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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철 : 바람아 불어라

  • 청구기호CL 668.5/변56ㅂ;2020
  • 저자명변순철
  • 출판사
  • 출판년도2020년 10월
  • ISBN9791195676743
  • 가격58,000원

상세정보

2020.10.15-2020.12.6 성곡미술관


책소개


오랜 시간 오직 ‘초상’ 사진으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인간의 본질을 담아 낸 변순철 사진작가는 15년 동안 KBS 전국노래자랑의 출연자 및 관객, 무대 등 다양한 대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치열하게 쫓아왔다. 

바람이 가볍게 부는 모양을 뜻하는 ‘살랑살랑’ 이라는 표현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설레임과 따뜻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바람은 계절마다 다른 모양으로 이뤄져 있는데 저자의 ‘바람’은 꿈이다. 작은 가능성을 내포한 그 꿈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 혹은 작품집을 감상하는 독자에게 ‘새로운 바람’이 되어 가슴속에 불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15년 동안 KBS 전국노래자랑의 출연자, 관객, 무대 등 다양한 형태의 대상을 담아왔다. 인간의 욕망과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의 과정을 작품으로 선보이고 있다. 전국노래자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군상을 통해 사회의 단면, 풍속, 심리적 코드, 시대의 정서를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이 반영하고 있는 이러한 의미를 치밀하고, 예민하게 끌어낸 것이 <바람아 불어라> 작품집이다. 출연자들의 낯선 노래와 어색한 춤이 담고 있는 아마추어들의 신선함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출연자들의 자발적인 행위이자, 비일상성, -체하기(pretending)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완전히 몰입하면서 관객과 시청자 모두에게 한바탕 축제로 확장된다. 사진 전문가 뿐만 아니라, 관심이 있는 많은 대중도 이미지 중심의 작품집을 통해 쉽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바람아 불어라> 작품집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담고 있는 한국인 만의 정서와 이것이 담고 있는 의미가 확장되어 본래적인 인간성을 일깨워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기획 의도이다. 이번 작품집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현대 산업사회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공동체 회복이라는 거시적인 담론도 함께 공감하기를 바란다. 


책은 가로 25.5cm, 세로 34cm 의 판형으로 160쪽 가량으로, 변순철 작가의 98개의 작품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다.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교수), 이택광 (문화비평, 경희대 교수)의 <바람아 불어라> 작품비평글에 대한 국문 및 영문이 수록되어있다. 책자는 4가지의 표지로 제작되었다.  


작품집 글


지도에서 영토로

‘대중들의 삶은 예전부터 역사의 얼굴에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대중들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그 얼굴의 근육인 양 그 얼굴의 표정을 표현한다는 사실—이것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다. 이 현상은 다양하게 그리고 특히 예술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발터 벤야민.

전국노래자랑

 <전국노래자랑>(2005~2020)은 1980년 11월 30일 첫 방송을 탄 이후 2020년 2월 23일(1980회)까지 방영 되었다. 현재는 코로나 19 사태로 휴방 상태이다. 전국노래자랑 홈페이지에는 매주 열리는 이 미디어 축제의 시원을 1950년대 라디오 노래자랑에서 기인했노라 암묵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KBS는 1981년도에 <국풍 81>이란 전국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축제를 주관한다.  그러나 그 내막에는 국가의 개입이 있었고, 이는 본 축제가 5.18 광주 민주항쟁을 경험한 뒤 국가에 의해 기획된 축제란 점에 있다.  근대 이후의 축제는 자발적인 민중의 문화예술적 행위에서 출현하기보다 국가주의 담론으로 비롯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는 유무형의 민속 유산의 가치 이전에 국가 간, 지역 간, 학계 간 정치게임으로 퇴색한 것과 마찬가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근현대사의문화 정체성은 고유한 자신의 시간에서 문화 정치학에 의한 상대적 시간으로의 이동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전국노래자랑은 대중미디어를 이용하여 매주 동일한 시간에 남한 팔도를 단일민족이라는 프레임으로 연결한 주말의 음악 축제이다. ‘<전국노래자랑>은 미디어와 음악, 음악과 축제, 미디어와 지역, 국가, 민족 간의 결합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지역과 국가, 민족을 하나로 연결하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 경험과 매우 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가는 국민의 정체성을 역사, 교육, 제도에 의하여 고정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느끼는 경우는 대부분 미디어를 통한 경험에 의존한다. 한일 축구전, 올림픽 등의 스포츠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국민과 국가가 일심동체가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즉 20세기 말 미디어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과 전국이라는 공간적 개념을 뒤섞은 축제를 생산한다. 1980년도는 미디어가 전국 단위의 네트워크를 활용한 국가적 차원의 초기 축제 산업이 시도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지도와  영토

변순철이 전국노래자랑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범박하게 설명하자면 현대예술로서의 사진 미학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고픈 욕망 때문이었다. 그는 다인종 가족(interracial family)을 찍은 <짝-패>로 사진계와 미술계 양쪽의 주목을 받았다. 짝-패의 인물들은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이 같은 유형학적 사진은 인물, 사물, 자연을 막론하고 대상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다. 무표정한 유형학적 사진은 보는 이에게 전과 다른 새로운 방식의 이미지 보기를 요구한다. 경험, 기억, 상식과 지식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경험은 결국 초현실주의부터 지속된 예술의 효능 중 하나다. 인물의 무표정함은 육체를 하나의 언어적 상징으로 보던 근대적 시각을 해체한다. 의미가 탈각한 외상이 된 것이다. 예술은 동시대성을 선취하기 위하여 모순의 굴레를 반복하는 세계다. 따라서 현대사진에 있어서 인간 신체의 재현은 매우 첨예한 담론을 발생시킨다. 과연 어떻게 인간, 신체를 재현할 것인가. 사진에서의 ‘무표정’은 하나의 선택이다. 의미와 문맥에서 벗어나 오롯이 한 대상을 또렷이 보는 행위는 어떤 면에서 뒤샹의 레디메이드 전술과 무표정하게 재현된 인물은 오직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것이 얼마나 정치, 문화, 젠더, 정체성과 접하게 연결되었는지를 드디어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짝-패와 같은 유형학적 인물사진은 보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넓혀 마치 표본실의 대상처럼 무감각한 중립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른바 미학적 사건을 일으킨다. 또한 현대사진은 일상적인 내러티브를 통하여 개인의 삶과 시선을 드러낸다. 정통한 사진술에서 벗어나 균형이 어긋한 구도, 비전문적으로 보이는 스냅사진이 현대미술로서의 사진으로 진입한다. 전형적인 사진 미학의 질서를 따르지 않았지만, 이러한 자연스러운 앵 은 도리어 피사체와 사진가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는 미학적 장치가 되었다. 현대예술로서의 사진은 어쩌면 새로운 아우라를 발굴하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극단적 즉물주의나 반대로 지나친 관음주의, 나아가 디지털 기술 매체를 통한 작품이 없는 비물질의 예술도 포함될 수 있다.매체 연구자 심혜련은 오늘날 달라진 매체 환경과 현대문화예술의 상황과도 관련하여 ‘아우라의 귀환’과 ‘아우라의 복원’의 논의가 전개 상황을 전한다.   예술로서의 사진은 사진을 가운데 두고 벌어진 기술 매체와 지각에 대한 시도로 보인다. 어떻게 재현의 한계를 벗어날 것인가란 질문은 인물을 의미가 부재한 기호의 집합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일상적인 삶의 현장을 포착하여 의미 바깥의 실재를 제시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변순철은 피사체와 나누는 감정교환이 없는 표정 없는 지도를 만드는 작업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 전국노래자랑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전국노래자랑을 하나의 문화적 사건으로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서서히 시선은 노래자랑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로 옮겨갔다. 

민족지학으로서의 가장무도회

사실 전국노래자랑의 꽃은 참가자들의 퍼포먼스에 있다. 변순철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들에게로 옮겨진다. 과장된 화장과 시대착오적인 의상을 입은 다수의 참가자는 고장에 대한 애정과 장기를 뽐내고자 하는데, 그전에 사회자와의 고 당기기를 거쳐야 한다. 참가자를 응원하는 가족, 이웃, 동료들의 모습과 솔직한 현수막 문구까지도 전국노래자랑을 구성하는 기호들이다. 전국의 크고 작은 지역을 방문하는 프로그램 형식 덕분에 전국노래자랑은 매주 특별한 기념일과 다름없다. 흥미로운 점은 참가자, 관람객, 경연 레퍼토리와 지역은 매번 바뀌지만, 서사의 내용과 형식은 일관적인 틀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전국노래자랑을 구성하는 이러한 유형학적 특성의 지속성과 반복성은 지방 문화와 미디어 산업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특유의 문화를 생산한다. 1980년대 대중음악 지형도는 젊고 세련된 수도권의 대학문화와 향토색이 강한 지역문화로 이분화되는데, 전자는 진보적인 이미지로 후자는 지역적인 이미지로 기호화된다. 당시 포스트모던으로 이행하던 한국 사회는 국가와 도시가 맺어온 오랜 관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도시는 국가를 벗어난 자율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게 된다. 이처럼 자본을 기반으로 구축된 현대국가는 필연적으로 일관된 이상과 이념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국가를 구성하는 지리학적 단위들의 구조와 현실은 어느 정도 어긋난 상태가 된다. 전국노래자랑은 수도권과 지방을 연결하고 있지만, 지역과 상관없이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기호의 시간은 현재와 과거 사이에 위치한다. 변순철은 전국노래자랑 행사를 따라다니면서 그곳에 참여한 다양한 인물들을 세대, 젠더, 지역을 아우르며 촬영을 진행했다. 이번 전시 ‘바람아 불어라’(2020)는 지난 5년간 (2015~2019)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실상 사진에서 시간의 차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참가자의 세대와 의상 간의 문맥을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나타난다. 장년층의 경우, 성장을 하고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의식, 의례를 위한 의상을 정성스레 준비해온 인물들의 모습은 그들만의 시간을 드러난다. 80년대 검정 학생모를 쓰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 참가자는 교련복을 입고 손에는 주판을 들고 있다.(경남 합천군, 2019) 이 참가자는 혼성모방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패션은 기호학에 의한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젠더, 용도, 목적이 불분명한 그의 모습은 어렴풋이 과거 중고등학교에서의 운동회와 축제를 연상시킨다. 각설이가 등장하고 교복 단추를 채우지 않거나 옷깃을 세우는 것은 질서에 대한 가벼운 반항의 모습과 닮았다. 즉 그의 패션은 언어에서 벗어난 옛 기억과 경험을 체현한 고립된 문장(말)과 같다. 사진의 배경을 보면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즈음은 아닌 게 분명하다. 이처럼 전국노래자랑의 시간뿐만 아니라 어쩌면 지역과도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누구도 그의 차림새를 보고 지역을 상상할 수 없다. 지역의 정체성은 응원봉에 새겨진 문구로 표상될 뿐 실재는 혼성적이고 탈시간적인 상태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연속적인가를 추측하게 한다. 변순철은 참가자 외에 관객을 촬영하기도 했다. 마치 쌍둥이처럼 동일한 등산복을 맞춰 입은 두 중년 남성 관객의 모습은 독특한 한국적 하위문화의 특성을 드러낸다.(경상남도 울산 광역시 울주군 서생 간절곶, 2019) 한국 사회에서 중년 세대는 아줌마와 아저씨로 대변된다. 아줌마와 아저씨는 또 다른 젠더와 다름없다. 그런데 아줌마/아저씨 정체성은 예외 없이 하위문화적 요소로 구분된다. 시류에서 어긋한 패션, 말투, 제스처, 취향이 그러하다. 사회는 끊임없이 타자를 생산하는데, 아줌마/아저씨는 이런 타자화의 희생양이다. 맹목적으로 생존과 성공을 요구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 다. 허리띠를 질끈 매고 억척스레 살아가는 모습은 국가가 표상하는 모범적 국민의 이미지이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관심 밖의 대상이 된다. 사회는 성, 지역, 직업, 학력, 인종, 취향, 종교, 행동 양태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존재의 유형학을 산출한다. SNS에서는 이러한 유형학 생태계의 정상에 위치한 존재들을 재현하거나 체현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또 다른 경계지인 셈이다. 이 가상 세계에서는 현실의 모습이 부재하거나 희미해진다. 그곳의 알고리듬은 정동(affect)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순철은 지속적으로 자본 중심의 사회에서 배제되는 존재를 사진에 담고 있다. <짝-패>, <전국노래자랑> 그리고 <나의 가족>에 이르기까지, 변순철은 한국 사회에서의 타자, 하위 주체의 얼굴을 기록하고 있다. 다인종 가족사진인 <짝-패>는 인종의 문제를, 딥러닝 기술을 이용하여 헤어진 가족의 모습을 재현한 <나의 가족>은 이념의 문제를 그리고 한국 특유의 문화 현상인 <전국노래자랑>은 미디어에 의해 구성된 현대의 민족지를 질문한다. 

우리의식(We-feeling)

사실 변순철은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는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 특히 전국노래자랑에 등장한 참가자들의 모습은 익살스럽고 과장되어 보이지만 이러한 혼성화된 모습은 전국 어디에나 존재한다. 한국의 하위문화의 경관은 이질적이고 혼성적이며 매우 시대착오적인 이미지로 차 있지만, 내국인에겐 너무도 흔한 모습이기에 관심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곤 한다. 그래서인지 아줌마/아저씨 패션은 종종 외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곤 한다. 옛것과 실용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비일상적인 것의 뒤섞인 버내큘러 디자인에서 오히려 전위적인 면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변순철은 전국노래자랑에서 이미 존재하는 문화적 유형을 마치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처럼 기존의 문맥에서 추출하여 다른 문맥에서 그들의 존재를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우리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한 사람의 달궈진 표정과 흥에 도취된 몸짓 그리고 맘껏 꾸미고 나와 생명의 열기를 품는 그 모습을 목격한다. 그는 지도를 보며 행사장을 방문했지만, 막상 그가 발견하는 것은 지도 너머에서 살아가는 진짜 사람들의 흥과 풍류이다. 요컨대 변순철은 사진을 통하여 동시대 문화에서 소수가 되어가는 민속지적 현장에서 ‘우리의식’(We-feeling)이 배태되고 있다고 증언한다.


정현 (미술비평, 인하대 교수)


사진의 테크네와 평등의 감각: 변순철의 “대중미학”

사진의 발명은 예술에 대한 근본 개념을 바꾼 사건이다. 고전적 의미에서 예술을 뜻하던 테크네(τέχνη)라는 개념은 사진의 출현으로 인해 거대한 변화에 직면했다. 이 변화의 요체는 다른 무엇도 아닌, ‘대중예술(mass art)’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 던 두 범주의 결합이었다. 사진은 대중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예술 조건을 구현한 근대의 예술형태 다. 손에 들고 다닐 정도로 작아진 ‘ 어둠의 방(camera obscura)’, 말하자면 카메라의 진화는 투어리즘과 결합하면서 폭발적인 대중의 창작활동을 낳았다. 사진의 급진성은 예술을 기계 복제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제 인간의 눈이 사물을 보고 손이 그 인상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의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다. 경이로운 사진술의 보급은 미학의 차원에 내재한 평등주의를 강화하고 촉발했다. 변순철의 작품세계는 이런 ‘대중예술’로서 존재의미를 획득한 사진의 원리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대중은 개체로서 존재하는 대상이자 동시에 위계로 나눌 수 없는 평등한 욕망의 주체이다. 변순철의 <바람아 불어라>는 하나의 집합이자 개별적인 구성 원소로서 대중을 그려낸다. 그가 보여주는 대중은 <전국노래자랑>을 배경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낸다는 점에서 결코 무명의 그림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장삼이사의 평범성이야말로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미학적 차원(the aesthetic dimension)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주조하는 대중은 데모스(demos)의 지층이다. 이 대중은 자신의 장소와 지위로 돌아가면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겠지만,<전국노래자랑>이라는 차원에 진입하는 순간 규정할 수 없는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변순철의 대중은 사진과 아마추어리즘 예술의 관계를 환기한다. 아마추어리즘은 전문성을 획득하지 못한 미숙한 예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마추어리즘은 그 전문성의 규범화를 해체하는 사진의 상징성을 구성하는 구조의 일부이다. 사진과 영화는 기술의 ‘무관심화(indifferentiation)’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언제나 아마추어리즘을 향해 열려 있다. 아마추어리즘은 전문성이라는 합의의 윤리로 빨려 들어가기 이전에 들끓는 혼종성의 열정, 즉 이질적인 문화가 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어떤 발언도 가능하고, 어떤 방식도 통하고, 어떤 기법도 허용된다. 이 아마추어리즘이 변순철의 렌즈를 거쳐 놀라운 광경으로 태어난다. 물론 변순철은 아마추어사진가가 아니다. 단단한 전문성과 부드러운 아마추어리즘이 서로 마주치면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바람아 불어라>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바람아 불어라>는 대중의 행위예술을 솔직하게 그려낸다. <전국노래자랑> 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거대한 대중예술의 도가니이다. 이 무대에서 대중은 비로소 자신의 표현을 스스로 획득한다.이 표현은 개별적이지만, 동시에 통속적인 통일성을 유지한다. 단체로 알록달록한 의상을 맞춰 입은 팀들이나 장기자랑을 하기 위해 꼼꼼하게 준비물을 챙긴 출연자들이 변순철의 렌즈 앞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들이 잠깐 올랐던 <전국노래자랑>의 무대는 변순철의 사진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이 이미지야말로 순수한 시공간의 경험을 드러낸다. 기억이나 경험을 넘어서서 언제나 이미지는 선험적으로 작동한다. 변순철의 작품세계는 경험 이전에 이미 들어서서 다른 경험들을 관장하는 이미지의 효과를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바람아 불어라>는 무대 자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정확히 변순철이 보여주는 세계는 그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국노래자랑>이나 출연자들의 포즈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의 반복이지만, 또한 그 반복 이전에 존재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우리는 변순철의 작품들을 보기 이전에 <전국노래자랑>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하고 있다. 변순철의 사진은 이렇게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서 있는 이미지의 지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의 사진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선사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의 전문성은 아마추어리즘의 예술을 포획해서 극사실적으로 고착시킨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미지가 그렇게 배경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대상으로 오롯이 드러날 때 소격효과(estrangement effect)가 발생한다. 이런 소격효과를 통해 발생하는 미학적 중립화는 기존 대상에 대해 내리던 윤리적 판단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가치 판단의 변화가 일어나는 셈이다. 변순철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은 그에게 무의미하다. 그의 작품세계는 이 둘이 어떻게 불가분으로 결합해 있는지 친절하게 보여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작품세계는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있다. 그에게 대중은 마냥 덩어리로 뭉쳐 있지 않다. 하나의 덩어리이지만, 그 알갱이 하나하나의 색채는 선명하다. 이 선명한 개별성을 예리하게 그의 카메라는 잡아낸다. 출연자들이 취한 포즈는 사진가의 의도와 상관없다. 아니 외부로 향하는 사진가의 지향과 함께 그의 내부로 비집고 들어간 대상의 주관성을 보여준다. 사진가는 이 주관성과 외부의 대상을 하나로 융합한다. <바람아 불어라>는 개인의 재현이기도 하지만, 또한 네이션(nation)이라는 추상 공간의 재현이기도 하다. 네이션은 ‘민족’이라는 번역어로 포괄할 수 없는 의미를 내포한다. 지리적 공간이라는 물리적 조건을 뛰어넘는 이상주의가 네이션에 함의되어 있다. 네이션이야말로 개인을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그물망이다.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은 촘촘하게 무명의 개인을 호명해서 몫을 가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직조해낸다.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비로소 이름을 얻은 개인들은 자신들의 미학적 체험을 경험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미학적 경험의 체제화가 바로 네이션이라는 추상 공간의 본래성을 호출하는 것이다. 물론 이 본래성은 재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람아 불어라>가 보여주는 네이션의 광경들은 결코 완전체가 아니다. 이 완전체가 누락하고 있는 것은 개인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했을 대중의 “바람”이다. 변순철의 작품들이 무대 뒤의 사건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바람아 불어라>는 이중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 바람은 부는 바람이면서 동시에 꿈의 바람이다. 둘은 서로의 의미를 보완한다. 이 바람은 대중의 열정을 상징한다. 언어로 분류할 수 없는 파토스의 다양성이 이 바람에 담겨 있다. 변순철의 작품들은 기술과 예술의 구분을 훌륭하게 가로지른다. 모더니즘에 고착되어 있던 미학의 경험들을 그는 미학적인 차원으로 개방한다. 여기에서 미학적 차원이란 것은 미학 체제를 통해 고급과 대중, 좋은 것과 나쁜 것, 개별성의 차이를 구분하는 위계를 의미한다. 이 위계의 배치가 뒤섞이면서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는 미학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바람아 불어라>는 극적으로 이 차이의 소멸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예술이라는 것이 앎의 문제, 그것도 자기-앎의 문제라면, 미학은 더욱 테크네와 분리할 수가 없다. 미학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생성하는 아프리오리이다. 플라톤은 감각적인 것이라는 범주에 세계를 나타나게 만드는 근원적인 원인의 가시적 양상이라는 뜻을 부여했다. 감각적인 것은 어떤 이미지이다. 인식을 지배하는 이미지라는 개념은 실제로 ‘본다’는 것을 앎과 동일시했던 고대적 사유체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플라톤은 ‘ 로 적힌 말(written word)’을 공동체 질서를 위한 보충적인 요소라고 보고, 문자 자체를 ‘고아의 말’이라고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물론 이런 플라톤의 생각은 「파이드로스(Phaedrus)」 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글로 적힌 말이라는 것도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파이드로스. 그림은 시작부터 그곳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서 있지만, 무엇인가 물었을 때 조용히 홀로 침묵하고 있는 법일세. 문자도 이와 마찬가지일세. 자네에게 그것들이 마치 무언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에 담긴 것들 가운데 무언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서 질문을 던지면 은 언제나 똑같이 하나만을 가리킨다네.  플라톤의 문자는 오늘날사진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진은 그림보다 더 침묵하는 말인 셈이다. 그러나 자크 랑시에르는 이런 플라톤의 주장을 다르게 해석하면서, 항상 말할 수 있는 것이 규정하고 있는 문자를 ‘평등의 언어’라고 말한다. 물론 랑시에르에게 평등의 언어라는 것은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침묵의 언어로서 사진은 문자보다 더 강렬한 평등주의의 열망을 내재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공통적인 것을 합의된 것들로 파악하면서, 이것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본다. 을 통해 사람들은 소통하고 공통성을 구축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을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적절성의 논리’로 파악한다. 이 적절성의 논리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이며, 이런 맥락에서 미학은 결코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적이다. 이 인식은 기본적으로 체제적이고, ‘보편적’이다. 미학이 인식적이라면, 궁극적으로 이론 없는 예술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할 수 있는 미학은 예술을 억압한다. 사실 새로운 예술은 이런 미학의 억압을 뚫고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미학이 언어의 공통성 위에서 구축할 수 있는 ‘평등’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 평등에 의문을 제기하고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대중예술의 힘이다. 새로운 감각의 출현은 미학적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변화는 기존의 지식체계에 균열을 초래한다는 측면에서 급진적이다. 사진의 리얼리즘은 세계를 평등하게 인식하는 관점의 출현을 의미했다. 리얼리즘이라는 중성적 스타일(neutral style)의 출현에서 위계적 습속의 체계를 탈 가치화하는 미학적 차원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한 변순철의 스타일은 기존의 미학으로 분류할 수 없었던 대중의 힘을 드러낸다. 이들은 ‘예술’이라는 범주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감각을 분출한다. 이 지점에서 ‘사회의 질서’에서 자리 잡고 있는 각자의 처지와 지위는 중립적인 감각으로 쪼개져서 해체된다.변순철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참가자들은 감각적인 능력을 한껏 과시한다. 과장된 제스처와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사뭇 진지한 자세와 태도라는 모순적인 요소들과 함께 소용돌이친다. 이들은 유쾌하면서도 심각하다. 조용하지만 엄청난 에너지의 응결이 변순철의 사진들을 현실의 핍진성으로 이끌고 간다. 변순철의 사진들을 통해 우리는 이 참가자들의 감각들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식별의 기준은 이미 주어진 미학적 판단을 넘어서 있다. 변순철은 그 기준을 새롭게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사진은 해체적 중립성이라는 이 매체 고유의 속성을 가장 적확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바람아 불어라>는 대중예술로서 사진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즐거운 한편으로 숙연한 결과물이다. 그의 노고와 열정에 찬사를 보낸다.


이택광(문화비평, 경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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