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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평론 | 얼의 무늬 - 김상표

김종길

얼의 무늬
- 김상표의 ‘얼굴성’을 위한 9개의 아포리즘


“오랫동안 나는 펜을 칼처럼 생각했다.
이제야 나는 우리의 무기력함을 알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책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


“붓을 칼처럼 휘두르며 발작적으로 그림그리기를 하는 나를 발견했다.”
-  김상표



이미지의 역사는 문자보다 오래다. 말의 상상을 덧대어 이미지는 생성되었고, 초상은 그 이미지들 사이에서 잉태되었다. 동굴벽화와 암각화에 새긴 초상은 날 것이어서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그 초상은 단순하고 소박해서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 이제 회화는 극사실주의에서 표현주의는 물론, 개념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한계를 갖지 않는다. 김상표의 초상화는 그 무경계의 어디쯤에서 시작된 듯하다. 그는 시작과 함께 곧장 작품을 쏟아 냈으므로 시간의 연대기로 작가론/작품론을 구성하는 것은 부질없다. 또 미술의 형식을 학습한 적이 없어서 미술사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도 맞지 않아 보인다. 그는 그동안 제작하고 발표한 작품 이미지들을 보내왔고, 스스로 궁구하고 있는 ‘얼굴성’이란 글도 첨부했다. 그와 한 번 만났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 끝에 아홉 개의 열쇠 말을 뽑아서 아포리즘 평론을 구성했다. 이 열쇠 말들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잇고 보완하는 김상표 회화론의 알고리즘이라 할 것이다. 각각의 아포리즘마다 그의 글을 붙였다.



1. 얼빛 자화상


불현듯, 아니 느닷없이 그는 붓을 들어 자기 존재의 페르소나(persona)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얼굴, 페르소나를. 그러면서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스스로의 언명을 외쳤다. 그는 제나(ego)를 벗고 얼나[眞我]를 회화로 궁리했다. 그림이 시작되자 마음의 깊은 우물에서 ‘나’의 얼빛이 솟구쳤다. “지극한 기운이여 내 안에 지피소서(至氣今至)” 마음속 얼빛 모신 자리가 밝달이었다. 얼빛 어린 얼굴이 너른 밝달에 솟았는데, 거기 ‘참나’가 있었다. 그는 ‘참나’를 붙잡았다. 그의 자화상(自畵像)은 그렇게 탄생했다. 배우고 익혀서 시나브로 깨달아 그린 게 아니라, 당돌하게도 바로 들어갔다. 지금, 여기, 얼빛 밝은 참나가 섰는데 무얼 고민한단 말인가! 그 실체를 엿보았는데 성긴 붓질이 무어 대수란 말인가! 그는 마치 맨몸으로 뛰어들 듯 붓을 들고 캔버스로 달려들었다. 캔버스는 광야였다.


“본질에 대한 갈증으로 철학에 매달렸지만, 그래도 해소되지 않고 가슴에 얹혀 있는 무엇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절집 언저리를 서성이며 살아온 ‘나’,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그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2. 정신의 실체


‘나’를 회화로 온전히 모시기 위해서는 지극히 묘사하되(形似) 정신을 파고들어야 한다(神似). 정신이 닮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傳神寫照). 옛사람들은 얼굴의 묘사로 정신을 드러냈으나 그는 묘사의 기술을 학습한 바 없었다. 그는 회화에 길들여진 적이 없다. 붓을 든 순간 그의 회화는 야생의 사고로 치달았다. 수시로 변화하는 얼굴과 그 얼굴 뒤의 어떤 근본적인 내적 형상은 ‘잘 그리기[익힌 것]’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표현하기[날것]’에 있었다. 그의 집요한 그리기는 그래서 야생의 회화였고 날것의 구조로 드러난 ‘정신의 실체’였다. 그의 회화에서 때때로 어떤 프리미티비즘적인 이미지가 이글거리거나 거친 붓의 소란을 엿보는 것은 그런 이유일 테다. 그것이 창조성의 발현이다. 현대미술이 모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원시미술은 은유에 뿌리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는 초상의 동일한 주체인 ‘나’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동안에도 그 스스로를 모방하지 않는다.


“내 안에 우글거리는 자아들, 그런 수많은 놈이 그냥 계속 야생적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날것으로 말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퇴화하지 않고 내 안에 살고 있거든요.”



3. 마음우물


나르키소스는 물면[거울]에 되비친 얼굴에 빠졌으나 김상표의 얼굴은 심연(深淵/마음우물)에서 솟났다. 물에 어려서 되비친 얼굴은 껍데기다. 마음우물에서 솟난 얼굴은 ‘속알(persona)’이다. 내 속의 씨알이다. 씨알을 엿보는 것이 중요하다. 윤동주는 「자화상」에서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고 했다. 또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되비치고 솟난 ‘한 사나이’의 얼굴을 그리며 성찰한다. 초상이란 그렇게 되비치고 솟난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기화(氣化)되었을 때 온전해진다(內有神靈 外有氣化). 얼을 담은 골(骨), 얼골, 얼굴. 김상표는 얼에 기대어 숱한 형(形)의 모양을 따졌다. ‘얼나’를 쫓아 본성의 그릇인 얼굴에 가닿는 ‘그리기’의 여정을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리는 ‘얼나’를 회화로 모시는 과정이었으리라(侍天主).
   
“구체적인 형상이 그림에 나타났을 때는 하나의 규정성만으로 특정되는 얼굴이 진짜 얼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같은 나선형 궤적의 마법에 걸려들어 양 극단을 오가며 저 멀리 발산되어 갔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또 있음이기도 하고 없음이기도 하다.”



4. 얼의 무늬


시간은 몸에 무늬/결을 새긴다. 얼굴은 가장 진실한 몸의 나이테다. 초상화는 얼굴에 새긴 시간의 무늬를 몽타주 하는 것이며, 수십 개 가면의 변검(變瞼)에 가린 ‘무늬의 진면목’을 불러내는 것이다. 김상표는 그동안 얼굴만을 그렸고 특히 자화상에 집중했다. 스스로 그리는 스스로의 형상은 카오스다. 미궁이다. 나(화가)와 너(모델) 사이의 간격이 없어서 무늬를 확인하기 어렵고 어딘가에 되비친 모습은 좌우가 달라서 뒤틀리기에 십상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눈을 감고 마음을 뜨는 것이었다. 보지 않아야 잘 보였으므로. 마음눈은 깨우기 어려우나 한 번 깨워서 뜨면 안팎이 환하다. 우리 안에 잠재된 생명과 영혼, 우주 에너지는 똘똘 감겨있다[Kundalini/산스크리트어]. 위아래로 쉼 없이 회오리치면서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것이 멈추면 죽는다. 무늬로 새긴 그의 초상들이 붓춤을 추듯 현란한 것은 바로 그 회오리, 쿤달리니 때문이다.


“행위로서의 회화와 결과로서의 회화와 나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이 셋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글을 쓰고 칼을 휘두르고 몸을 그리고 마침내 붓을 쥐어 든 내가 쉬지 않고 겨냥할 ‘거기’이다.”(양효실)



5. 구토


소갈머리가 없으면 얼간이다. 얼이 빠져나갔다. 얼빛이 꺼져서 껍데기만 남았다. 그 빈껍데기에 쌓이는 것이 그늘이다. 탐욕이다. 잿더미다. 불씨 하나 찾을 수 없는 암흑이다. 삶도 죽음도 그 안에선 무의미하다. 마음보마저 말랐으니 본성의 씨알 하나 심을 수 없다. 초상을 그리는 것은 그런 그늘로 파고드는 것이다. 깊이 파고들어 탐욕을 뒤집고 잿더미를 흩으려 속을 완전히 배배 꼬아서 토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오장육부를 뒤틀어서 검붉은 핏빛 소갈머리의 허상을 토해내야 한다. 김상표의 몇몇 초상들은 거짓 없이 토해낸 어두운 실존의 일그러진 형상이다. 샤먼의 청동거울에 비친 민낯의 투명한 속내다. 사실 예술은 때로 황폐의 공간이고, 미술은 그런 폐허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그의 초상화들은 회화의 근대성이 쌓아 올렸던 미학의 이념 더미를 태우고 그 더미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준다. 아카데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초상들은 역설적으로 그 잿더미에서 피어 올린 작은 불씨인지 모른다.


“내 안에서 우글거렸던 수많은 애벌레 주체들이 하나씩 토해지기 시작했다. 존재가 내 몸을 빌려 열리고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토록 채워지지 않던 결여의 공간에 드디어 충만함이 자리 잡기 시작했나 보다.”



6. 가난한 자


영혼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영혼이 가난한 자의 미학은 풍요롭다. 얼굴에 깃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로 가난하지 못하니 복이 없다. 얼굴에 깃든 아내의 아들의 친구의 학생의 얼굴들로 가난하지 못하다. 가난은 굶주림일 터. 예수가 광야에서 굶주렸고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굶주렸다. 굶주림 끝에서 그들은 진리를 깨달았다. 그들의 굶주림은 육체의 굶주림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숱한 마귀들을 잠재우고 선정에 들었다. 예수는 숱한 유혹을 물리쳤다. 그 ‘숱한 마귀’는 내 안의 여러 얼굴이다. 내 안의 괴물들이다. 유령들이다. 그것을 비우고 잠재워야 진리에 가 닿을 터. 남편의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로 아들의 얼굴로 스승의 얼굴로 친구의 얼굴로 새겨진 얼굴의 무늬는 사실이고 한 삶의 역사이나, 오롯한 ‘나’ 자신은 아닐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얼굴의 얼굴들을 그려내는 것. 그려서 비워내는 것. 바로 그것이 현재 김상표가 수행하는 방식이다.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고 불교의 법명은 여연이에요.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어떤 기억이나 아픔들이 다 이 그림에 담겨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살아온, 또 전생의 업들을 다 토해낸 것 같은 느낌이랄까.”



7. 환(幻)


예술의 몸은 예(藝)가 본래 뜻하는 ‘심다 ․ 기예 ․ 궁극’의 생태적[심다], 창조적[기예], 철학적[궁극] 환(幻)의 술수(術數)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미학적 화두로 이뤄져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이란 ‘예’의 생태성 ․ 창조성 ․ 철학성이 ‘술수’로 드러나는 실체적 환(幻)이라고 할 수 있다. 술수와 환의 사유는 도교의 방술[方術:방사(方士)가 행하는 신선의 술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옛 중국에서는 선인(仙人), 방사, 술사를 모두 진인(眞人)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서구 모더니즘의 유입으로 동아시아의 예술은 ‘예’만 강조하고 ‘술/술수’는 괴이하게 생각하거나 미신 따위로 몰아버리는, 그러니까 유물론으로서 ‘작품’이라는 ‘예’의 물성에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초현실과 비현실의 샤먼 미학은 완전히 저급하고 저속한 것 따위의 문화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술’이 없이 어떻게 작품의 판타지가 가능하고 영적 교감이 가능할 것인가? 김상표의 회화는 환(幻)의 술수(術數)로 가득하다. 물성 너머의 판타지를 보아야 한다.


“물성을 통제한 후부터는 내 안의 자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어요. 얘네들이 튀어나오면서부터 제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어요. 숨을 쉬기 시작했어요. 뭐라 할까? 아름다움에 의해서 인간이 치유되고 구원될 수 있다는 것, 예술과 종교가 하나 될 수 있다는 것, 예술철학을 공부할 때 어려웠던 테제들이 체험적으로 이해가 됐어요.”



8. 너/나, 우리, 서로주체


어제, 오늘, 아제(來日)에서 어제는 과거, 오늘은 현재, 아제는 미래 시제를 갖는다. ‘ㅓ’와 ‘ㅏ’에 시제가 있다는 사실. 어제처럼 ‘너’는 과거요, 아제처럼 ‘나’는 미래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어제가 아제의 과거이듯이 ‘너’는 ‘나’의 과거다. 아제가 어제의 미래이듯이 ‘나’는 ‘너’의 미래다. 우리말에서 ‘너나’는 구분되어서 말할 수 없는 연속 시제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을 쓴다. 너의 눈, 나의 눈에 서로가 어려 있는 모습을 ‘눈부처’라고 한다. 내 눈 속의 네가 나의 부처인 것처럼, 네 눈 속의 내가 너의 부처이니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의 부처인 셈이다. 이렇듯 너와 나, 나와 너라는 우리는 ‘서로주체’의 상징성을 갖는다. 철학자 김상봉은 이것을 ‘서로주체성’이라고 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만남’이다. 김상표의 초상은 ‘너/나’를 하나의 시선으로 그린 것이다. 내 안에 과거 현재 미래로 존재하는 얼굴들의 서로주체와 만났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를 그린다는 것은 사실 너를 보는 것이고 너를 만나는 것이며 나와 너의 관계를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적 실존을 마주하는 문제이잖아요. 사회적 실존을 마주한다 할지라도 제 안에 있는 나,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를 응시하는 또 다른 자기를 갖고 있잖아요.”



9. 미륵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을 ‘기화’라고 하고 또 ‘운화(運化)’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말의 뿌리는 혜강 최한기(崔漢綺, 1803~1879)의 기학(氣學)에서 온 것이다. 그는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기(氣)로 보았다. 우주에 가득 찬 바로 그 기가 끊임없이 활동운화, 즉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를 ‘천지지기’, ‘운화지기’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또 그 기는 모든 존재의 형체와 질료를 이루고 있는 것이어서 ‘형질지기’라고도 하는데, 정리하면 “기학의 핵심은 만물의 근원적 존재이자 인간과 만물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 기운인 운화기(運化氣)의 활동운화(活動運化)다. 활동운화란 살아 있는 기가 항상 움직이고 두루 돌아 크게 변화하는 것이다.(『신기통』)” 미륵은 미르에서 왔고 미르는 ‘용(龍)’의 순우리말이다. 김상표의 회화에서 주목할 것 중의 하나는 ‘나’의 술수적 변태로서의 자화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가 미륵을 그리면서 ‘미륵자화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미륵’과 ‘나’를 서로 빗대어 마주 보게 한 것인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의 표현대로 광대무변의 실체를 그리기 위해서일 터이다.
   
“미륵 그림에 와서는 반추상 형태로 바뀐 거예요. 거기다가 미륵의 뒷모습을 그리면서부터는 저도 놀랍게도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로 급격히 진행한 겁니다. … 어쩌면 미륵이라는 것이 결국 민중들의 수많은 아픔을 다 담아내야 하고 소망을 품어내야 하니까 광대무변한 모습으로 그려져야 되잖아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그려지면서 결과적으로 미륵자화상의 앞뒤 모습이 형태적으로도 닮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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