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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열린 해석의 미학: 양주혜의 사적인 기호 | 김지나

현대미술포럼





열린 해석의 미학: 양주혜의 사적인 기호






‘색점’ 작품들로 잘 알려진 설치미술가 양주혜(1955~)는 점과 선이라는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자신만의 기호를 만들어 작업하는 여성 작가다. 그는 다채로운 점과 선을 소통의 매개로 삼아 평면에서부터 건축까지 매체에 한계를 두지 않고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양주혜는 원래 어려서부터 무용을 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각을 제작하기 위한 공간 속에서의 움직임이 춤과 비슷한 매력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75학번으로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한 양주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짧은 방황의 시간을 뒤로하고 그는 1976년 가을에 홀연히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마르세유-뤼미니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파리 제8대학교 조형예술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양주혜는 오늘날까지 활발히 활동하면서 자신만의 미적 영역을 모색하며 소통을 꾀하고 있다. 

유학은 양주혜의 특징적인 색점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학생활 초기에 불어가 그에게 익숙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교재를 독해할 수조차 없던 당시로서는 글을 쓰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책을 읽은 후 리포트를 작성하는 과제를 받았던 작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알파벳 26자에 임의로 색깔을 정해서 불어책 속 글자를 색연필로 하나씩 하나씩 칠해 지워 나갔고 이를 제출했다. 결국 외국어를 습득해가는 과정에서 체득된 방법론인 색점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소통 방법이었고 이후 중요한 작업의 표현방식이 되었다. 나아가 양주혜는 색점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 한 편을 작성하면 흰색으로 지우고 그 위 색점을 다시 찍는 과정을 일곱 번 반복하여 일주일의 일기를 완성시켰다. 작가는 이를 색점을 활용한 첫 작품이라 말한다. 이렇게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는 기호체계를 만든 그는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조형적 어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색점 작업의 원형이 글쓰기에서부터 비롯된 점을 반영하듯 양주혜는 본인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도 실제 글자를 쓰는 방식과 유사하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처음 글을 배울 때 네모난 칸에 글씨를 적는 것처럼 양주혜는 사용하는 매체에 격자를 그리거나 본래 오브제가 갖는 바둑판 무늬를 활용하여 그 안에 점을 찍는다. 여러 색을 가진 점들의 조합은 원고지 속 문자의 형상을 상기시키며 시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작품에 감성의 개입을 철저히 억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마치 수행을 하듯 어떠한 감정도 배제하고 화면에 여러 겹으로 층층이 물감을 짜고, 바르고, 뭉개고, 또 덧칠하며 그가 겪어온 시간들을 누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색점 작업은 평면에서 설치로, 공간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해 나간다. 또한 양주혜는 캔버스 천보다 일반 천을 더 자주 사용하는데, 손때가 묻어있는 아기포대기, 조각이불, 침대덮개, 수건 등에게도 점들을 부여한다. 결국 그에게 일상의 모든 사물들이 캔버스가 된다. 나무토막, 의자, 치아 모형, 계란판과 같은 생활소품들뿐만 아니라 건물, 기차, 공사장의 가림막까지 점들을 무한히 번식시킬 수 있는 캔버스로 기능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이미지화를 계속 실험하던 양주혜는 도상학적으로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소재를 찾던 중 『반야심경』을 발견하게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도를 설법한 『반야심경』은 총 2백74자의 낱말들을 구심적으로 배열하여 전체 내용을 한 페이지에 담은 짧은 불경이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그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작가는 이 글귀를 처음 접했을 때 5글자가 한 줄로 한 문장을 만들어 53줄이 원형의 형태로 구성된 ‘시각적 형태’부터 인지했다. 그는 이미지와 텍스트라는 두 개의 개념을 완벽하게 하나의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마침내 찾았고, 1998년에 <흔적 지우기>로 시각화했다. 양주혜는 274자의 낱말들을 하나씩 읽어 가며 색점으로 지우고, 투명한 망천 위에 낱개의 글자 단위로서 환원된 274장의 『반야심경』을 부착시켰다. 그 후 거대한 크기의 경전을 만들어 전시장의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수직 구조물을 제작했다. 그의 색점들이 서양의 언어를 지우는 것으로 시작했다면 이제 동양 고유의 글을 지워 나가며 점찍기를 종교적 수행의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나아가 양주혜의 관심은 신라시대의 고승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의 요지를 간결한 시로 축약한 『화엄일승법계도』로 이어졌다. 이 법계도의 210자는 54각이 있는 도인에 합쳐져 표현됐으며, 화엄경의 내용은 기하학적 사각형 소용돌이의 흐름을 따라 읽도록 되어있다. 1) 양주혜는 『화엄일승법계도』 역시 형태적으로 인식하여 전시장으로 들여와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한다. 이 문자 구조를 색점으로 재현한 평면 작품에서부터 입체적인 윤회적 미로 공간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시간의 덫>(1999)에서는 책꽂이들을 칸막이 삼아 통로를 만들어서 관람객들이 책을 보며 따라 돌도록 했고, <空 · 0 · 不>(2000)은 법계도의 선 모양대로 바닥과 벽에 시트지를 붙여 동선을 유도했다. 즉 양주혜는 평면으로 구상된 『화엄일승법계도』의 문자 미로를 입체적으로 재해석하여, 사람들이 직접 체험으로 법전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작품들을 제시하며 새로운 조형성을 모색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양주혜의 작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다. 그는 바코드 선들이 갖는 불균등한 두께가 만들어내는 리듬감에 주목하며 작품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다채로운 색점들에서는 언어를 기호화하고 시간의 추이를 보여줬다면 이제 알록달록한 수직 막대들을 통해 빛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그는 본래 광학적으로 정보가 읽히는 바코드의 성질을 반영하여 빛이 투과하거나 반사할 수 있는 형태로 작품을 제작하고, 흑백 대신에 원색의 직선들과 어떠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불명확한 숫자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상징체계를 완성시켰다. 상품 귀퉁이에 작게 인쇄되어 있을 바코드를 평면 작업으로 혹은 공간 전체로까지 크게 확대시켜, 주변에 너무 만연하게 있어 오히려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이 사회적 약호를 우리들의 시야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빛에 의해 작품 그 자체 혹은 그것이 전시된 물리적인 공간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고 관람자의 눈은 리더기가 되어 양주혜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읽어내게 된다. 나아가 빛이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그림자까지 어우러져 사람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하나의 바코드가 아닌 여러 개의 선이 뒤엉킨 입체적인 새로운 형태의 기호를 스캔하게 된다. 작가는 전시장의 모든 벽면, 바닥 그리고 천장까지 바코드로 뒤덮는 작업까지 선보여 우리가 바코드를 읽는 것인지, 바코드가 우리를 읽는 것인지 모호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색점과 바코드가 양주혜의 작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어휘라면 그의 설치 작업은 관람자와 소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 활동 초기부터 야외 설치는 늘 함께했다. 1989년 힐튼 화랑 개인전, 1989년과 1992년 프랑스 문화원 개인전, 1992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 등에서 건물 정면 전체를 덮는 대형 천위에 색점들을 프린트하여 설치했다. 2) 더불어 아르코미술관 외벽에 2003년에는 여러 개의 수평 띠를, 2005년에는 거대한 바코드를 입혔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외관을 작품화한 작업도 다수 있는데, 바로 공사장의 가림막을 제작한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1990년 여의도 소재 일신방직 사옥 공사 현장 가림막, 1996년 용인 에버랜드 공사 현장 울타리, 2006년 광화문의 복원 현장 가림막을 들 수 있다. 그 외 기차, 마을버스, 옥수역의 콘크리트 교각 기둥과 천장 등을 점 혹은 선으로 포장했다. 양주혜는 이러한 일상에 스민 공공작업을 통해 전시장을 방문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사현장이나 마을버스, 기차, 지하철역을 지나치는 사람들까지도 잠재적 관람자로 만들어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했다.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한 사적인 이유로 본인만의 소통기호를 만들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양주혜는 점과 선이라는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매개로 소박하고 일상적인 물건에서부터 시공에 압도되는 거대한 설치 작업까지 선보이며 표현방법에 한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비록 관람자는 그의 기호들이 함의하고 있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지만 감상하는 데에 있어 내용의 해독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기호가 국가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듯이, 그리고 미술작품 또한 하나의 주제로 완전하게 결정된 것이 아닌 수용자의 시각이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듯이 양주혜의 작품들 역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작가는 소통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국 미술사에서 양주혜에 대한 평가를 보면 때로는 조각이불, 아기 포대기 등의 천 소재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는 그의 여성성이 부각되기도 하고, 또 건물 표면을 덮는 대규모 작품들을 논할 때 크리스토(Christo Vladimirov Javacheff)나 다니엘 뷔랭(Daniel Buren)과 같은 남성 작가들과도 비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재료 혹은 스케일로만 논의하지 않고 성(性)에 무관하게 간결한 상징들을 조형적 장치로 삼아 매체에 한계를 두지 않는 자신만의 소통방법을 구사한 양주혜를 ‘작가’ 자체로서 평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그의 실험정신이 계속해서 한국 미술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기를 기대한다. 



김지나(1988~),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아라리오뮤지엄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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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엄일승법계도』는 화엄경의 내용을 가로 15자, 세로 14자의 큰 사각형으로 배치하고 그 전체를 다시 4개의 소구역으로 나눈 글귀이다. 이 불경을 읽는 사람의 시선은 큰 사각형 중앙의 ‘법(法)’자에서 그 왼쪽으로 기하학적 사각형 소용돌이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여 바로 밑의 ‘불(佛)’자에 이르기까지 도형 전체를 일주한 다음, 그 바로 위에 놓인 최초의 ‘법’자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게 된다. 본 법계도는 이러한 순환을 반복하도록 절묘하게 배치된 형태를 이루고 있다. 

2) 1989년 힐튼 화랑과 프랑스 문화원 개인전에서 건물 외벽을 덮는데 사용된 천, 틀 등은 1988년 9월 다니엘 뷔랭이 프랑스 문화원 건물을 감싼 작품 <통로: 다섯 색의 공간>에서 사용하고 남은 재료를 뷔랭 동의하에 활용한 것이다. 





양주혜, <무제>, 1978, 천위에 아크릴 물감과 실, 110×130cm




양주혜, <무제>, 1990, 비닐에 실크스크린, 5000×7000×1400cm, 일신방직 사옥 신축공사 현장 가림막 설치




양주혜, <코드-바-코드>, 2007, 롤 스크린 위에 프린트,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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