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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 유교도시 한양의 행가 공간

  • 청구기호911.05/김25ㅅ;2017
  • 저자명김동욱 지음
  • 출판사도서출판 집
  • 출판년도2017년 6월
  • ISBN9791195233489
  • 가격18,000원

상세정보

조선시대 서울의 여러 궁궐 정문과 그 앞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사료를 통해 살폈다. 여기에는 한양의 유일한 개방 공간이며 현재도 그 성격이 이어지는 육조대로를 포함한 다섯 궁궐의 주변 가로가 대상이 된다. 궁궐 앞길을 통해 담장 안ㆍ밖 세계를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책소개

경복궁 광화문 앞길 세종대로

조선왕조의 수도로 한양이 정해지고 그 머리가 되는 곳에 궁궐이 들어서고 궁궐 문 앞으로 대로가 펼쳐지는 순간 이 길은 온갖 정치적인 변화의 현장이 되었다. 정치 상황이 달라지면 이 길이 영향을 받았다. … 최근에 이 길은 온갖 정치적 욕구나 주장을 펼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세종 때 석호라는 사람이 경상도 고령에서 올라와 지방 관리의 비리 사실을 적은 긴 두루마리 종이를 광화문 앞에서 중추원까지 펼쳤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육조대로의 숙명 같은 일은 세종 때도 벌어졌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_339쪽에서

지난 4월 24일 문재인 대선후보는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청사로 옮기고 대통령 관저를 광화문 인근에 마련하겠다는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천명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서울역사문화벨트조성공약 기획위원회의 일원인 건축가 승효상은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2019년 이후 광화문으로 이전할 새 청와대는 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와 경복궁 내 일부 시설에 분산 입주할 수 있다고 본다.”고 하면서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 광화문 앞에 있는 정부종합청사를 새로운 청와대 건물로 쓰자고 제안했다.
1995년 국가중심가로 조성 계획 발표, 2009년 광화문광장 조성, 2010년 세종대로로 이름을 바꾼 육조대로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1392년 7월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결정한 600년 전부터 정치, 행정, 문화의 집결지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 왔다. 
세종대로의 조선시대 명칭인 육조대로는 왕자의 난 이후 송도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결정을 한 태종 때 형성되었다. 태종은 한양 천도 후 관제 개혁을 하는데 이때 육조가 2품 관청으로 승격된다. 광화문 앞 가로변에 육조관청이 들어서면서 육조대로, 육조가, 광화문 앞길 등으로 불리며 육조대로가 형성되었다. 옛 지도에서는 광화문 앞 일직선으로 표현된 도로 좌우에 육조 관청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실측한 그림이 아니어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한다. 1907년에 실측 제작해 그린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를 보면 북쪽 가운데에 광화문이 긴 월대 뒤에 서 있고 남쪽으로 일직선의 넓은 대로가 있고 대로 좌우에 각 관청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도면이 그려질 당시에는 육조의 관청들은 모두 해체되고 통감부의 새로운 기관들이 자리한 모습이다. 1961년에는 공조와 형조가 있던 자리 부근에 시민회관이 들어서고, 1970년에 예조 터에 25층 높이의 정부종합청사가, 1980년에는 세종로 북쪽 끝에 22층의 교보빌딩이 세워졌다. 길의 이름 역시 물리적 변화만큼이나 정치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 통치의 상징가로로서 광화문통, 광복 후에는 세종로, 2010년부터 세종대로로로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에 육조대로는 나라 최고의 행사장으로 한양의 유일한 개방 공간이었다. 왕의 능행이나 온천 여행과 같은 왕의 거둥 행렬, 중국 사신 맞이 행사, 무과 시험 모습 등은 한양의 최대 구경거리로 “담처럼 모인 구경꾼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왕이 사직단이나 종묘에 제사 지내러 갈 때나 왕릉에 절하러 갈 때 국왕이 탄 가마는 육조대로를 지났다.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사신이 서울을 찾으면 반드시 육조대로를 거쳐 궁으로 들어갔다. 세종은 국왕 출궁이나 사신 영접 절차를 세세하게 규정했다. 거가 출궁 시 가로변은 오색 천으로 치장하는 결채를 했으며 사신이 광화문을 들어올 때는 문 옆에 채붕을 꾸미고 산대놀이를 벌여 먼 길을 찾아온 사신의 노고를 위로했다.  
_335쪽에서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유교도시 한양의 행사 공간》은 서울의 다섯 궁궐이 언제 어떤 모양새로 지어지고 궁궐이 들어서면서 궁궐 주변 가로가 어떻게 형성되고, 이들은 한양의 가로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살핀다. 또한 당시 유일한 개방 공간이었던 궁궐 앞길에서 벌어진 각종 행사들도 함께 살핀다.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현재까지 600년 서울 공간의 역사를 궁궐과 그 앞길을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자취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창덕궁 돈화문 앞길

도시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없던 길도 생기고 또 있던 길이 사라지기도 하고 물길도 큰 홍수가 지나면서 바뀌기도 하는 것이어서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돈화문 앞길에서 보이는 도시계획적인 가로와 물길은 적어도 창덕궁에 돈화문이 세워지고 돈화문에서 동서 간선도로로 가로가 연결되는 시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_165쪽에서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 오른 정종은 송도로 되돌아간다.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태조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는데 정궁인 경복궁이 아닌 이궁으로 창덕궁을 짓고 이곳에 머문다. 창덕궁은 종묘 뒤편의 경사지고 굴곡 있는 대지에 지은 궁궐로 잠시 머무는 기능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지만 조선시대 가장 오랜 시간 사용된 궁궐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 지어지고 문 앞으로 좌우에 행랑이 늘어선 길이 운종가까지 길이 이어져 궁궐 앞 가로의 면모를 갖추기는 했지만 육조대로 만큼 폭이 넓지 못해 국가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에는 육조대로로 옮겨 행사를 벌이거나 돈화문 앞길에서 행사를 벌이더라도 육조대로 행사만큼 화려하게 벌어지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후 중요하게 부각된 비변사가 들어선 것을 제외하면 두드러진 관청도 없다. 돈화문 앞길에서 벌어진 눈에 띄는 행사로는 인조 발인 행렬(1649),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난에 가담한 박종원을 포함한 반란군을 참수하고 그들의 목을 장대에 꿰어 높이 매단 헌부례(1728), 순조 때 내수사에 속한 내노비와 시노비 문서를 태우는 노비문서 소각(1801), 순조와 순원왕후의 가례 행렬(1802) 등이 있다.     

세 대비를 위해 지은 창경궁과 홍화문 앞길

홍화문은 경복궁의 광화문이나 창덕궁 돈화문과 다른 점이 있다. 다른 두 곳의 정문은 문 앞으로 직선대로가 열려 있는데 반해서 홍화문의 경우에는 길이 문 옆으로 나 있다. 모름지기 궁궐의 정문 앞길은 문을 두고 정면 앞으로 가로가 길게 뻗어서 가로 좌우에 관청이 도열하는 모습이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비록 가로 좌우에 관청이 배치되지 못하더라도 가로만은 앞으로 뻗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야 멀리서도 긴 가로 끝에 우뚝하게 선 궁궐 정문 모습이 위용을 드러낼 수 있다. 홍화문은 지리적으로 그런 여건이 못되었다.  
_217쪽에서

1980년대 초까지도 동물원이 있고 밤 벚꽃놀이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성종 때 지어졌다. 성종 재위 당시 세 대비가 궁궐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생긴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종이 태종을 위해 지은 수강궁 터에 지은 궁궐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붙어 있어 둘의 영역을 뚜렷이 구분하기는 어렵다. 17세기 이후 창경궁은 주로 왕실에 흉사가 났을 때 빈전이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창경궁 흥화문 앞길은 현재 종로4가 교차로에서부터 혜화문이 있던 고갯마루까지 이르는 긴 길이다. 이 길은 문묘와 태조가 창건해 교종의 수찰이 된 흥덕사와 연결된다. 1776년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들어서면서 경모궁 앞길, 현재의 대학로가 흥화문 앞길보다 중요한 길이 되었다. 눈에 띄는 흥화문 앞길의 행사로는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사미행사(1749, 1795),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례(1817), 정조, 헌종, 철종의 발인 행렬 등이 있다.
 
숙종과 영조가 즐겨 찾은 경희궁과 흥화문 앞길

결국 경희궁의 궁장 주변 다섯 출입문은 각각 운종가로 이어지거나 돈의문과 연결되기도 하고 또 사직단과도 이어지면서 도성 서쪽의 궁궐로서 주변 시설들과 크고 좁은 길을 통해 소통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궁장 자체가 모두 사라져 버리고 궁역이 크게 축소되어 주택가로 변모하거나 공공시설이 들어서면서 주변과 단절된 채로 남아 있다.  
_242쪽에서

왕권 유지에 불안감을 느낀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무리한 일을 하고 풍수가가 명당자리라고 가리키는 곳에 궁궐을 지었다. 하나는 승려 성지가 명당자리로 지목한 땅에 지은 인경궁이고 다른 하나는 김일룡이 왕의 기운이 서린 곳이라고 말한 새문동 돈의문 안쪽 정원군 집터에 지은 경덕궁이다. 1760년에 경덕궁은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꾼다. 숙종이 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나고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창경궁에서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영조는 재위 37년부터 경희궁에 머물다가 집경당에서 승하했다. 흥화문 앞길에서는 여덟 차례에 걸친 영조의 사미행사, 종묘 증축 공사를 하면서 정전과 영녕전에 모신 27위의 신주를 광명전, 장락전, 위선당, 태령전, 자정전에 각각 나누어 모셨다가 종묘 증축 공사가 끝난 후 다시 종묘로 모시는 등의 행사가 있었다. 경희궁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중학교로 전용되고 건물들은 철거 또는 매각되고 동쪽은 관사 터로 서족 경사지에는 기상관측소가 들어오는 등 수난을 겪었다. 현재 전각 몇 곳만 복원해 놓은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고종황제의 대외 정치활동 무대 중 하나인 경운궁과 대한문 앞길

이 일대는 서대문으로 가는 대로와 서소문으로 나가는 작은 길 사이의 불규칙한 형상의 넓은 대지였으며 중앙부가 약간 언덕을 이루었다. 이 언덕을 중심으로 남쪽 양지바른 곳에 조선 초에는 정릉이라는 무덤도 들어서고 그 주변에 흥천사라는 장대한 사찰도 있었다고 짐작된다. 고종이 이어할 즈음 이 주변은 미국, 영국 및 러시아의 공관들이 들어섰다.   
_287쪽에서

경복궁에 머물던 고종은 친러 정책을 도모한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등 압박해 오는 일본 세력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1896)을 단행한다. 이곳에서 고종은 친일세력을 배제한 새로운 통치 구상을 하면서 경운궁의 낡은 전각을 고치고 새롭게 몇몇 건물을 추가하는 등 통치의 새로운 기반을 다지고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경운궁 일대는 서대문으로 가는 대로와 서소문으로 나가는 작은 길 사이의 불규칙한 형상의 넓은 땅으로 고종이 이어할 즈음 주변에 미국, 영국, 러시아 공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운궁에는 석조전, 수옥헌, 돈덕전, 구성헌, 정관헌과 같은 서양식 전각을 지어 열강들 사이에서 제국의 의지를 드러내려고 했다.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는데 인화문 앞에 남쪽으로 높은 언덕이 가로막고 있어서 앞으로 뻗어나갈 수 없고 좌우로 난 도로도 원활한 소통을 하기 위한 정도의 폭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지리적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궁궐 동쪽에 정문 구실을 하는 또 하나의 문을 내고 대안문으로 이름 지었다.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중건 공사를 하면서 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의 변화 

지금까지 궁궐에 대한 관심은 궁궐을 둘러싼 담장 안쪽 세계에 치우친 감이 있다. 그러나 궁궐은 궁궐 출입문과 그 앞길을 통해 바깥 세계와 통해 있었다. 궁궐 앞길은 궁궐과 도시를 연결하는 숨통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담장 안의 세계와 함께 담장 바깥 세계까지 아울러 살펴보아야 궁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궁궐 앞길에서 벌어진 행사를 살펴보는 일은 이러한 통합적 이해에 접근하는 작은 실마리가 될 것으로 믿는다.
_005쪽에서

서울에는 다섯 개의 궁궐이 남아 있다. 조선의 개국에 맞춰 지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1395), 왕자의 난 이후 한양을 떠났던 왕이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면서 향교동 동쪽에 지은 이궁 창덕궁(1405), 정희․인수․인순왕후 세 대비를 위해 수강궁 터에 지은 창경궁(1484), 새문동 돈의문 안쪽 정원군 집터에 있는 ‘왕암’이라는 바위가 예사롭지 않다는 풍수가의 말을 들은 광해군이 왕암 일대에 지은 경희궁(1620),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궁궐 대신 선조가 행궁으로 삼아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곳을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전각들을 고치고 새롭게 건물을 추가해 대한제국의 통치기반으로 삼은 경운궁(1897년 고종 이어)이 있다. 이 다섯 궁궐과 사직단, 종묘, 선농단, 남단과 같은 국가적인 제사시설과 육상궁이나 경모궁 같은 왕실 사당이나 어진 봉안 시설인 영희전 정도가 한양의 주요 시설이었다. 
600년 역사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이 다섯 궁궐 이외에 이렇다 할 역사 유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사직단과 종묘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다섯 궁궐도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 궁터만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경희궁은 대부분 잘려 나갔고, 경운궁 역시 정전인 중화전을 중심으로 한 몇몇 핵심시설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궁궐들에는 일제 강점기에 식물원, 동물원이 들어섰는가 하면 최대의 꽃놀이 터였으며 최고의 전시장이었다. 이것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산업박람회장이기도 하고 전통적 형상만을 본떠 어설프게 지은 박물관이 들어섰으며 철근콘크리트로 광화문을 짓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궁궐의 복원과 정비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광복 50년을 맞이한 1995년에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의 돔이 철거되는 등 궁궐들이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궁궐의 모습은 재정비되고 복원되고 있지만 이미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궁궐 앞 가로는 복원되지 못한 채 어느 궁궐은 도시의 섬처럼 커다란 차도에 둘러싸여 있고 어느 궁궐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궁궐이 있는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런 큰 변화 가운데서도 궁궐 문 앞 가로의 도로 폭이나마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 창덕궁 돈화문 앞길이다. 양쪽 샛길과 물길까지도 자취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기억은 소중한 자산이다. 기억이 풍부한 사람은 풍요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기억할 것이 없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초라하게 만든다.”며 우리가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 가로가 지닌 다양한 기억들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지은이 | 김동욱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를 거쳐 2017년 현재 명예교수로 있으며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건축물의 외형보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건축에 대한 생각, 건축을 짓는 데 참여한 장인들의 기술, 물질적인 여건 등을 통해 시대의 건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2015),《(개정) 한국건축의 역사》(2013), 《도산서당 선비들의 이상향을 짓다》(2012),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2002),《조선시대 건축의 이해》(1999),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1996), 《한국건축공장사연구》(1993), 《종묘와 사직》(1990), 《창덕궁 깊이 읽기》(공저, 2012) 《영건의궤-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공저, 2010)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조선 초기 경복궁의 공간구성과 6조대로〉, 〈현륭원의 입지선정과 원침계획에서 정조의 역할〉, 〈18세기 구 수원읍내 주민구성과 주택규모〉 등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서울 다섯 궁궐과 가로에 담긴 이야기

섬이 되어 버린 궁궐|한양의 다섯 궁궐과 가로|놓칠 수 없는 궁궐 앞의 구경거리|

유교도시 한양의 행사|궁궐 앞 가로, 서울을 살피는 또 하나의 키워드


1 경복궁과 육조대로의 탄생

한양 천도와 경복궁 창건

정도 600년 역사의 출발, 한양 천도|개경을 본뜬 궁궐과 종묘, 사직단 건설|창건 당시 경복궁의 공간 구성|유교 이념과 고려 관습이 혼합된 궁궐|임좌병향의 터와 계좌정향의 건물|동서 간선도로의 전통


광화문 건립

한양 성곽 축조와 경복궁 궁성의 건립|약간의 오해|궁성 남문 밖 풍경|황성 없는 궁궐


육조대로 건설

왕자의 난|태종의 한양 환도와 이궁 조성|태종의 관제 개혁|장랑 건설과 육조대로의 탄생


육조대로의 형태

광화문 앞길, 육조대로, 육조가|육조대로의 형태|육조대로변의 관청들


2 세종의 경복궁 전면 수리

경복궁으로 돌아온 세종

세종의 즉위|경복궁 이어|의례 정비|문물제도와 건축의 정비


경복궁의 전면 수리

사대문 수리|동궁 건설|상참 의례와 편전의 개조|강녕전의 수리와 교태전 신축


세종조 건축 기술의 성숙

건축의 독자성 모색|기술자의 국가적 관리|외래 신양식의 채택


광화문의 건축적 위용

광화문 문루의 장엄|숭례문과 광화문|광화문의 월대|광화문의 종과 북


3 육조대로에서 벌어진 행사들

광화문에서 치른 의례

계동대나의|취각령|부묘|문종의 부묘를 치른 단종


칙서 맞이하기

빈번한 사신 왕래|칙서를 맞는 절차|광화문을 지나는 사신 행렬


결채와 채붕

가로의 결채|채붕|산대와 잡희


문무 과거 시험과 광화문

육조대로의 무과 시험|과거 시험의 합격자 발표|광화문 육조거리의 체력 시험


담처럼 모인 구경꾼들

여흥과 관광의 공간|백성들의 상소 장소|한양의 유일한 개방 공간


4 창덕궁과 돈화문 앞길

이궁 창덕궁과 돈화문 앞 장랑

향교동 동편의 이궁|창건 당시 창덕궁 규모|돈화문과 장랑 건설|창덕궁의 궁장과 출입문


17세기 이후 창덕궁의 영역 확대

임진왜란 후의 창덕궁 복구|옛 모습으로 재건된 창덕궁|효종의 마수전 건립과 경추문 신설|숙종의 대보단 설치


비좁은 돈화문 앞길

돈화문의 건축 형태|돈화문에서 파자교까지|돈화문 앞길의 관청


소략해진 돈화문 앞 의례

채붕 설치를 중지시킨 광해군|사라지는 결채|인조 국장의 발인 행렬|파자교까지 늘어선 무과 합격자|돈화문 앞에서 치른 헌부례|노비 문서 소각


5 창경궁과 홍화문 앞길

대비를 위한 창경궁 건립

수강궁에서 창경궁으로|창경궁 홍화문의 등장|통상적인 격식과 다른 창경궁의 전각 구성


17세기 이후의 창경궁

광해군의 창경궁 복구|동궁을 포함한 창경궁의 영역|빈전.혼전으로 활용|경모궁 개건


홍화문 앞길

창경궁의 문|홍화문 앞길의 상황


홍화문 앞길의 행사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사미 행사|목을 길게 늘이고 구경하는 왕세자 입학례|홍화문으로 나가는 국왕의 재궁


6 경희궁과 흥화문 앞길

숙종과 영조가 즐겨 찾은 경희궁

광해군의 경희궁 창건|바위와 숲과 샘이 있는 궁궐|숙종과 영조가 즐긴 경희궁|고종연간의 쇠락


경희궁을 둘러싼 문과 가로

궁장과 출입문|단층으로 지은 흥화문|운종가로 이어진 흥화문 앞길


흥화문 앞길의 행사

흥화문 앞에서 백성들을 만나는 영조|태조와 세조의 초상화 흥화문을 오가다|흥화문을 들어가는 종묘의 27신위|흥화문을 나서는 한 많은 혼령들


7 고종연간의 경복궁과 경운궁

경복궁 중건

조대비의 중건 교지|옛 제도를 따르고 신질서를 반영한 중건 경복궁|궁성과 출입문|후원의 확장


광화문과 육조대로

중건 광화문|종친부․의정부․삼군부의 청사 복구|육조대로의 정비|해치


활기 잃은 육조대로

고종의 잦은 어가 행렬|신정왕후의 국장과 부묘|경무대에서 벌어진 과거 시험


고종의 경운궁 건립

경운궁 이어|경운궁|중화전 건립과 경운궁의 재건|경운궁의 서양식 건물


경운궁의 여러 문과 문 앞 행사

인화문 앞의 고종황제|대안문과 대한문|영성문을 나가는 재궁과 어진


8 우리 곁의 궁궐과 가로

일제 강점기 궁궐의 수난

창경궁에 들어선 식물원과 동물원|전시장으로 전락하는 궁궐|일제 강점기 시가지 계획과 궁궐 가로|경복궁에 들어서는 조선총독부 청사


광복 이후 가로의 확장과 변모

100미터 도로로 확장되는 세종로|지속되는 궁궐의 수난|박물관과 궁궐|철근콘크리트조 광화문 탄생


1980년대 이후 궁궐의 복원과 정비

서울대공원으로 가는 동물들, 제 모습 찾는 창경궁|광복 50년과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 철거|복원되는 경복궁|되살아난 경희궁 터


다섯 궁궐 앞 가로의 현주소

새롭게 복원되는 광화문|광화문 광장에 돌아온 세종|마지막 희망, 돈화문로


에필로그 기억으로 남는 궁궐과 가로

서울에 남은 유교도시의 기억|격변하는 육조대로의 숙명|왕실의 애환을 품은 돈화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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