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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김윤수 / 신형상미술론의 주창자

김종길

신형상미술론의 주창자
- 미술평론가 김윤수의 비평세계



미술평론가 최민, 박용숙에 이어 김윤수 선생이 지난 11월 29일에 별세했다. 1936년생이니 올해로 향년 여든 둘이다. 민중미술계 1세대 미술평론가들의 부음이 가파르다. 민중미술론을 처음 입론한 그들의 이론을 새로 갈무리하는 일이 후학들의 과제로 남았다. 이론의 여러 갈래를 형성한 그들의 평론을 다시 읽어야 한다. 

 
언론은 그의 부음을 전하며 “민중미술 대표 평론가 김윤수 前국립현대미술관장 별세”(서울신문), “‘민중미술운동의 대부’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별세”(한겨레)로 타전했다. 많은 언론이 그를 ‘민중미술 대표 평론가, 이론가, 대부’로 치켜세웠다. 한겨레신문은 기사의 첫 문장에서 “한국 진보미술 진영의 대표적인 평론가이자 이론가로, 1980~90년대 비판적 리얼리즘을 표방한 민중미술운동을 이끌었던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라고 썼다(노형석, 「‘민중미술운동의 대부’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별세」, 한겨레 신문, 2018.11.29)


그의 미술평론은 1970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약 25년에 걸쳐서 발표되었으나 비평의 중핵을 이루는 기간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 후반까지다. 그 기간 동안 그가 발표한 평론은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1981년에 서울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했고, 1983년부터 1998년까지는 ‘창작과 비평사’의 대표를 지냈기 때문에 현장비평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75년,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배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뒤에는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해직되기도 했고, 이후로 1984년이 되어서야 영남대 미대 회화과에 부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왜 그를 민중민술계의 대표 이론가, 평론가로 평가하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열정적으로 평론을 발표하지 않았을 뿐더러 제대로 된 평론집 한 권도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큰 찬사를 낳게 하는 것일까? 심지어 연합뉴스는 그를 ‘민중미술의 거두’이자 ‘민중․민족미술의 정신적 지주’라고까지 했다(정아란, 「‘민중미술 거두’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별세」, 연합뉴스, 2018.11.29) 당시 그의 삶은 그의 이력이 말해 준다.     


1975년 11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수감(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항소심에서 선고유예, 수감 중 당국에 의해 강제 해직)1978년 1월~1982년 12월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위원1981년 3월~1982년 12월 서울미술관 설립에 참가, 초대 관장1983년 1월~1998년 12월 창작과비평사 대표1984년 10월~2001년 2월 영남대학교 부교수1985년 5월~1988년 12월 민족미술협의회, 고문1988년 12월~1990년 1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
오류 하나 ; 현실동인 제1선언


별세 소식을 전하는 많은 부고 기사에서 “1969년 화가 오윤·임세택·오경환, 시인 김지하와 발표한 ‘현실동인 제1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참된 예술은 모순에 찬 현실 도전을 맞받아 대결하는 응전능력에 의해서만 수확되는 열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아마도 민족예술인장을 준비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보도 자료를 작성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첨가된 게 아닐까 한다. 그는 2000년에 결성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기사에서 잘못된 부분은 「현실동인 제1선언」을 김지하와 김윤수가 함께 발표했다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결국 그 선언문이 ‘그의 생각’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되는 오류를 낳고 있다. 필자 또한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현실문화, 2012)에 기고한 「1980년대 사회변혁론과 민중미술Ⅰ」에서 “김지하가 쓰고 김윤수가 교열한 「현실동인 제1선언」은 1980년대에 전개된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미학적 계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고, (사)민족미술인협회 누리집(www.minart.org)에는 시인 김지하가 기초하고 미술평론가 김윤수가 감수했다고 밝힌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부분은 오늘 이후로 수정되어야 한다.


미술평론가 최열에 따르면 이것은 심각한 오류다. 그 또한 민중미술사를 기록한 초기 평론들에서 동일한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언젠가 이것을 꼭 바로잡아 달라고 했다. 시인 김지하는 언젠가 그에게 직접 「현실동인 제1선언」은 홀로 작성한 것이며 누구에게 감수나 교열을 맡긴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김지하 전집 제3권 미학사상』(실천문학사, 2002) 77쪽에 「현실동인 제1선언」이 실렸는데, 각주에 “이 글은 1969년 10월 25일경 판화가 오윤 등과 전람회를 하려다가 미술대학, 중앙정보부 등의 방해로 무산되었을 당시 발표한 글이다.”라고 적고 있다. 어디에도 김윤수가 감수하거나 교열했다는 기록은 없다. 만약 「현실동인 제1선언」을 공동으로 집필했거나, 아니 그와 유사한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발표했다면 그런 기록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현실동인 제1선언」원본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삶의 진실과 새 구상 ; 신형상미술론


미술평론가 김윤수의 위상은 1981년부터 87년까지 『계간미술』에 발표한 평론들에 의해 빛을 발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러 편의 평론을 기고하고 좌담회에 참석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81년 『계간미술』여름호에 발표한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이다. 이 평론은 1980년대 민중미술 시대를 예고하는 하나의 당간지주(幢竿支柱)와 같다. 새로운 리얼리즘 미학을 제시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여름호는 특별기획으로 “새 구상화 11인의 현장”을 꾸몄다. 평론가 임영방, 유준상, 김윤수, 원동석이 작가를 선정했는데 그 11인은 김정헌, 오해창, 이상국, 이청운, 노원희, 진 경우, 임옥상, 민정기, 오윤, 여운, 권순철이다. 꼭지 제목을 알리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구상화라는 말은 특수한 역사적 미술적 상황의 산물이다. 20세기라는 역사적 상황은 자연주의의 퇴장과 추상미술의 대두를 가져오는 한편 다시 추상미술에 대한 반발로써 구체적 형상의 미술이 나타나게 하였는데, 이 미술은 이미 지난날의 자연주의가 아니다.” 인용구에서 ‘구체적 형상의 미술’이 나타났다는 표현은 주제어 ‘신 구상화’를 개념적으로 보완한 부분이다. 김윤수는 “젊은 구상화가 11인의 선정에 붙여”를 부제로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을 기고했다. 이 글은 1970년대와 내용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구분하면서 새로 등장한 회화적 흐름을 비평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 구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의 핵심에는 ‘삶의 진실’이라는 리얼리즘 미학이 있다. 그리고 그는 글에서 ‘전후 프랑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여기서 우리는 구상화가 전후 유럽에서 새로운 회화로서 출현하고, 한때나마 각광을 받게 되었던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전이 끝난 후 대부분의 화가들은 추상회화로 나아가 전후추상(즉 비구상)의 물결을 주도했으며, 화가들은 새로운 리얼리즘을 추구했는데 그중의 일부는 「옴 테므앵」(목격자)을 결성하여 구상회화를 전개시켜 갔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물결인 추상회화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식화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면서 전쟁 체험과 전후의 삶의 이러저러한 모습을 날카롭게 추구하였다(105~106쪽).


그는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프랑스 ‘목격자’ 그룹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우리 현실에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지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즉 그는 “상실한 현실에 예술적으로 회복하는 한 방법으로서 우리는 구상회화를 생각하게 된다. 흔히 말하듯 갖가지 전위미술이 있으니 그중에 구상도 하나쯤 있을 법하다거나 사실과 추상의 주기적 반복을 증거로 들어 이제 추상도 한물갔으므로 구상이 나올 때가 되었다는 식으로 구상화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현실은 구체적이다. 개인에 있어서나 사회적으로나 그것은 언제나 구체성을 띠고 나타난다. 구체성을 어떻게 파악하며 어떻게 관계하는가에 따라 현실은 드러나기도 하고 왜곡되거나 상실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구상화가 가야할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서두에 밝힌 구체적 형상의 미술, 즉 새 구상화로서의 ‘신형상미술론’이다.


신형상미술론으로 11인을 선정했으나 이후 그가 주목한 작가는 제3그룹의 김경인이다. 1982년 『계간미술』(겨울호)이 ‘오늘의 작가연구’로 선정한 김경인의 평론으로 그는 「타락한 인간상을 밝히는 ‘추의 미학’」을 발표했다. 김경인의 개인전은 1981년 10월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있었다. 김윤수는 ‘충격적’이라면서 “이 전시회는 규모도 규모려니와 내용면에서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림 하나하나가 보는 이를 향해 엄습해 오고 그것이 중폭 되면서 전시실 전체를 무시무시한 공간으로 만들어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했다. 마치 술에 취해 잘못 찾아온 듯한 느낌, 무엇에 홀린 듯한 착각, 어디에 끌려와 포로가 된 듯한 전율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가 김경인에 주목했던 것은 김경인이 ‘한국적 형상에 대한 관심’을 회화로 직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경인의 태도를 그의 철학으로 전유해서 “당시 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회화나 예술관이 전근대적이고 반현실적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또 김경인의 말을 빌어 “소위 한국적 형상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이조자기나 문양, 혹은 산, 달, 학 같은 형상을 도식적으로 답습하는데 있지 않고 시대성에 있다는 것, 현실을 직시하고 충실히 그려내는데 있다는 해답을 얻었던 것 같다. 이때부터 나는 현실을 생각했고 그것이 내 작업에 귀신처럼 붙어 다녔다.”고 고백한다(129~130쪽 참조). 김경인의 삶과 예술을 분석하면서 그는 새로운 형상미술이 갖추어야 할 태도와 철학이 무엇인지를 은유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미술 ; 한국미술의 알레고리


1986년 5월 22일 오후 6시, 『계간미술』을 펴내는 중앙일보사 회의실에 미술평론가 이구열, 김윤수, 작가 김정헌이 앉았다. 독일의 분단미술 자료를 살펴보면서 한국미술에 분단미술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김윤수가 진행을 맡았다.


문학계에서는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분단문학이라는 용어가 제기되었고 “남북 분단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씌어진 문학 또는 남북 분단에 관해 다룬 문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문학비평용어사전에서는 ‘분단문학’을 사용하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서는 ‘분단시대 문학’이라고 적고 있으나 문학계 내부에서 ‘분단문학’은 하나의 개념으로 정착시킨지 오래다. 그러나 미술계에서 ‘분단미술’은 1980년대나 지금이나 거의 공식화 된 적이 없다. 비평계에서조차 이 용어를 개념화 하지 못했고 그에 따른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날의 문제의식은 시대를 뛰어넘어 ‘다시읽기’를 요구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는 독일 자료를 훑어본 뒤 “이 그림들을 죽 훑어보면서 느끼는 것은, 먼저 그것이 우리가 모델로 삼아온 서양미술에서는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바와는 달리 분단의 고통이라든가, 통일에의 염원을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서양 현대미술에서 미술과 현실, 정치 사회적인 문제와의 관계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독일의 문화정책이 매우 중요했다고 밝힌다. 우회적으로 우리 상황을 꼬집는 대목이다. 예컨대 그는 “우리 경우처럼 이데올로기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적인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하나의 민족으로서 체제와 이념을 떠나서 통일을 지향하는 대전제를 가지고 정부가 개방적인 통일논의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지요.”라고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1980년대에 여러 주제전들에서 분단미술로 구분할 수 있는 전시들이 여럿 있었다. 그림마ᄃᆞᆼ․민에서 열린 <통일전>(1986)과 1984년에 ‘현실과 발언’이 동인전으로 기획한 <6.25전>, 그리고 <해방 40년 역사전>, 마루조각회의 분단을 주제로 한 전시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윤수는 왜 우리 미술계에서 분단문제가 본격적으로 주제화 되지 못했을까 의문한다. 이 좌담회에서 그는 “분단문제만 하더라도 현실생활에 아주 깊게 들어와 있음에도 미술의 주제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은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면서 “미술가들이 분단문제를 절실히 느끼지 않았다는 이유 이전에 미술에 대한 편협한 선입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게 되는 것”이라 강조한다. 편협한 미술관과 사회적 제약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풀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다.


우리 작가들의 경우, 분단에 대한 관심이 약해요. 그 문제가 내 삶의 일부로서의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이 없으니까 관심이 자연히 없는 거고, 또 분단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통일은 늦어진다는 것이지요. 통일의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고 남의 문제라는 태도가 팽배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의 차원에서 볼 때 큰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56쪽).


1987년에 그가 본 우리 미술계의 풍경은 지금 현재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의 신형상미술론은 비판적 리얼리즘을 따르는 작가들에게 큰 울림이었고, 민중미술론의 한 축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긴 평론을 토대로 1980년대 민중미술론의 세목을 구성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또한 ‘분단미술’의 관점에서 한국미술의 알레고리를 살피는 연구도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분단상황에서 펼쳐진 미술의 이면에는 ‘분단’이라는 알레고리가 크든 작든 내면화 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윤수 선생의 1970~90년대 평론과 역서 목록


「미학의 학문적 의의」, 『상록』, 1970. 8
「예술과 소외」, 『창작과 비평』, 1971. 봄「좌절과 극복의 이론」, 『창작과 비평』, 1972. 가을
「폭력과 예술」, 1972. (『민중미술』, 공동체, 1985)에 재수록「춘곡 고희동과 신미술운동」, 『창작과 비평』, 1973. 겨울
「화단 풍토의 반성-작가와 비평가의 자세」, 『창작과 비평』, 1974. 가을
「한국 근대미술 그 비판적 서설」, 『한국현대회화사』, 1975
「한국의 근대화와 그 미술」, 『한국현대회화사』, 1975「이중섭과 박수근」, 『한국현대회화사』, 1975
「이인성의 작품세계」, 『한국현대회화사』, 1975
「광복 30년의 한국미술」, 『창작과 비평』, 1975. 6
「선전 잔재와 극복」, 『미술과 생활』, 1977. 11
「분단시대의 민족문화」, 『창작과 비평』, 1977. 가을(강만길, 리영희, 임형택, 백낙청 좌담회)
「김환기론」, 『계간미술』, 1977. 여름
「문인화의 종언과 현대적 변모」, 『한국현대미술전집』, 1978
「오지호-인상주의 토착화의 기수」, 1978.(「오지호의 인상주의 회화 및 민족미술의 성격」, 『오지호』한국근대회화집 양화3, 금성출판사, 1990)에 재수록「조형의 구도자」, 『계간미술』, 1978. 봄
「분단현실과 민족교육」, 『창작과 비평』, 1978. 여름(성래운, 이오덕, 김인회, 이시영 좌담회)
「풍요와 빈곤, 모순 속의 갈등」, 『월간중앙』, 1979. 12
「한국추상미술의 반성」, 『계간미술』, 1979. 여름
「일본 현대미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계간미술』, 1981. 여름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 『계간미술』,  1981. 여름
「이중섭」, 『계간미술』, 1981. 겨울
「김경인-타락한 인간상을 밝히는 추의 미학」, 『계간미술』, 1982. 겨울
「한국미술의 새단계」, 『한국문학의 현단계』, 1983
「일상과 역사에 대한 충격적 상상력-신학철」, 『계간미술』, 1983. 겨울
「보다 인간적인 도시환경의 벽화」, 『계간미술』, 1983. 여름(성완경 공동집필)
「80년대 우리 미술의 과제와 전망」, 『공간』, 1985. 9
「심정수-이 시대 삶을 증언하는 아픔의 인간상」, 『계간미술』, 1986. 가을
「역사적 사회적 주체의식의 확산」, 『계간미술』, 1986. 겨울
「한국조각, 오늘의 문제」, 『계간미술』, 1986. 봄
「시적 조형의 구상조각」, 『계간미술』, 1987. 겨울
「한국미술이 본 분단의 아픔」, 『계간미술』, 1987. 여름(김정헌, 이구열 좌담회)
「미술은 분단을 어떻게 보았는가」, 『계간미술』, 1988. 가을(김정헌, 임헌영 좌담회)
「80년대 미술운동의 흐름과 전망」, 『가나아트』, 1989. 3(김정헌, 라원식, 황재형, 홍선웅 좌담회)
「민중예술운동, 이제부터의 과제」, 『창작과 비평』, 1989. 봄(정지창, 채희완, 김창남, 이성욱 좌담회)
「고야회화의 민중성」, 영남대학교 인문학회지, 1992「미술에 있어서의 리얼리즘」, 영남대학교 인문학회지, 1995「해방50년 역사미술전의 의미」, 『해방 50년 역사미술전』 도록, 1995

G. 슈미트 지음, 김윤수 옮김, 『근대회화소사』, 일지사, 1972김윤수 책임편집,  『예술의 창조』, 태극출판사, 1974(「20세기 예술과 사회배경」 이 수록되어 있음)한스 M. 빙글러 지음, 김윤수 옮김, 『바우하우스』, 미진사, 1978H.W. 잰슨 지음, 김윤수 외 옮김, 『미술의 역사』, 삼성출판사, 1978가써 마누엘 지음, 김윤수 옮김, 『거장들의 자화상』, 지인사, 1978허버트 리드 지음, 김윤수 옮김, 『현대미술의 원리』, 열화당, 1981존 버거 지음, 김윤수 옮김,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미진사, 1984마이어 샤피로 지음, 김윤수, 방대원 옮김,  『현대 미술사론』(역), 까치, 1989


● 미술평론가 최열이 책임 작성한 「민족민중미술 관련 문헌 총목록」, 『민중미술 15년 1980-1994』(삶과꿈, 1994)을 비롯해 여러 자료를 참조하여 작성했다. 선구적으로 문헌목록을 정리한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께 경의를 표한다. 그의 1차 자료가 없었다면 원동석, 최민, 박용숙 선생의 작업도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술세계_201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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