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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혜석의 자화상 들여다보기 | 김현숙

현대미술포럼







나혜석의 <자화상> 들여다보기


1. 마주하며
나혜석(1896∼1948)의 <자화상>과 마주하기. 그것은 나혜석이라는 인물의 불꽃같은 삶, 열정, 의지, 그리고 추락에 이르는 순간들과 통째로 부딪히는 것과 같다. 양식상 혁명적이라거나 표현과 상징의 결이 극도로 섬세 혹은 광폭하여 보는 이의 영혼이 한 순간에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은 류의 얘기가 아니라 ‘나혜석’이라는 한 여인의 존재 자체가 그토록 강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고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세상에 왜 양부현부(良夫賢夫)는 없는가?”라고 당당하게 비판하며 “이 세상에서 내 몸이 제일 소중하다”고 말하는 여자,1) 인류의 반이 여자이며 여자도 인간이라는 신념에 따라 행했고, 침묵하지 않고 발언하는 발화자였다는 이유로 가족과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쫓겨난 한 존재와 마주하는 일이다.  

나혜석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이 여인 초상은 나혜석 작품 중에서 서너 점 정도밖에 되지 않은 진작에 속한다. 생전에 300점 이상의 작품을 제작했을 것으로 조사되고 현재 시중에 나혜석 작품으로 거론되는 것이 30여점 정도이지만 진품으로 확정할 수 있는 작품은 매우 희소한데 이 여인초상이 그 중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을 마주하며 들여다보기란 나혜석의 화풍을 파악하는 많지 않은 길을 걷는 일이 된다. 동시에 이 여인 초상화가 나혜석의 <자화상>일진대 그림 속의 여인과 마주하기란 곧 나혜석의 삶과 사상과의 대면이 될 것이다. 

2. 들여다보기
어두운 암청색 계열의 의상을 입은 정면시의 여인 좌상. 쌍꺼풀 없는 눈은 진한 화장 탓인지 다소 커 보이고, 서양인 같이 길고 높은 콧대와 큰 광대뼈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로로 굳게 닫힌 입은 고집스러운 인상을 준다. 20세기 초의 한국여인을 그린 것이라면 중단발에 C컬을 하여 볼륨을 넣은 머리 스타일하며 양장으로 미루어 모델은 지식인 신여성이 확실하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민자 브이넥 원피스의 단조로움이 목 라인과 앞섶에 덧댄 넓은 회색 단으로 인해 해소되기는 하였지만 목걸이, 반지 같은 장식이나 치장이 전혀 없어 어두운 화면 위 하얀 얼굴로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수직으로 하강하는 코 라인에서부터 뾰족한 하관으로 이어지는 직선이 브이넥 밑점에 모인다. 이어서 상의 앞섶의 회색 라인을 타고 내려가 큼지막한 두 손에 다다르면 화면은 좌우로 이분된다. 안정감 있게 위치한 여인의 몸은 굵은 나무통 같은 덩어리 형태인데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초점이 풀린 눈동자에 흐린 눈빛, 긴 얼굴과 긴 코, 가로로 긴 입. 이처럼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의 여인상은 나혜석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다. 

화가 생전에 자신의 <자화상>에 대해 언급한 바 없으므로 이 작품이 ‘자화상’이라 명해진 내역이 확실하지는 않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과 골격이 서구적이라는 이유로 1927년에서 1928년 사이 유럽 여행 중에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도 있다. 2) 그럼에도 나혜석의 <자화상>으로 여전히 호칭되는 이유는 작품의 오랜 소장자인 유족의 주장에 기인한 점이 크다. 3) 나혜석의 아들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는 나혜석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을 정도로 모친을 거부했지만 가슴에 사무친 한과 그리움은 밖으로 표출되지 못할수록 깊어지는 법이어서 이토록 강인하면서도 슬픈 눈의 여인상이 충분히 어머니 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유족이 나혜석의 자화상을 소장하게 된 경위는 매우 드라마틱하다. 마곡사, 해인사 등지를 떠돌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의 집에 유화 10여점과 화구 등을 보관해달라고 맡겼다. 본인 작품 중에 추려서 맡겼을 것이며 이 중에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혜석은 1948년에 행려병자로 사망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1950년 전쟁이 나자 나경석 가족은 이 그림들을 돌돌 말아서 다락방에 넣어놓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3년 후 돌아와 보니 다락 안에 둔 그림들이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으나 묘하게 막내아들 김건이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 내막은 피난 중에 김건을 찾아온 한 남성에서 시작한다. 어떤 연유로 다락방의 그림을 확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남성은 나혜석의 두 작품을 들고 와 매입을 권하였다고 한다. 피난 시절이어서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며칠 후 그가 다시 와서는 “이 그림들은 당신이 가져야 하니 가지라”며 두고 가버렸다는 것이다.4) 나경석의 집에서 그림을 가져간 자와 그가 동일인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나혜석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던 듯하다. 이 두 초상화가 흩어지지 않고 가족에게 돌아온 사건에서 왠지 나혜석의 강인한 영적 힘이 느껴지는 건 비단 나 혼자만일까.

사실 젖먹이 때 부모가 이혼하고 모친과의 접견이 완강하게 차단되었기 때문에 막내아들 김건의 기억 속에 어머니 나혜석의 모습은 부재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이유로 이 여인 초상을 나혜석의 자화상으로 여긴 것일까. 혹시 그림을 들고 나타난 이로부터 어떤 언질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지.

3. 흑백 사진 속의 나혜석과 <자화상>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변호사 김우영의 결혼식은 신문 광고로 경성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서울에서 개최된 유화 개인전에 쏟아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이후 오랜 동안 나혜석을 따라다녔다. 당시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부부 세계일주, 조선미술전람회 수상, 이혼, 이혼고백서 발표, 위자료 청구소송 등으로 나혜석은 경성의 스캔들 메이커가 되어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일반인으로는 꽤 많은 사진이 찍혀 매스컴을 탄 덕택에 생전의 모습이 시기별로 남아있는 편인데, 유럽 여행 중 혹은 그 직후의 사진 속 나혜석의 모습은 <자화상>과 어느 정도 유사할까.     

첫 번째 사진은 유럽 여행을 떠나기 직전인 1927년에 찍은 것으로 5) 단발을 하지 않은 상태로 한복을 입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머리 아래 부위에 C컬을 넣은 중단발로 <자화상>과 유사한 헤어스타일이다. 마지막 사진은 단발에 넥타이를 맨 파리 시절의 얼굴이다. 나혜석은 하얼빈에서 모스크바행 기차를 타고 파리로 직행했는데 하얼빈에서 단발을 단행하였다. 1929년 귀국 후에는 다시 장발 상태였다가 이혼 후의 사진에서는 단발 모습이다. 촬영 연대가 크게 차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편차가 크지만 긴 얼굴형, 큰 광대뼈. 가로로 길고 아래 입술이 도톰한 입매는 그림 속 인물과 유사하다. 쌍꺼풀 없는 큰 눈과 길고 코뿌리가 높은 코도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던 나혜석에게 진한 화장을 시도해본다면 사진의 모습에 가까워질 것 같다. 

한편 <자화상>의 뾰족한 턱선에 비해서 사진 속 나혜석의 턱은 둥글고 부드러운 편이며 그림 속 여인의 코뿌리가 높고 긴 반면에 사진 속 나혜석의 경우는 좀 더 낮다. 그러나 조선미전 출품작으로 구라파 여행에서 귀국한 이후 제작된 인물화 <아이들>(조선미전 9회 출품작, 1930)과 <소녀>(조선미전 11회 출품작, 1932)는 분명 한국인 소녀를 모델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뿌리가 높고 콧등 한 쪽에 진한 음영을 넣었으며 V자형 뾰족한 턱선을 하고 있다. <자화상>의 높고 긴 코와 날카로운 턱선은 1930년대 초반 나혜석 인물화에서 발견되는 특징과 일치하므로 모델이 한국 여인일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고 하겠다.  
 
나혜석은 이 여인 초상화에 특히 애착을 느꼈던 듯하다. ‘HR’ 사인의 외곽에 배경색보다 한 단계 밝은 색으로 사각형 공간을 마련해서 마치 인장 같은 효과를 시도한 점, 친정에 보관을 부탁했던 10여점의 작품 속에 이 그림이 포함된 점이 그러하다. 이 그림이 나혜석의 자화상일 확률을 높여주는 요소로 화가가 특별히 애착을 가진 작품이라는 점과 함께 그림 속 ‘혜석’이라는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면 우측 하단에는 나혜석 특유의 ‘HR’ 사인이 있고, 오른손 팔꿈치 부근 엉덩이 굴곡선을 따라 ‘혜석’이라는 한글이 또렷한 필치로 적혀있다. ‘HR’ 사인의 색이 주황색에 가깝다면 ‘혜석’ 글자는 그보다 어두운 팥죽색으로 검은 배경 속에서 튀지 않도록 조절되었으나 여인의 두 손이 ‘혜석’ 글자 쪽에 위치해 있고 왼손은 이 글자를 가리키고 있다.

나혜석의 주 종목은 풍경화이고 인물화는 유럽 여행 이후부터 등장하는데,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인 <아이들>, <소녀> 등 인물화에는 ‘HR’ 사인 외에 ‘혜석’이라는 글자를 넣은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더욱 풍경화에서 이런 경우는 없다. 유독 이 여인 초상에만 사인과 별개로 이름을 명확하게 기입한 것은 자화상의 표식으로서가 아니었을까. 
  
4. 멜랑콜리를 넘어
깊은 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붓을 움직이는 나혜석을 상상해 본다. 초점을 잃은 망연한 눈빛과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듯 힘이 들어간 입술을 살핀다. 인물을 전면으로 밀어내는 어두운 배경 또한 나혜석에게 모질었던 시대를 닮은 듯하다. 과연 이 여인이 여성 투사로 우리에게 각인된 나혜석이란 말인가. 다시 생각하니 비명처럼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치고 “세상의 모든 조소와 질책을 감수하면서 이 십자가를 등지고 묵묵히 나아가”겠다는 6) 다짐을 하기까지 어찌 깊은 고뇌와 우울 없었겠는가 싶다. 

작품 제작연도를 ‘1928년’ 혹은 ‘1928년경’으로 기재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구적 외모의 여인 초상이라는 인상에만 근거하여 구라파 시기 제작으로 상정한 연도이므로 수정이 불가피하다. 단발머리에 넥타이를 한 발랄한 패션의 나혜석은 서양의 문물과 문화를 접하고 배우면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던,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을 대변한다. <자화상>의 멜랑콜리와는 다른 국면인 것이다. 더욱이 침울하고 어두운 <자화상>의 색조는 김주경이 1930년 제9회 조선미전의 출품작에 대해 “남성적 기세”는 여전히 남아있으나 “옛날에 보이지 않던 침울한 색”이 먼저 인상에 들었다고 썼듯이 7) 귀국 이후의 변화를 대표하는 특징이다. 이러한 제반 상황으로 볼 때 <자화상>은 이혼의 파경을 겪은 후 여자미술학사를 개설하고 작업에 매진하던 1933년 전후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한편 역삼각형의 강인한 광대뼈와 넓고 안정감 있는 몸통은 멜랑콜리에 전염되지 않을, 꺾이지 않는 이념의 단단함으로 다가온다. 이혼이라는 파경을 극복하기 위해 분연이 일어서서 전람회를 개획하며 제작으로 분주했고, 경제적 자립을 꾀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작품을 판매했으며 여자미술학교 운영을 추진하기까지의 굳건함 말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큰아들이 사망하고, 화재로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는 등 악재가 연이었으며 개인전에 대한 사회의 무반응도 감내해야 했다. 이 모든 재난이 결집되어 건강 악화를 불러왔으니 각박한 운명의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인가. 자유로운 예술가의 영혼을 흠모하며 여성운동가로서의 미래를 설계했던 행동적 지성인 나혜석의 시간은 막의 뒤편으로 증발하듯 사라지고 말았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고 했던 나혜석의 확신은 그로부터 반세기 경 후에 예언처럼 실현되었다. 오늘 이 땅의 여성들이 누리게 된 좀 더 인간다운 삶, 양성 평등과 자유를 향한 동력은 나혜석의 <자화상>에 흐르는 멜랑콜리의 맥에 연원하고 있음을 기억할 것이라.



김현숙(1958∼),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KISO미술연구소장, 고려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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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류부인과 산아제한」, 『삼천리』, 제8호, 1930. 9. 1.
2)  윤범모, 「화가 나혜석의 특성과 전칭 작품의 문제」, 『나는 나혜석이다』, 수원박물관, 2011, p. 227.
3)  나혜석의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을 미술관에 기증하라는 김건(金建, 1929~2015)의 유언에 의해서 두 작품은 현재 수원시아이파크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4) 「인터뷰-나혜석 조카 나희균, 그녀는 기억한다」, 『중부일보』 , 2012. 3. 21.
5) 나혜석의 후원자인 야나기하라 기쓰베(柳原吉兵衛) 부부가 부산에 와서 찍은 사진이다. 
6) 나혜석, 「이혼고백서」, 『삼천리』, 8~9월호, 1934.
7) 김주경, 「제9회 조선미전」, 『별건곤』, 제30호, 1930. 7. 1.




나혜석, <자화상>, 1928(추정), 캔버스에 유채, 88×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1927년의 나혜석



1930년 전후의 나혜석



1927~28년경의 나혜석



나혜석, <아이들>, 1930, 조선미전 9회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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