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9) ‘규수’가 아닌 화가, 정찬영 | 김해리

현대미술포럼






(9) ‘규수’가 아닌 화가, 정찬영



전례의 존재는 후속 세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하나의 전형과 모범으로서 귀감이 되며, 불모의 영역으로 나아갈 용기를 북돋는다. 이들을 흔히 선구자나 길잡이라 할 때, 남성 중심적 한국 근대화단에서 여성 최초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동양화부 특선 작가로 자리매김한 정찬영(鄭燦英, 1906∼1988)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찬영은 1929년 <수련>으로 조선미전에 초입선한 이래, 1937년까지 총 4회의 입선과 2회의 특선을 거둔다. 보수적인 동양화단에서 여성 화가는 그 존재만으로 가부장적 현실의 벽을 일정 부분 넘어선 것인데, 더욱이 특선 작가의 지위로 관전(官展)이라는 공적 무대를 누빈 정찬영의 행적은 후대 여성 동양화가의 등장과 등단에 다대한 파급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39년 둘째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공식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을 전면 중단한다. 신문 매체를 통해 화업에 대한 굳은 의지를 여러 차례 내비쳤고, 여성 화가로서 이례적으로 주목받던 그가 돌연 절필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자식을 잃었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비극이 주된 이유지만, 미술계에서 ‘규수’ 화가로 지목되던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

규수 화가란 동양화를 기예로 삼는 기생 출신 여성이 아닌, 부유한 가문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자란 ‘참한’ 여성 화가를 칭한다. 당시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근대적 현모양처론과 결부해 긍정적인 여성의 표상으로 그려졌다. 실제로 규수 화가 타이틀은 남성과 동등한 장에서 겨루어 이긴 정찬영의 문화적 수행을 대중에게 알린 단어이기도 하다. 남성들만의 고유한 영역에서 여성의 존재를 단번에 부각하고 여성의 미술계 진입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이 단어의 생산적인 역할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규수라는 수식어는 여성 미술인의 한계를 규정하는 말이다. 요컨대 규수는 부르주아 계급의 특권과 문화 자본, 성적인 정숙성, 가사와 양육에 대한 충실성을 우선적으로 인증 받은 여성이라는 함의를 내포하며 근본적으로 가부장제와의 타협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규수’를 정찬영의 성장 배경을 암시하는 단어로 보지 않고, 사회적 맥락을 읽어내기 위한 일종의 프리즘으로 상정한다면 근대기 여성 미술인,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성으로서 삶을 파악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 된다. 

평양 태생의 정찬영은 서문고등여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평양 사립 숭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등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1920년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전문직이던 교사였음에도 그는 직업 화가에 대한 열망을 품고 경성 유학길에 오른다. 정찬영은 1925년 경성미술전문학교를 거쳐, 1926년 조선미전 동양화부에서 활약하던 춘천 이영일(春泉 李英一, 1903∼1984)의 화실에 입문한다. 이영일은 “그림 공부하는 사람은 여자가 4∼5인 있는데 그중에서 정찬영양은 매우 유망하다”며 일찍부터 정찬영의 재능을 높게 샀다. 특히 정찬영은 채색화조화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조선미전 입선작에서도 인물화 <소녀>(1935)를 제외한 <수련>(1929), <설중백로>(1930), <여광>(1931), <낙화유금>(1933), <공작>(1937) 등은 모두 채색화조화였다. 이는 분본(紛本)을 활용한 도제식 교육으로 화맥을 구축하는 동양화단의 특성 상, 장식성이 짙은 시조파(四條派)의 화조화 풍격을 일본 유학에서 배우고 돌아온 이영일을 사사했음에 기인한다.  

이영일에게 전수받은 화풍을 토대로, 정찬영은 주로 <여광>(1931), <공작>(1937)과 같이 공작의 화려한 자태를 사생에 근거해 그려내곤 했다. 또한 그는 일본 화단에서 유행했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금계(金鷄)를 소재로 <낙화유금>(1933)을 제작해 조선미전에 입선한다. 정찬영에 의해 처음 조선미전에 등장한 제재인 금계는 황금색의 호화로운 우관으로 화면을 아름답게 구획할 수 있어 장식적인 표현에 용이했다. 뛰어난 묘사력과 화미한 운치가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일본에서 시작해 동아시아로 확대된 공필채색화 유행의 자장 속에 정찬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비록 피식민지 미술인으로서 지배 문화를 받아들이는 상황일지라도, 근대기 동아시아에 점진 확산된 미술 동향에 여성 화가 정찬영이 맞닿아 있음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조선미전 입선작 중 유일한 인물화이자 창덕궁상을 수상한 <소녀>(1935)는 할미꽃이 소담히 핀 풀밭에 한 소녀가 쪼그려 앉아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김용준(金瑢, 1904∼1967)은 1935년 말 조선미전을 돌이켜보며 정찬영의 <소녀>에 대해 “조선의 공기가 가득 차고 조선의 풀향기가 떠돈다”고 추켜세웠다. 이 그림은 1930년대 국내 화단의 주요 화두였던 향토색 담론이 정찬영의 작업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역으로 향토색 논의를 치열하게 주고받던 남성 화가들과 같은 지평을 공유하려는 정찬영의 시도이기도 하다.

한편, 국내파 서양화가로 미술 비평을 겸하던 김종태(金鍾泰, 1906∼1935)는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가련한 소녀가 조선의 민족성 내지 향토성을 표방하고 미전회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대단한 인기와 선전을 얻은 이상, 필자가 이제 새삼스럽게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규수 작가가 적은 조선에서는 무조건으로 씨의 존재를 존경하는 바.” 김종태 역시 그림에서 향토성을 포착하지만 그보다도 몇 없는 ‘규수’ 작가로서 인기를 얻은 정찬영의 상황에 주목할 뿐 진지한 태도로 작품을 대하지 않는 듯 보인다. 즉 화조화와 인물화로 조선미전에서 빼어난 성적을 거뒀음에도, ‘규수’라는 이름 아래 그의 행보를 평면화한 것이다. 비단 김종태 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평론들은 정찬영의 용모, 말투, 태도를 작품 자체보다 상세히 전하며, 무엇보다 부인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다하며 ‘취미’에도 힘쓰는 규수 화가로 집중 조명한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 정찬영이 경성약학전문학교 교수였던 식물학자 도봉섭과 결혼한 이후 더욱 강화된다. 1931년 동아일보의 한 기자는 정찬영의 <여광>에 대해 결혼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시작한 작품이니 ‘신혼 기념 제작품’이라 하며, “씨의 이야기 소리는 은방울 소리와 같이 서늘하고 보드라웠으며 기자를 쳐다보는 매력 있는 그 눈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넘치는 애교를 자아”낸다고 덧붙인다. 이에 대해 정찬영은 “글쎄 그 작품만치 애태운 것은 없었어요. 원체 시일이 짧았답니다. 갑자기 혼인을 하게 된 후 출품할 시기는 가깝고 해서 화제를 택하기가 무섭게 사생과 제작하기에 얼마나 피곤을 느끼었는지 모릅니다. 사생할 동안 창경원 속 공작새 우리 앞에서 사람은 모여서고 땀도 많이 흘리었습니다. (···) 남들은 여자는 남자보다 더- 결혼 후 자기의 취미를 곱게 살리기 어렵다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전에 몇 갑절 그림에 정력을 기울이어 보려 할 뿐입니다. 물론 그 분도 대찬성하신답니다.”라는 말로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작품 제작에 매진할 의지를 내비친다.

1933년 『신가정』은 「서화협회-조선미전에 출품하는 여류화가들, 동양화가 정찬영씨」 기사를 실었다. 결혼과 창작 생활에 관해 묻는 기자에게 정찬영은 “결혼 전에는 그야말로 그림에 전심전력이었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살림이 복잡해지고 애기까지 있고 보니 삭갈려서 도무지 열중되지 않습니다. 창경원에 가서 새를 그리다가도, 눈 위로 시계 바늘만 뵈면 벌써 그림 생각은 십리 만리 달아나고 애기 생각 살림 생각이 뛰어오는군요. (···) 공연한 것을 시작했다고 혼자 후회도 해봅니다. 참말이지 밤이면 밤잠도 못 자고 애쓰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살림이 외국같이 좀 간편했으면!”이라며 작품 활동과 양육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밝힌다. 1937년 윤성상이라는 필자는 「여류인물평 규수화가 정찬영론」을 기고하며 “분주한 부군의 내조와 세 애기의 어머니인 망중에서도 화필에의 정진을 조금도 게을리 않으신다는 그 정성과 노력”에 주목한다. 이처럼 정찬영은 규수 화가로 명명되며, 그의 가정생활은 꾸준히 신문지상에 전시된다. 

그의 내밀한 사색이 담긴 일기장에서도 예술가와 현모양처로 맞부딪힌 번뇌가 느껴진다. 정찬영은 1935년 1월 1일 새해 첫 날을 맞으며 “1년 간 의무와 인간으로서 진행할 건전한 책임은 크다. 먼저, 첫 번째 내 심신 건강에 힘쓸 것. 두 번째 금년도에는 예술에 정신을 다하여 제작하여 볼 것. 세 번째 가정 평화 토대를 튼튼히 잡아 잘 처리하여 나갈 것”이라 다짐한다. 또 그의 일기 속엔 ‘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을까’라는 고뇌 섞인 어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는 규수 화가로 불리지만 완전히 규수일수도, 화가일수도 없는 심리적 불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주류에 편입하지 못 하고 늘 육아에 대한 부채를 안고 있는 타자화된 존재, 종순현량을 전제로 하기에 결국 자기 소멸함으로써 가치를 인정받는 존재, 그것이 정찬영을 꾸며주는 규수 화가란 단어였던 것이다. 

1939년 정찬영은 공식적인 화단 활동을 종료한다. 직업 화가의 삶은 중단되지만 그는 가정 내에서 남편 도봉섭의 저술 『조선식물도설-유독식물편』을 위해 식물세밀화 48점을 제작한다. 치밀한 관찰에 기초해 작품을 그려온 이전의 재능을 살려, 투명하고 가벼운 표현으로 줄기, 이파리, 꽃잎, 뿌리에 보이는 식물의 특징을 명료하게 잡아낸다. 글의 이해를 돕는 삽화를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기에 이전만큼 장식적인 기법으로 화려한 조형미를 구현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정찬영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도 미술인의 삶을 지속한 사실에 주목된다. 이후 그는 미술 교사로 제자를 양성하며 생의 말미에까지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규수 화가, 이는 주변에서 정찬영을 소개하는 말인 동시에 스스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만든 단어다. 공식적인 지대에서 그의 활약은 사그라들지만, 시대가 규정한 틀을 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 또 후세대 여성 미술인의 탄생에 문을 열어준 화가로 정찬영은 우리 미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화단에서 가정으로 축소된 활동 반경은 한국 근대미술사 서술에서 정찬영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선택을 사회적 맥락에서 헤아려보고, 그의 작품 세계를 다시금 호명하는 일은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전래되어온 한국 근대 미술사에 틈을 내고, 여성 미술인의 존재를 침륜시키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김해리(199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아트인컬처 기자



ㅡㅡㅡㅡㅡ


정찬영, <공작>, 1937, 비단에 채색, 154×232.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찬영, <금계유중>, 1933, 비단에 채색, 98.8×38.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찬영, <낙화유금 초본>, 1933, 종이에 채색, 111×15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찬영, <한국산유독식물(찔래나무, 서울귀동나무, 노박덩굴, 참빗살나무)>, 1940년대, 
종이에 채색, 107×7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