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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평론 | 류연복 / 칼의 노래

김종길

칼의 노래
- 류연복의 판화미학



목판의 미학은 칼맛에 있다. 칼은 ‘살림’과 ‘죽임’의 두 면을 하나로 가진 도구다. 목판은 죽은 나무로 ‘살림’을 얻는, 그러니까 죽은 것과 산 것의 의미로 합집합을 이루는 미학적 수행이다. 그것은 목판이 가지는 여러 의미들 중 하나이겠지만, 오랜 역사를 살피면 그 사실은 명확해 진다.


칼이 목판을 위한 도구로 처음 쓰였을 때부터 칼의 생(生)과 사(死)는 그림이 되고 문자가 되고, 그래서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문화를 형성했다. 그 목판의 힘은 칼끝, 칼끝의 숨결에서 터졌다. 


어두운 근대를 거쳐 온숨결로 돌아 온 이 칼의 맛은, 우리가 근대를 넘어 현대사의 질곡을 헤엄칠 때 역사를 증거하고 어울림의 연대를 만들었던 회화(繪畵)의 한 분수령이 되었다. 1980년대 민중 목판화의 시대는 새로운 회화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삶의 숨결은 지금, 이곳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안성의 작업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류연복은 그가 살아 온 삶으로 목판을 이야기한다. 삶과 목판을 구분하지 않는 그의 눈빛은 명징하고 의식은 한 결 같이 투명하다.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으로부터 미학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 온 세월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녹슬지 않는 단단한 손으로, 노동의 미술을 가꾸어 가는 그, 그의 푸른 이야기는 칼과 칼끝이 부르는 칼의 노래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무다


목여(木如)는 류연복의 호(號)다. 그 말의 뜻은 ‘나무와 같다’, ‘자연스럽다’, ‘나는 나무다’, ‘나무를 따르다’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목판화를 하면서 ‘나무’에 대해 갖는 사유의 면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그의 호를 그렇게 지은 데에는 자신이 곧 나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와 다르지 않다, 곧 자신을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목여’는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말이다. 지어서 불렀다면 그 말의 조합을 상상케 한 상징어는 ‘일여(一如)’가 아닐까 한다. 일여는 ‘오직 하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은 불교에서 비롯된다. “진여(眞如)의 이치가 평등하다.”, “차별이 없어 둘이 아니니 하나다.”라는 의미다. 차를 즐기는 이들은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해서 차를 마시는 것과 선을 수행하는 일이 하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일여는 ‘범아일여(梵我一如)’에서 하나의 사상이 된다.


범(梵, brahman)은 ‘더러움이 없다’, ‘펼쳐져 있다’는 뜻으로 우주의 근본원리, 우주의 최고원리를 상징한다. 온 우주에 펼쳐져 있는 맑은 영혼, 깨끗한 참모습이라는 뜻이니까. 그렇게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니까.


범의 한자어 ‘梵’은 ‘林(숲)’과 ‘凡(무릇, 모두)’의 뜻이 하나로 뭉쳐서 탄생했다. 무릇 모든 것이 숲이요, 자연이라는 것. 아(我, āthan)는 몸뚱이 육체인 ‘몸나’과 아집의 덩어리인 ‘제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아’는 밝게 신명이 든 존재로서 시천주(侍天主), 즉 한 얼을 모신 ‘참나’를 말한다. 그 참나는 영원한 참 존재다. 범아일여는 그렇게 범과 아가 하나라는 사상이다. 


범아일여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참나의 진면목을 볼 수 없도록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야 한다. 그 장막을 ‘무명(無明, avidhyā)’이라고 한다. 무명을 걷어내야 진리가 보인다. 미망(迷妄)을 걷어낸 자리에서 ‘무아(無我)’가 솟는다. 무아를 보편적 상술의 상식으로 해석하려 들지 말자. 무아는 주체를 부정하는 것이요, 그래서 영혼조차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래서 진여(眞如)가 다시 말해지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서. 원효는 그것을 ‘일심(一心, 하나가 된 마음)’이라고 했다. “대승의 진리에는 오직 ‘하나가 된 마음’이 있을 뿐이다. ‘하나가 된 마음’ 이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 단지 무명이 ‘하나가 된 마음’을 미혹시켜 파도를 일으키어 온갖 세상에 흘러 다니게 한다. 하지만 윤회하는 세상의 파도를 일으킬지라도 ‘하나가 된 마음’의 바다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박태원 지음,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중에서)


‘나는 나무다’라고 이름 지어 ‘목여’라고 한 데에는 일여, 진여, 범아일여, 그리고 무아에 관한 류연복의 사유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그것들을 세세하게 밝혀서 류연복의 미학적 사상으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왜? 그의 작품들이 그런 사상을 표현하고자 한 결과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두 삼고자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생각들을 피어 올려서 미학의 꽃을 피우는 가다. 사유의 밑뿌리야 말로 그의 판화 미학을 찾아가는 핵심적인 고갱이이니까.


그는 언젠가 인도를 찾아 이곳저곳을 여행한 적이다. 종교적 체험으로 서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나무로서, 자연으로서, 무명을 걷어내고 진리를 보기 위함일 수도 있고, 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넘어서서 미학이라는 ‘진여’를 어떻게 나무에 새길 것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0년 전, 그리고 지금 그의 작업실에서


1958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그는, 1984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서울미술공동체를 결성하고 벽화팀 ‘십장생’에서 활동했다. 서울미술공동체는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을 기획했는데, 당시 이 전시가 당국의 탄압을 받게 됨으로써 민중미술이 시대의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86년 자신의 정릉 작업실 담벼락에 그린 벽화 <상생도>는 경찰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벽화, 걸개그림, 판화를 새기며 민중미술에 뛰어든 그는 서울미술공동체 주무를 담당 하면서 민족미술협의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민족예술인총연합회의 대외협력국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1993년 그림마당 민에서 <새싹 틔우기>전을 마지막으로 경기도 안성으로 하방(遐方)해 버렸다. 그때의 결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1993년으로부터 13년이 흐른 뒤에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이제는 위로부터의 변혁이 아닌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꿈꾸기 위해 작은 변방의 한 소도시로 옮겨서 그림이, 문화가 어떻게 생활 속에 녹아들어야 할지 해야 될 몫을 생각하며 살아가는”(류연복, 새싹 돋는 희망의 봄, 『58 개띠들의 이야기』, 화남, 2006, 256쪽)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안성으로 내려 온 그는 삶의 실천과 미학적 주제를 바꾸었다. 그 전,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부조리한 한국사회의 현실과 그 현실의 모순을 바꾸기 위해 미술로 쟁투했던 그다. 그 때의 실천을 큰 개념으로 ‘사랑(慈悲)’이라 부를 수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바 있다. 그의 에세이 집 『둥글어진다는 것은 낮아짐입니다』(2004)에는 그런 사유의 단편들이 곳곳에 담겨져 있다. “안성에 내려와 살면서 주변의 작은 사물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80년대의 사랑이 역사랄까 민족이랄까 하는 커다란 것들에 대한 관념적 사랑이었다면 안성에서의 사랑은 작은 것에 대한 구체적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봄이 되면 씨앗을 뿌렸고 그 씨앗들이 새싹을 틔우는 것을 보면서 새롭게 생명의 경이로움을 받아들였지요. 머릿속의 사랑이 아닌 가슴과 손발을 꾸려내는 사랑으로 나의 사랑은 구체화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세기적 변화는 그 자신에게도 큰 변화의 계기였을 것이다. 동료 작가들이 변혁운동의 미학적 미디어로 선택했던 목판을 때려치우고 본업(?)으로 돌아 간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의 고민이 엄습해 왔으니까. 그는 다시 새롭게 목판과 벽화운동을 시작했다. 다 떠난 자리에 남아서 혼자라도 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역으로 장소이동을 한 것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2005년 그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던 내게 이렇게 말을 했었다. 


“1980년대, 사회적 구호처럼 당시 내 주제도 ‘작은 사랑의 실천’과 ‘생명력’이었다면, 지금은 씨앗, 새싹에 대한 감탄이야. 살아가다 보니 커다란 관념적 사랑이 실천적 사랑으로 보이게 되더라고. 달라진 것이지. 그리고 2000년 이후부터는 생명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 생명의 너른 바다, 침잠, 깊어져야겠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 뭐, 이 지점에 서 있다고 봐, 난.”


깡마른 체구,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 그러나 그 모습은 강인한 예술가의 모습이라기보다, 차라리 농군에 가깝다. 스스로 ‘자연을 큰 스승 삼아’ 살아 왔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다. 그에게 나무는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나무는 ‘찬란한 생명’이야. 작가는 그것을 죽이는 자고. 나무도 암에 걸리는데, 가지가 부러진 자리가 그곳이야. 상처로 빗물과 먼지, 오염물질이 들어가 까맣게 변하기도 해. 그 상처가 아물면서 나무는 독특한 모양새의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는 거지. 상처를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여유와 시간일거야. 나무의 치유력, 그것을 보면 단지 재료가 아니고 스승이라는 걸 알게 돼.”


그의 작품은 자연의 소소한 것들에서 더 넓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동여지도>의 형식을 차용해 사람 사는 마을을 우주 자연의 지세로 표현한 것들은 그 자체로 ‘맑은 우주 영혼’처럼 읽힌다. 그의 작업들 중 강원도 정선과 영월의 동강을 새긴 것들이 있는데 옛 지도의 형식은 바로 그 작품들에서 발원한 듯 보인다. 동강 작품의 경우 상하좌우의 구분이 확실하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산은 아래와 위가 근경과 원경으로 펼쳐진다. 중첩되어서 멀어지는 산하는 장중하지만 넓은 품이 없다. 그러나 옛 지도를 차용한 작품에서는 땅과 하늘의 이치가 펼쳐진다. 즉, 근경과 원경이 없고, 이쪽저쪽의 구분이 없다. 물은 아래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흐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 나온다. 산하는 시작과 끝이 같고, 훨씬 역동적이다. 꿈틀거리며 대지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 밖, 산하의 위는 너른 우주가 펼쳐진다. 이 작품들에 대해 그가 말을 덧붙인다.


“세계, 우주, 생명은 서로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야.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지. 큰 게 아니라 주변, 내 삶의 주변에 있다고 난 생각해. 그래서 산수(山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지. 그러니까 진경산수에 대한 생각 말이야. 2000년에 동강 작업을 하면서 앞으로 필요하리라 생각했었어. 내 작품 중에 <기솔리 전도>가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들꽃에서 산하까지, 국토의 주름들


그의 작품들은 크게 세 개의 지류를 형성하며 흐른다. 본류는 의심할 바 없이 이 땅, 즉 모국어로서의 국토(國土)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국토를 형상화하기보다는 모국어의 속살이랄 수 있는 이름 없는 들풀들, 들꽃들의 대지와 그 대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그 대지를 흐르는 강과 그 대지에 우뚝 속은 산과 섬을 새긴다. 


들꽃들의 작품은 간결하다. 일말의 배경 없이 오롯이 풀이요, 꽃이다. 풀과 꽃들은 그래서 한 편의 시다. 나무에 새긴 그림들과 시어가 한 쌍을 이룬다. 예컨대 이런 방식이다. 매화꽃 가지하나 새기고 “추위 혹독할수록 향기 깊어지지요”, 제비꽃 한 송이 새기고 “꽃은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지 않네. 그냥그냥 꽃 피우시네.”, 노송 한그루 새기고 “느릿느릿 구불구불 긴 세월 깊은 향기”, 민들레 꽃 새기고 “꽃 한 송이 수백수천으로 되살아오네.”, 민들레 씨앗 새기고 “날아날아 날아가시네. 그리움 찾아.”, 진달래 심고 “봄입니다. 진달래 한 그루 심었습니다. 햇살 따라 가지 뻗는 모습 바라봅니다.” 어디 그 뿐이랴, 그는 숱한 생각들의 ‘사슴뿔(生角)’을 자연과 사물에 얹혀서 풀어내기도 했다.


술병과 술잔을 새기고 “술 한 잔 마음 한 종재기”, 나무 주걱 새기고 “주걱입니다. 밥 퍼 주는 게 제일입니다. 좋은 날이지요.”, 나무토막 하나 새기고 “상처가 깊을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운 무늬 만드시네-떡감나무.”, 새 한 마리 새기고 “하늘 가르시네. 새 한 마리.”, 불 밝힌 촛대 새기고 “제 몸 태워 주변 밝히네.”, 편재목 하나 새기고 “뒤틀릴수록 아름다운 무늬 만드네.”, 거울 하나 새기고 “나에게는 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네-거울.”, 촛불의 불 새기고 “꺼진 듯한 촛불, 횃불 되어 돌아오네.”, 땅 속의 나락 한 톨 새기고 “나락 한 알 그 속에 우주”


한 편의 시화(詩畵)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판화들은 그의 삶의 생철학(生哲學)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꽃이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지 않고 그냥 꽃을 피운다는 생각은 앞서 살폈던 진여의 세계에 대한 짧은 경구와 같다. 또한 느릿느릿 구불구불 긴 세월 깊은 향기를 이야기하는 대목은 미친 듯이 내달리는 신자유주의와 초자본주의의 질주에 대한 근본적인 삶의 성찰이 엿보인다. 밥 퍼 주는 게 제일이라는 것 또한 평화(平和: 공평하게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뜻)에 대한 사유일 것이며, 촛불은 2008년 이후 저항의 상징이 된 우리 사회의 촛불에 대한 생각이고, 나락 한알 그 속에 우주라는 말은 그가 추구하는 삶의 철학이 동아시아에 깊게 뿌리 내린 민중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의 문집(실제로는 강연과 대담을 옮겨놓은 이야기 모음집)인 『나락 한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1997)는 장일순이 사유한 동아시아의 생명사상이 곳곳에 스며있다. 본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 크게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만상(萬象)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각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의 작은 벌레가 엄숙하게 가르쳐줄 때에 그 벌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 참 생명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가슴깊이 새기게 됩니다. 그것을 맛본 후로는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 나의 스승이요, 벗이요, 이 미약한 사람의 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길 걷는 동안 참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고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장일순이 사유한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 나의 스승이요, 벗이요, 이 미약한 사람의 도인이라는 것”이 류연복이 시화 목판화로 사유하는 방식일 테다. 이런 시화를 통한 시적 사유로서의 철학은 일정한 시기에 걸쳐 제작된 것이 아니라 꾸준히, 마치 일기를 쓰듯 제작되고 있다. 그와 달리 그의 목판화가 하나의 미학적 실험을 시작한 것은 옛 지도의 절첩(折疊)을 차용한 ‘~전도’ 연작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중반까지 그는 <동강전도>(1999), <외암골 전도>(2002), <기솔리 전도>(2004) 등의 작품들을 제작, 발표했다. 넓게 ‘전도(全圖)’의 형식적 차원에서 읽힐 수 있는 작품으로 <빈들 생명>(2002), <서운산-봄>, <서운산-겨울>, <서운산 청룡지-봄>, <서운산에서>(이상 2003)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대동여지도>를 새긴 김정호의 ‘지도그리기’라는 미적 형식을 현대 목판화의 미학으로 전유하되, 강렬한 국토의 색채와 산세, 지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장석주는 류연복의 금강산 연작을 두고 “그이의 화체(畵體)는 가벼움이나 섬세함하고는 거리가 멀고, 마치 중묵(重墨)을 쓰듯 무겁고 둔중하다. 둔중한 기운 속에서 형상들은 불쑥불쑥 솟아난다. 바위들, 물, 나무들, 골짜기, 운무들은 무거운 공기를 숨 쉬며 기운생동 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했는데, 사실 기운생동의 미학은 이미 ‘~전도’ 연작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도와 절첩의 미학은 겸재 정선이 <금강전도>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아니 <대동여지도>에서 철학적으로 완성되었듯이 세계의 풍경을 ‘주름’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데 있다. 주지하듯 풍경은 여러 개의 층위들로 형성된다. 류연복이 전도 연작에서 보여주었던 부감법은 근경와 원경의 층위는 물론이요, 계곡을 이루는 수많은 지세들의 주름들까지. 높고 낮음의 시선에 따라 주름의 새로운 지위들이 형성될 뿐만 아니라 지평선의 굴곡에 따란 관점과 시점의 변화가 일어난다. <금강전도>는 한 장의 화지(畵紙:울타리)에 금강산의 전체를 담고자 했던 겸재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산의 전체로서만이 아니라 산의 심부를 더 세밀하게 보고자 했던 심도(深度)의 시점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류연복의 전도는 그런 심도의 시점과 더불어 절첩이라는 부분들의 전체를 다시 보여준다. <대동여지도>는 22첩으로 구성된 절첩식 지도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으로 구분해서 22층을 만들고, 다시 동서로 80리 간격을 한 면으로 해서 병풍식으로 접은 것이다. 각각의 첩은 한 지역을 보여주는 전체다. 그런 부분의 전체들이 모여서 우리나라의 전체 지도가 된다. 류연복은 금강산 연작의 일부를 병풍으로 제작해서 보여주었다. <금강산만이천봉-여름>(2006), <개골 일만이천봉>(2007), <금강산-구룡대에서>(2007)처럼 금강산의 전체를 담은 작품들도 있지만, 부분들의 전체를 모으기 위해서는 병풍식 접이가 가장 제격이었던 것이다. 서운산 연작들은 그가 부분과 전체를 보려했던 작업들이었던 셈이다.



상징의 직구, 리얼리즘의 목판화


노년의 겸재가 박연폭포를 그릴 때 폭포의 세목은 놓아두고 음양의 이치로서 미학의 척추를 그리려 했듯이, 류연복은 금강산 연작을 그리면서 국토의 주름들이 형성하는 전체로서의 우주만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세목들이 갖는 풍경의 내밀한 철학적 조화를 탐색했다. <류연복의 딛고선 땅2007-금강산과 독도를 거닐다>전에 출품된 <귀면암-봄>, <봉래산 구룡폭포>, <풍악 상팔담>, <봉래산 비봉폭포>, <구룡폭포 오르는 길-가을>, <겨울 삼선암>, <달밤-금강산>, <비개인후 만물상>, <상팔담>, <구룡폭포>, <괭이갈매기 날아오르다1>, <괭이갈매기 날아오르다3>, <별 내려앉아-푸른밤>과 같은 작품들이 그런 작품들이다.


가령 <달밤-금강산>을 보자. 검푸른 색을 주조색으로 한 이 그림은 두 개의 봉우리와 달, 그리고 두 봉우리 사이에서 흘러 내려와 큰 웅덩이를 이룬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쑥 솟아서 암산을 이룬 두 봉우리가 산의 양기(陽氣)라면 그곳으로부터 흘러와 웅덩이를 이룬 그림 하단의 둥근 못은 음기(陰氣)의 상징일 것이다. 게다가 그는 둥근 보름달의 그림자를 웅덩이에 띄워서 하늘 연못의 조화를 형성시킨다. 하늘과 대지를 잇는 하늘 연못으로서의 우물 신화를 말이다. 이런 미학적 세계는 <구룡폭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폭포의 풍경도 푸른 새벽빛으로 찬란하다. 그러나 그는 폭포의 세목에 치중하기 보다는 하늘에서 비스듬히 쏟아져 내리는 흰 폭포수와 그 폭포수가 둥글게 웅덩이를 이룬 못과 다시 그 못이 이어져서 물의 세계로 흩어지는 장면을 구성한다. 그림 상단의 찻잔 모양의 하늘, 그리고 다시 역삼각으로 흩어지는 물길, 그 사이의 폭포수의 물웅덩이. <상팔담>은 하늘에서 물이 흘러 차례로 물웅덩이를 형성하고 흐르고 다시 형성하고 흐르는 산세의 음양이치를 보여준다. 그림들은 풍경에 집중했으나 풍경의 세세한 잡상들이 아니라 풍경이 드러내는 상징의 직구를 보고자 한 그의 시선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풍악 상팔담>과 <구룡폭포 오르는 길>은 그 부분의 전체가 다시 펼쳐진 풍경이다.


리얼리즘은 지극한 현실계로부터 비롯되는 미학이다. 비루한 현실로부터 현실미학의 언어로 완성하는 것이 그것. 그런데 현실계만 존재하는 현실주의 미학을 한국의 리얼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류연복의 목판화는 현실계가 형성하는 높은 상징계의 언어를 획득해야만 그것이 가능해 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겸재의 산수를 진경산수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살았던 조선의 풍경이 ‘참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참된 풍경이야 말로 현실주의로서 리얼리즘의 현실태가 아닐까?  


2015.6.14 탈고

해움미술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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