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courtesy of The Hayward / Photograph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 Morley von Sternberg
런던 사우스뱅크 아트센터에 위치한 문화복합공간 헤이워드 갤러리
런던의 템즈 강은 좁은 강폭과 북쪽과 남쪽 강변 곳곳에 자리한 관광 명소, 문화 기관들 때문에 런던을 찾는 관광객은 물론 런던 시민의 일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남북을 잇는 짧은 다리들은 항상 자동차와 행인들로 가득하고, 빅벤과 국회 의사당, 세인트 폴 성당 등의 역사적 명소부터 테이트 모던, 사우스 뱅크 센터와 같은 미술관과 아트센터까지, 템즈 강을 따라 위치한 역사와 문화 요지들은 런던의 얼굴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콘서트 홀과 영국 국립 극장 및 필름 인스티튜트 근처에 위치한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는 1968년 문을 연 이래, 영국 및 국제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공공 미술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고전 및 현대 음악, 무용, 문학 등 예술 각 장르를 대표하는 기관들이 모여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인 사우스뱅크 센터(Southbank Centre) 내에서 헤이워드 갤러리는 미술 분야를 주도하는 기관으로 일 년에 3-4 차례 기획전시를 주최한다.
헤이워드 갤러리는 영구 소장품을 지닌 미술관이 아니기에 근현대 미술의 여러 이슈와 흐름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기획전 프로그램은 헤이워드 갤러리의 시각과 어조를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댄 플래빈(Dan Flavin),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레베카 혼(Rebecca Horn), 에드 루샤(Ed Ruscha) 같은 현대미술의 대표적 거장들의 개인전부터, <사이코 빌딩(Psycho Buildings)>, <외국어로 웃기(Laughing in a Foreign Language)>, <무브(Move: Choreographing You)> 같은 특정 주제 중심의 그룹전에 이르기까지, 최근 수 년간 선보인 헤이워드 갤러리의 기획전들은 특히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관심사를 밀접하게 반영하였다.
런던을 대표하는 동시대 미술관 헤이워드 갤러리
지난 2006년 샌프란시스코의 워티스 인스티튜트(Wattis Institute)에서 활동하던 랄프 루고프(Ralf Rugoff)가 헤이워드 디렉터로 부임하면서, 갤러리의 프로그램은 더욱 혁신적이면서도 관객 지향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실 영국 사회에는,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뭔가 난해하고 사회의 특수 계층을 위한 예술로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해있기 때문에,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건축적으로 대중을 향해 열려 있기 보다는 요새처럼 고립된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관객 중심의 미술 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과 독특한 아이디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헤이워드 갤러리를 비롯한 사우스뱅크 센터의 건축물들은 2차 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영국을 포함하여 유럽 건축계에서 급격히 부상했던 ‘브루탈리즘(Brutalism)’ 양식을 대표한다. 20세기 초부터 발전되어온 모더니즘 건축 양식이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디자인 면에서는 더욱 기능적으로, 이념적으로는 더욱 유토피아적으로 변했고 건축물의 재료, 기능, 목적을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 브루탈리스트 건축가들의 이상은 육중한 덩어리와 각진 외관을 특징으로 하는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행정 기관의 사옥, 정부 주도의 대규모 주거 단지, 학교 등 기능적인 목적이 분명한 건축 프로젝트에서 특히 부각되었던 브루탈리즘은 계층적 차별 없이 예술을 대중화하고자 한 사우스뱅크 센터의 기본 건축 개념으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이 윤리적 정당성과 기능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미감을 고수하였기에 미적인 측면과 영국의 전통적 건축 감성을 억누른다는 비판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민주적인 원칙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용 면에서는 친근감 없이 기능 위주의 차가운 건축물로 느껴진다는 것도 큰 문제였고, 콘크리트 같은 이 양식의 주요 건축 자재들이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낡은 외관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도 중요한 이슈였다. 따라서 헤이워드 갤러리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건물 전체를 허물고 완전히 새로운 건축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제안도 불러일으켰다.
보다 열린 공간으로 재탄생한 헤이워드 갤러리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2003년 갤러리 입구를 투명한 유리 재료 중심으로 재단장하고 미국 작가 댄 그래햄(Dan Graham)의 파빌리온과 모던한 카페 공간을 추가한 이래, 헤이워드 갤러리는 시각적으로 보다 열린 공간이 되었다. 1층과 2층, 큰 계단 부분을 중심으로 동, 서편으로 다시 나뉘어 복잡했던 갤러리 디자인도 자연스럽게 2-3개의 독립적 전시 공간으로 나뉘어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2008년 헤이워드 갤러리 개관 4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사이코 빌딩>은 갤러리의 특수한 건축 조건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용한 전시로 손꼽힌다. <사이코 빌딩>은 한국 작가 서도호를 비롯하여, 아틀리에 바우 와우, 젤리틴, 토마스 사라체노, 마이크 넬슨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중견 작가들의 시각을 통해, 물리적 공간으로서뿐 아니라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공간으로서 건축을 재해석한 작품들을 보여 주었다. 눈으로 보는 데 머물지 않고 공간 자체를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제안된 많은 전시 작품들은, 예상외로 엄청나게 많은 관람객을 불러 들였고, 늘 비판의 대상으로 거론되었던 헤이워드 갤러리의 건축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각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사이코 빌딩>전시의 대중적, 비평적 성공은, 이듬해 열린 건축적 설치 작품들에 대한 그룹전 <내 마음 속을 걷기(Walking in My Mind)>를 가능하게 하였다. 쿠사마 야요이, 토마스 허쉬혼, 피필로티 리스트 등의 대규모 설치 작품들을 선보인 이 전시는, 헤이워드 갤러리의 공간적 가능성을 또 다시 가늠해 보는 시도였고, ‘블록버스터’ 전시도 개념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심각할 수 있다는 갤러리의 지향점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도전이었다.
지난 해 개최된 <무브>전 또한, 무용이라는 장르와의 접점을 통해 지난 50여 년 간의 현대 미술을 재조명해보는 전시로서, 혁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헤이워드 특유의 시각을 잘 보여주었다. ‘대중주의 (Populism)’만이 대중적일 수 있다는 편견을 없애고,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 또한 많은 대중에 의해 향유될 수 있다는 주장이 헤이워드 갤러리의 전시들을 통해 더욱 큰 입지를 차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인용 : 2016.03.14
필자: 테이트 모던 리버풀 큐레이터 이숙경
이숙경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던 이숙경은 1996년 런던 시티대학 예술비평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석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 에섹스 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내 다양한 예술 기관에서 근무하다가 2007년 말 테이트리버풀로 옮겨 큐레이터이자 테이트 미술관의 아시아-태평양 소장품 구입위원회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에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