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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칭 평론 | 박한샘 / 하늘을 감고 마음을 기울인 풍경

김종길

하늘을 감고 마음을 기울인 풍경
- 박한샘의 ‘섬’의 미학



그가 보내 준 6년의 작업을 살피다 가장 뒤쪽에 가 닿았다. 그 뒤쪽의 끝은 그의 작품이 발원한 검룡소(儉龍沼)일 것이다. 시작은 소박하나, 변신하고 변태하는 순간들이 쌓여서 ‘그’를 이뤘을 테고…. ‘소’의 깊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 맑음과 솟남의 지속이 중요하다. 계곡을 굽이치면서 이 물과 저 물이 만나고 다시 내와 강을 이루는 동안에도 잊지 않아야 한다. 나는 그 강을 거슬러 그 첫 물의 시작을 보았다.  


지하철 9호선 고속터미널역을 그린 <9호선 고속터미널_1>(2010)은 소실점이 마주하는 오른쪽 저 뒤쪽 언저리에 숯덩이 같은 ‘검은 무엇’이 자라고 있었다. 그 자람의 생기(生氣)는 역사(驛舍)의 윤곽을 힘차게 드로잉 한 구륵(鉤勒)의 선들과 비교되는 한 덩이여서 어떤 음침함이 고여 들었다. 소실하는 빈 공간으로 선의 속도가 치달아 갔는데 그 끝이 또한 그 덩이였다. 그래서 그 덩이는 잡풀이거나 둔덕의 작은 숲 따위가 아니라, 터미널 너머의 다른 현실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어서 어쩌면 저승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9호선 고속터미널_2>(2010)는 그 너머의 현실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 온 풍경으로 읽혔다. 구륵의 안쪽을 채우지 않고, 그것으로 몰골의 형상이 된 터미널은 숯덩이 같았던 그 무엇이 완전히 뒤덮고 있다. 이제 이 현실은 저쪽이 아니어서 이승인 것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 아니 이승과 저승 사이의 투명한 세계로 읽혔다. 구륵의 선들이 터미널의 구체적 사이 공간들을 만들어 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 내부를 상상케 했다면, 검은 몰골의 형상은 그 형상이 그려진 한지 위에서 흰 여백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여백은 상대적으로 한 없이 투명한 세계로 읽혔던 것이다. 산 자들의 세계도 아니고 죽은 자들의 세계도 아닌 저 투명한 세계를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터미널 공간이 갖는 ‘속도’와 ‘멈춤’의 상징은 <매괴성당>(2010)에서 우회했다. 숯덩이 같은 ‘그 무엇’은 ‘음침함’(음침한 골짜기 따위의)에서 성스러운 에네르기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검은 대지에 성전의 기둥들이 단상을 향해 기립했다. 건축의 벽과 천장과 창문과 그것들을 장식하는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와 14처 조형물이 완벽하게 사라진 채 오롯이 검은 기둥만 서 있는 저 모습은 고대 신전의 기둥들을 연상시켰다. 아무런 장식 없이 숭엄하게 서 있는 저것들은 당간(幢竿)을 닮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둥들 가운데에 제단이 있고 그 제단을 에두른 두 개의 기둥 너머로 다시 숯덩이 같은 그 무엇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무엇이 이름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어떤 통로이자 감응의 교통이자 성스러운 영(靈)의 현현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가 충북 음성의 ‘음성감곡성당’(이칭별칭: 매괴성당, 1896건립)의 8각 석조기둥의 열주와 기둥 위쪽의 큰 4각 받침을 차용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그림은 그것과 무관하게 매우 상징적인 장면으로 그려졌다. 묵주기도는 본래 로사리오(Rosario)기도에서 비롯한다. 로사리오는 ‘장미꽃다발’이라는 뜻인데 이 로사리오를 중국에서 ‘매괴’(玫瑰)로 번역했다. 그리고 다시 ‘매괴’는 해당화를 말한다. 그러니 그의 작품 <매괴성당>은 ‘매괴’의 뜻과도 하등 상관없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그가 표현하고자 한 정신세계의 풍경일지 모른다. 현실 풍경에서 비롯하되, 그 풍경의 고갱이를 거둬서 화면에 직조한 정신의 풍경으로서 말이다. 이후 작품들에서 열주들은 사라지고 순전히 ‘섬’만 등장하는데, 어쩌면 그 모든 풍경들에는 보이지 않는 열주들이 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의 작품을 해제하는 세 개의 열쇳말을 떠올렸다. 첫째는 ‘당’(堂)이다. ‘당’은 집, 학교를 뜻하고 ‘평평하다’는 의미도 가진다. 서당이 학교라면, 신당과 성당과 당집은 ‘(귀)신’(神)과 밀접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신에 귀속하기 보다는 ‘성스러운 집’을 먼저 생각했다. 그 집은 지세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평평한 곳을 따른다. 그 땅이 또한 성스럽다. 그런데 ‘당’이 갖는 풍경은 어둡다. 그 어둠의 배경에 한 줄기 빛이 있다. ‘당’은 그 빛을 받는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당’의 상징은 현실의 풍경을 뒤지어 그 이면에 가 닿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실제의 풍경을 마음에 거둬서 다시 한지에 풀어내는 과정은 겸재가 진경(眞景)의 미학을 풀어내는 과정이기도 했으나, 그에게 있어 이 과정은 온전히 풍경을 풍경으로 모시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심리로서의 ‘내면’(內面)을 집으로 구축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집으로서 이 ‘당’은 마음과 영혼이 감응하는 곳이리라. 그렇다면 그는 왜 화면에 이토록 성스러운 집[당]을 그려야 했을까?     



당(堂), 눈 감고 귀 기울인


2012년과 13년에 그린 <탑포리 거북이섬> 연작은 ‘섬’의 초기 상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생각된다. <매괴성당>에서처럼 12년의 첫 작품도 화면의 하단을 검게 잡았다. 그것은 대지요, 바다다. 바탕을 이룬 땅과 물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평평하게 펼쳐진 수평선에 섬 하나가 있다. 동사 ‘있다’에 담고 싶은 필자의 욕망은 강한 ‘실존(성)’이다. 하늘도 어둡고 땅도 어둡고 그 사이의 산들도 어둡다. 마치 심연의 깊숙한 풍경인양 짙게 드리워진 이 어둠 속에서 섬 하나는 강렬하게 빛난다.


그 섬을 둘러싼 흰 빛들에 의해 더 까맣게 빛나는 섬은 그것으로 종교다. 한 개 섬이 한 개 성스러움으로 종교가 되는 것은 ‘그’가 실존의 존재성을 들깨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 깨달아 빛이 되는 순간들이 곧 ‘사람’이 되고 ‘신’이 되는 순간이다. 진인(眞人)은 깨달아 빛이 된 존재를 말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이처럼 풍경이 스스로 빛이 되는 것 또한 진경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러나 그의 이 섬들은 그려졌으나 볼 수 없을 때 더 강렬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진 이 풍경이야말로 그의 내부에서 용솟음치듯 강렬하게 빛나는 것으로 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 풍경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이 풍경 앞에서 눈은 감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빛의 율려(律呂)를 들어야 한다. ‘그’의 ‘나’가 아니라 ‘나’의 ‘그’를 향해 가기 위해서.


<탑포리 거북이섬> 연작은 이후의 섬 작품들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다. 섬이 회귀할 수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심’(心)이다. 하나 마음(一心)이다. 그 하나 마음은 하나의 깨달음(一覺)이다. ‘당’이 구축한 곳은 심이 흩어지고 모이는 장소다. <거제면 외간리 산 56-9>(2013)은 ‘심’의 민낯이다. 그 심은 지극히 황량하고 쓸쓸하고 외롭다. 초현실과 비현실의 어디쯤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물과 대지와 하늘과 우주의 경계를 따로 세우지 않는다. 산들이 저 멀리 있으니 이곳을 산들의 낮은 평야라 주장하지 말자. 뒤로 밀려나 있는 산들이야 말로 이 앞의 심층적 초현실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심’의 다른 실체는 <제주 북동쪽 중산간>(2014)에 치우쳐 있다. <거제면 외간리 산 56-9>과 대조적인 이 작품은 뜨거운 불로 솟았던 제주의 육체를 평온한 나신으로 드러낸다. 이렇듯 ‘심’의 풍경은 하늘을 감고 마음을 기울여야만 볼 수 있는 그 무엇인지 모른다.



심(心), 하늘 감고 마음 기울인


<제주 북동쪽 중산간>은 ‘심’의 내밀한 세부다. 우리는 그것을 심부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섬들과 달리 제주는 제주 밖에서 조망할 수 없다. 심지어 비행기에서조차 그 전체를 조망하기란 불가능하다. 제주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섬의 내부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중산간 풍경은 제주의 아주 디테일한 심부인 것이다. 화면에 온전히 하나의 섬으로 독립시킬 수 없을 때 그의 그림은 빛의 세부로 잠입해 들어가는 듯하다. 2미터 29센티미터의 이 거대한 가로 폭에 담긴 섬은 그래서 한라산의 기생화산으로 솟은 오름을 섬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오름들은 이승의 시간들이 한 순간에 명멸하는 빛 속에 있다.


‘당’이 ‘심’으로 가득차서 섬을 이룬 것이 <목섬_2>(2015)이다. 이 섬은 최초의 ‘숯덩이’ 같았던 ‘그 무엇’의 존재(성)로 변신해 있다. 목섬은 목섬일 것이면서, 어쩌면 단지 ‘심’으로만 존재하는 섬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앞서서 성스러운 집이라 했던 ‘당’은 ‘심’에 이르러서야 실존이라는 종교성을 완전하게 갖춘 듯하다. 

 

세 번째 열쇳말은 ‘섬’이다. 이것은 역설이겠다. 섬에서 ‘심’으로, 심에서 다시 ‘당’으로 가는 것이 미학의 상징을 구축해가는 통설일 터인데, 그는 그 반대로 진행해 왔으니까 말이다.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그림들이 점점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그림들로 변태한 것. 그리니 ‘섬’은 섬이다. 그 섬을 다른 무엇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그의 <섶섬>(2014)은 ‘섶섬’일 뿐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이 역설의 상징체계에서 그가 획득하고자 한 미학적 세계의 진실을 소름 돋듯 깨닫는다. 상징의 체계에서 리얼한 현실의 체계로 넘어왔다고는 하나, 사실 우리의 눈은 늘 그 이면의 체계를 엿보지 못하는 장님이지 않은가. <섶섬>을 ‘섶섬’의 풍경으로 돌려 놓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것이 ‘심’이요, ‘당’이라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섬(島), 귀 열고 눈 기울인


<사인암>, <도담삼봉>, <밤섬>, <밤섬_1>(이상 2014)을 비롯해 <목섬_1>, <털미섬>(이상 2015) 연작은 섬에 집중한 작품들이다. 섬은 섬의 풍경을 고유하게 드러낸다. 그는 그 ‘드러냄’의 풍경을 직조하기 위해 섬의 바깥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섬이라는 육체는 상징과 은유 이전에 존재하는 실존이다. 그 실존은 나도 너도 우리도 아닌 섬일 뿐이다. 박한샘이 성취해 나가고 있는 이 섬의 풍경들은 귀를 열고 눈을 또한 기울여야만 보이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하여 그는 섬의 세목들에 무엇보다 집중했다. 눈을 기울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것들이다.


그가 눈과 귀를 기울여 그린 섬들은 그래서 다시 하나의 ‘심’이 된다. 깊이 들어간 눈과 귀를 슬쩍 밖으로 빼서 감고 닫으면 그의 그림이 보인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의 그림을 역순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심’이 다다른 곳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사방팔방시방으로 넓혔다가 하나로 모으는 마음의 구조다. 그의 작품들은 그 길의 끝에 평평하게 서 있다. 하늘과 땅과 우주 사이를 장엄하는 존재로 누워있다.


2017.3.17 

청주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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