모여 융합을 시도한다면? 통섭을 추구한다면? 예술이라는 유사영역이지만 예술의 언어가 각기 다른 미술, 음악, 영상이 만난다면? 그들이 모여 상호간 간섭 없이 각자의 예술언어들만 실천한다면?
그것은 뮤지컬이 아니다. 그것은 퍼포먼스아트도 아니다. 얼추 퍼포밍아츠의 범주에 들어설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닌 예술의 움직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통섭을 바라보는 이들은 예술통섭의 상호 주체들이 무슨 해결책에 이르려고 하는지 주목할 것이다. 통섭의 다수가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것들마저 상호의 목표를 융합시켜 또 다른 것의 생성과 해결책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통섭은 그다지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예술은 해결책을 내놓기보다는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을 넘나들며 질문만을 던지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금기의 영역마저 들어가 대책 없는 질문만을 던지는 속성 또한 없지 않다. 예술통섭에서 해결책에 관심 없는 예술이 서로 모여 여전히 해결책을 구하지 아니하니 다른 통섭의 주체들이 보기에는 답답할 것이다. 태생부터 복잡계인 예술인 또 다른 예술을 만나며 통섭을 시도하는 가운데서 그저 서로를 놔두기만 하니 어찌 답답하지 아니할까? 그래서 관자들은 예술통섭에서도 서로의 작용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통섭의 주체들이 등장하길 바란다. 그러나 예술통섭이란 ‘그저 섞어 놓아둠’이다. 그것은 융합예술 혹은 예술통섭이 애초 지향하는 바이다.
그런 차원에서 융합예술 혹은 예술통섭에 따른 주요한 논의는 창발성(emergence, 創發性)에 주어진다. 번역용어인 창발성은 국내에선 1990년도 전후부터 생태학과 인지과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사회학에 도입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emergent property)’을 의미하는 창발성은 개별 요소에서는 특성이 별반 없던 것이 집단을 이루면서 폭발적으로 어떠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을 주로 지칭한다.
예를 들면, 물의 예처럼 원자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성질이 분자의 단계로 융합되면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미나 꿀벌이 개체 수준에서 보이지 않던 역동성을 집단성으로 확장되면서 드러내는 현상도 이와 같은 창발성에 해당된다. 개미탑을 쌓거나 벽을 허물수도 있는 집단의 힘, 그것은 개체 단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구성요소(또는 하위계층)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전체 구조(또는 상위계층)에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이 창발성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분히 자발적이다. 통제나 조정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는데 우리의 논의가 있다. 생각해보자. 어떠한 사회조직의 역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조직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조정체계는 오히려 비효율성을 유발시키고 역효과에 이른다는 사례적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직의 구성요원들로부터 통제나 감시를 거두어냈을 때 그들로부터 자발적인 집단의 힘은 가시화된다. 창발성은 교육되거나 통제되기보다는 자생적인 집단의 힘이기 때문이다. 통제 없는 조직은 피상적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복잡계의 원리에 따르는 거시적이고도 자발적인 질서의 현상을 창출한다. 헐거운 듯 보이는 그들의 네트워크는 복잡계 이론처럼 창발성을 따라 어느덧 구성요소들 간의 순환이 활발히 작동하면서 통제 상태 없는 가운데서 집단적 현상을 극대화한다.
예술통섭의 주체들은 각 통섭의 주체(특정 예술이라는 구성요소) 자체도 예술의 특성상 복잡계 영역에 다름없어 자발적인데 이들이 통섭된 주체(융합예술의 전체구조)는 더더욱 자발적인 것이다. 창발성 자체가 융합예술 혹은 예술통섭에서는 더더욱 구현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창발성이라는 것이 구성요소에서 부재하던 현상이 전체구조 속에서 발현된다는 현상을 가늠할 때, 즉 특정 장르의 예술이라는 구성요소에서도 부재하던 현상이 융합예술/예술통섭이라는 전체구조 속에서 발현될 양상은 그렇게 가늠하기 쉽지 않다. 예술 자체의 자발성이 융합예술/예술통섭에서는 어떠한 힘으로 집단화되고 어떠한 창발성으로 폭발할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긍정적 불확실성이다. 구체적 양상에 대한 예측 불가능함에도 그것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그것은 긍정적 불확실성이다. 그런 차원에서 융합예술/예술통섭의 창발성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적 역동성과 늘 관계한다.
결론
융합예술과 관련한 우리의 논의에서, 장르별 예술의 융합, 예술과 비예술의 융합, 매체와 매체의 융합을 형식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검토하는 일52)은 필수적이지만, 여기서는 그 논의를 생략했다. 그보다 관건은, 융합예술의 동시대적 맥락(context)을 파악하는 일이다.
역사적 전개에 따른 예술의 확장과 융합에서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현대예술의 영역 확장과 탈경계의 시도를 통한 발전적 전개가 어떤 면에서는 원시시대의 토털아트(total art)의 지대로 회귀한 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대한 상기일 것이다. 즉 삶, 종교, 도덕, 정치, 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원시시대의 토털아트는 오늘날 모든 예술 장르와 매체 그리고 비예술적 요소가 서로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는 융합적 예술 -퓨전아트(fusion art), 컨버전스아트(convergence art)로 곧잘 표현되는 -의 지향점과 닮아있다. 특히 일상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하인리히 뵐플린의 양식사적 비평의 관점에서 언제나 예술은 ‘반복과 비가역성에 기반’한 채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양식의 이중근원’53)을 상기해볼 때, 오늘날의 컨버전스아트의 융합적 양상은 원시시대의 토털아트의 양상과는 명백히 다르다. 오늘날의 복잡다기한 예술의 장르별 영역확장, 예술과 비예술 간의 국소적 이종생성, 이종융합의 개념과 원시시대의 분화되지 않은 토탈아트의 차원은 분명 다르다.
모든 것이 뒤섞여 있던 원시시대의 토탈아트가 점차 일상과 차별화되는 예술의 유형으로 전개되면서 모더니즘 시대까지 지속되어 오다가 1960년대 일상과 다시 만나고, 컨템퍼러리 시대인 오늘날 어느덧 융합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놓기에 이르렀다. 최근,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려는 테크놀로지가 잰걸음으로 내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철학이 융합예술 사유의 단초를 마련하고 예술이 그것을 무한정 실험해오고 있었을 때도 가만있던 테크놀로지가 최근 생색을 내고 있는 중이다. 과학 혹은 기술이란 이름으로 테크놀로지는 최근 컨실리언스와 컨버전스를 선언하면서 문화와 예술도 그러하라고 보채고 있는 중이다. 인류를 염려하는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활약과 더불어 예술 영역에 대한 융합 독려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합리성, 예술적 창의성이 한데 만나 간섭 효과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각자의 목표들이 지향하는 것 이상의 효율적 목표를 창출하려는 목표를 십분 달성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들뢰즈는『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라는 저작에서 예술은 감각의 창조, 철학은 개념의 창조, 과학은 기능의 창조라는 상이한 목표를 지니고 있음을 설파한다. 예술의 장르별 융합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예술 아닌 것들의 융합은 결국 상이한 목표를 지니고 있는 것들의 목표를 함께 동시대의 맥락 속에서 공유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것들이 상호교차되고 얽힐 수 있음을 인정한다. 예술/감각의 창조, 철학/개념의 창조, 과학/기능의 창조는 두뇌 속에서 모두 경합하고 간섭한다. 이 때 예술과 철학은 감각과 개념의 창조를 통해 카오스/무한을 향해 가속하며, 반대로 과학은 기능의 창조를 통해 코스모스로 감속한다.54) 이 모두는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두뇌 속에서 서로 간섭한다. 이런 간섭 현상 속에서 예술은 비예술을, 철학은 비철학을, 과학은 비과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런 간섭을 통해 각각의 새로운 생성과 발전이 촉진된다
예술이 융합예술이라는 화두 앞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면, 융합을 무한정 열어두되, 그 융합 대상자가 테크놀로지일 경우에는 특히 상호 간섭 현상의 주도권을 주지 말 일이다.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융합에는 예술은 언제나 디자인을 위한 도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생각할 일이 있다면, 우리는 ‘예술/비예술/일상/인문학/테크놀로지’라는 융합 현상 이전에, 우리는 시대적 구분과 그다지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융합과 통섭의 자발적 의지와 창발성을 이미 감행해왔던 예술 본연의 정체성을 상기할 일이다. 그러한 예술이 ‘융합예술로 함께 달리기 대회’에 끌려 나가 테크놀로지와 다리를 함께 묶고 그들이 이끄는 목표지점으로 절뚝거리며 꼭 달려 나가야만 할까? 그들이 이끄는 목적지가 ‘뻔’한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합예술이 시대적 요청이라면, 예술가들은 테크놀로지와 함께 절뚝거리는 경험 정도는 할 필요가 있을 법하다. 아울러 ‘융합예술로 함께 달리기’ 대회에 나가지 않는 예술가들은, 예술이라는 정체성이 융합이라는 것을 언제나 자발적 의지로 실행해왔음을 상기하면서 안위할 일이다. 융합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테크놀로지가 지향하는 ‘뻔’한 목적지와 달리 언제나 예측 불허의 목적지, 정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걷는’ 예술 본연의 정체성을 거듭거듭 되새길 때 빛을 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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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생략
출전 /
김성호, “융합예술의 개념”, 특집_융복합예술의 현황과 전망,『계간 예술문화비평-A Quarterly Criticism of Art & Culture 』, Issn 2234-1323, 2012. 12. 1. 겨울호, 제 7호,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pp.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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