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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칭평론 | 술수 부리는 몸짓들 - 송주원 '짓'의 무늬

김종길



술수 부리는 몸짓들
- 송주원의 <풍정.각>이 새긴 ‘짓’의 무늬


김종길 | 미술평론가


“불은, 그 고유의 삶에서 항상 어떤 솟구침이다. 불은 사그라질 때에야 비로소 수평적 온기가 되고 여성적 온기 속에서 부동성이 되는 것이다.”
_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안보옥 옮김, 『불의 시학의 단편들』(문학동네, 2004)에서


“하늘 숨을 쉬자, 밥으로 몸을 빚는다, 몸속에서 열린 하늘, 목숨 말숨 우숨, 피를 맑게 한다, 몸으로 제사를 드린다, 몸의 잠에서 깨어나기, 얼의 골짜기, 영혼을 드러내는 골짜기”
_ 박재순, 함인숙, 『유영모의 천지인 명상 : 몸, 맘, 얼을 울리는』(대한기독교서회, 2013)에서




1. 우리말의 사유로 ‘춤사위’를 표현하고 해석하기 위한 장치
_ <풍정.각>을 위한 일러두기


예술(藝術)의 예(藝)는 “심다, 기예, 궁극”을 뜻한다. 생태, 창조, 철학을 품은 것이다. 술(術)은 “꾀, 길, 통로”를 뜻하는데, 술사(術士), 방사(方士), 진인(眞人)에서 왔고 ‘샤먼’을 뜻한다. 샤먼은 술수를 부리는 사람신령이다. 미술(美術)의 미(美)는 큰[大] 사슴쁠[羊/순록]이다. 그 뜻은 “술수 부리는 샤먼”이다. 이 말에서 글의 제목 “술수 부리는 몸짓들”을 떠올렸다. 


몸짓은 무용이고 무용은 춤이다. 몸짓이 쓰는 언어는 몸말이다. 몸짓은 멋짓이어서 흥을 틔운다. 몸짓은 몸이고 짓이다. 몸에 얼이 있고, 얼이 밝으면 ‘얼빛’이다. 얼빛이 신명(神明+身明)이다. 입의 언어는 ‘입말’이고 ‘말글’이다. 문자 언어는 ‘글말’이다. ‘몸말 트다’는 몸짓의 언어가 말글로, 혹은 글말로 살아서 무용수의 몸이 환하게 밝은 것을 뜻한다. 환한 몸말의 몸이 또한 얼빛이요, 신명이다.


“그물코가 천 코면 걸릴 날이 있다”는 말에서 ‘그물코’를 떠올렸다. 씨줄날줄로 천 개의 코를 엮어서 ‘청동거울’을 만드는 것이, 이승과 저승,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을 교통하는 춤의 신명이다. ‘흰 그림자’는 청동거울에 비추인 춤의 그림자요, 몸짓의 빛 그림자이다. 이승과 저승이, 전경과 후경이, 몸짓과 풍경이 상호침투(交互)하듯 어긋 매길 때, 카오스모제가 된다.


얼빛의 몸짓이, 신명의 환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몸각’을 틔워야 한다. 몸각은 몸의 모든 감각이 열리기 직전의 한 상태이다. 몸각을 틔워야 얼빛이 되고, 신명 든 밝달 몸이 된다.




2. 싱싱 거리는 짓, 멋짓
_ <풍정.각>을 보는/읽는 방식에 대하여


송주원의 안무를 보았다. 안무가 펼쳐졌던 장소들은 카메라렌즈에 몽타주로 변주되어서1) 신이 났다. 무용하는 몸짓과 영상은 하나여서 굳이 그것을 나눌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몸짓이 몸말을 쓰는 그곳이 어디든 간에 갇힌 장소들이 해방되었고, 춤의 길들이 열리고 이어졌다. 몸짓을 타는 무용수의 춤에서 ‘얼빛’이 터졌는데, 카메라는 그것을 그저 따라갈 뿐이었다. 춤과 장소와 카메라와 신명(神明+身明)이 하나로 어울릴 때 내 몸도 덩달아 신났다.


한옥이든 폐허가 된 오래된 마을이든, 아니 다리 위와 도로에서 무용은 그의 안무가 그리는 선을 따라 미끄러지며 굴러 다녔다. 몸이 구르고 뛰는 곳에서 ‘짓’이 싱싱 거렸다. 몸짓은 몸말을 트며 달려들었는데, 몸말이 몸짓으로 그리는 말들은 소리가 아니었다. 싱싱 거리는 짓의 한 동작 한 동작이 수다한 말이어서 눈으로 쫓아서 듣지 않으면 일순간에 흘러가 버렸다.


몸말은 <풍정.각>이 펼쳐진 장소마다 달라서 어떤 것들은 오래된 흑백 영화의 소꿉놀이로 들렸고, 어떤 것들은 70년대 청춘영화의 명랑하고 발칙한 장면들의 콜라주 같았다. 그런데도 그의 모든 안무에서 몸과 몸들이 짓을 이루며 장난을 펼칠 때는 ‘울리포(OULIPO)’의 변주였다.2) 


원문/ 주장, 반복, 되풀이/ 절제/ 다른 관점/ 치환/ 동의(유의)성/ 탁월한 추론/ 의문문
        
한 몸짓이 한 동작으로 탄생하고 난 뒤(원문), 그 몸짓이 주장되고 반복되며 되풀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얼핏, 이 몸짓 저 몸짓으로 흩어지는 동작들이 어울려 장난을 이루다가 순간 응집을 이루는 절제는 리듬 뒤에 오는 ‘사이’처럼 정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럴 때 몸짓은 계곡을 흐르는 물처럼 리드미컬했고, 강으로 스며든 물처럼 여유로웠다.


춤추는 몸들이 짓으로 쓰는 서사는 ‘흥’이 있었고, 가만히 멈춰서 몸을 닫는 장면들은 ‘멋’이 있었다. 그러다가 짓들이 활개를 치며 파격을 이루듯 파행으로 치달아가는 장면들에서는 혼돈을 연출하곤 했는데, 그 순간들에서 오랫동안 잊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솟구치기도 했다. 몸말이 이루는 장면들은 그렇게 이야기로 가득했고 그 이야기는 낯설지 않았다. 


그의 댄스필름에서 세 편을 풀어썼다. 낙원악기상가 전시공간 ‘d/p’(www.dslashp.org)에서 서너 편을 보았고, 집에 돌아와 유투브에 공개한 작품들을 오래도록 살폈다. 나는 춤과 영상이 하나로 엮인 필름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사슴뿔[生角]이 글말로 피어오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세 편의 글말이긴 하나, 이 글에는 그가 <풍정.각>으로 엮은 댄스필름의 열쇳말들이 그물코로 펼쳐져 있다. 그것들을 씨줄날줄로 엮어서 청동거울을 그리면, 그의 안무가, 무용이, 몸짓이, 몸말이 어렴풋이 보일 것이다. 그의 안무는 언어를 가졌으나, 귀에 들리지 않는 말이다. 몸각을 틔워서 눈으로 듣고 귀로 보아야 한다.




3. 몸말 트는 두 몸짓, 흰 그림자
장소 _ 종로구 계동 105번지. 한옥의 마루, 마당, 정자


<풍정.각1>의 카메라 눈은 ‘본다.’에 충실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동사만 있는 꼴. 한옥의 안팎에서 두 몸짓 세 몸짓이 자전하고 공전하는 그 ‘짓’의 혼돈(chaos)과 질서(cosmos)가 서로 어긋 매기는(osmose/상호침투/交互) 순간들로 렌즈의 안쪽에서 우물에 잠기듯 가라앉았다.3) 그래서 영상은 물그림자를 비추듯 렌즈 너머의 짓들을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짓’의 카오스모제(chaosmose)는 밀고 당기는 몸말의 언어로 가득해서 두 몸짓이 눕고 일어서고 뒹굴 때마다 짓의 잔망스런 수다가 터졌다.4) 그러나 그것은 입말이 아니어서 들을 수 없고, 오롯이 눈으로만 짓의 행간을 살필 뿐이었다.


짓은 음이 낮게 퍼질 때 둘로 나뉘었다가, 음이 제 소리를 가득 품고 치솟을 때 하나가 되곤 했다. 짓은 음의 능선을 따라 뒹굴었으나, 음이 짓보다 앞서는 일은 없었다. 그것들은 서로 어울렸다. 두 몸짓에 밀물처럼 스몄다가 썰물처럼 빠지는 일이 되풀이 되었고, 짓은 그 스미고 빠지는 음의 결을 따라서 희로애락을 펼쳤다.


여자는 파랗고 남자는 하얗다. 푸르고 흰 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면 그것은 밀려와 부딪힐 때 부서지는 포말(泡沫)일 터. 하나가 물밀어들고 다른 하나가 맞서면 그 사이에서 물거품이 터진다. 연화화생(蓮花化生)이다. 


삶의 업과 인연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전생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몸이/중생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피안의 정토에서 태어나는 연화화생. 온전히 새롭고, 온전히 자유로우며, 온전히 열린 삶의 꽃 한 송이!




“1은 태양이고 2는 달이며 3은 새벽별이다”
_ 박용숙, 《천부경 81자 바라밀》, 소동, 2018.


두 몸짓, 세 몸짓, 한 소리, 그리고 악기음이 변주하는 한옥의 공간은 한 우주이리라.5) 지붕을 받치는 기둥 사이의 마루는 이쪽과 저쪽을 터서 열렸고, 그 열린 이쪽과 저쪽으로 마당이 펼쳐졌다. 벽을 에돌아가면 정자 마루가 있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자미궁(紫微宮)의 별자리와 다르지 않았다. 영상의 마지막 문장은 이쪽의 카메라가 저쪽, 저 너머로 사라지는 짓의 몸말들을 가만히 보는 일이다. 그 ‘봄’의 경계가 자미궁의 가장자리일 것이다.


한 몸짓으로 마당에서 추는 춤은 뜨거웠다. 그 몸의 짓은 ‘얼빛’으로 환하게 밝은 몸의 자유를 누린다. 그 자유에서 한 소리가 터졌다. 뜨거운 얼빛의 붉은 소리가 가 닿은 곳이 정자마루다. 그리고 흰 포말의 두 빛이, 두 몸짓이 달빛 댄스를 추었다. 그들은 마치 흰 그림자 같았다.


마당에서 정자마루로 갔다가 다시 마당으로 오는 동안, 한 사람의 몸짓을 소리꾼이 두 몸짓으로 이었다가 다시 세 그림자로 틔웠다.6) 뜨거운 불이었다가, 흰 달그림자로 나뉘었다가, 다시 새벽별에 이르는 순간들처럼 보이는 이 장면들은 몸짓이 몸말의 언어를 궁리하면서 새겨놓은 어떤 무늬 같았다. 몸짓마다 새겨지는 숨결들이 마당에 가득했다. 그 결의 무늬가 공간을 음각으로 새겼다.


마지막 씬. 카메라는 몸이 사라진 빈 공간을 비춘다. 마당과 마루와 기둥 사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순수한 공간에서 눈이 들었던 몸말의 언어가, 그 언어의 빛들이, 그 빛의 음각들이 되살아난다. 무수한 빛무리가 터져서 환한 ‘짓’의 기억[刻]을 불러낸다. 기억을 불러내는 이 몸말의 미혹[幻]이 바람[風]이요, 본성[情]일 것이다.




4. 짓이 쓴 문장들, 거친 숨 
장소 _ 용산구 이태원로 240. mmmg 빌딩 앞


반도네온의 음으로 쓴 문장들은 단문들로 이뤄진 문장들이다. 단문이 그리는 장면들에서 무용은 긴 문장이 되지 못한다. 반도네온에 바람을 불어서 밀고 당길 때 음은 강약을 탔다. 소리는 의뭉스럽게 늘어졌다가 길게 음을 낮추기도 하고 한순간에 올라서기도 했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이 속도를 조절했다. 여러 음들이 손가락 마디에서 뒹굴었다.


열 한 명의 무용수는 빌딩 앞 길쭉한 네모 마당에서 쏠리고 흩어지고 앉고 서고 구부리고 하면서 둘둘, 셋셋, 넷 다섯, 혹은 둘 다섯으로 반도네온의 음 위를 걷고 뛰었다. 소리가 의뭉스러울 때 짓은 의뭉스러운 장난을 쳤고, 음들이 뒹굴 때는 몸들도 뒹굴었다.


그들의 몸짓은 길게 이어지는 장편이 아니었다. 반도네온의 음이 단문이듯이 그들의 행간도 단편을 이루며 높낮이를 그렸다. 무용수들은 몸으로 짓을 형상화 했는데, 때때로 몸들은 서로 타자가 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가 되었다. 마치 복문으로 된 문장처럼 하나의 장면에서조차 몸들은 서로 다른 짓을 하며 문장을 만들었다.


서로 다른 짓의 문장은 울리포의 ‘제약’을 떠올리게 했다. 어떤 몸짓들의 구성은 순차적인 몸말의 구조를 따라서 이어지는 듯했다. 또 어떤 몸말의 몸짓은 상실과 일탈을 보여주는 듯했고, 어떤 놀이는 무용수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동선을 따라 작고 큰 얼개를 만들기도 했다.    




모든 몸짓들은 건물의 위에서, 건물의 앞에서 보는 카메라의 두 눈에 담겼다. 카메라의 두 눈도 몸짓의 한 방편이서 ‘제약’으로 작동하는 기계라 할 것이다. 그 구조 내부에서 몸짓은 몸말의 잠재태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는 실험을 강구해야 한다. 춤의 몸짓에 끌어 들인 놀이는 수학, 음악, 문학, 신화를 농쳤다. 제약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은 그 내부에서 몸짓의 잠재태를 먼저 해방시켜야만 가능하다.


원피스를 입은 여자 무용수는 검정, 빨강, 분홍, 보라, 파랑, 녹색으로 현란하다. 남자 무용수는 무채색이다. 유채색과 무채색은 두 개의 패와 같아서 서로 쌍을 이루며 끊임없이 놀이를 재편성했다. 춤과 몸짓과 놀이와 색색의 몸말들이 아코디언의 음을 타면서 쓴 말글은 일상에 속박되었던 짓의 구속을 자유롭게 풀어 헤쳤다. 

 

“바다, 그래, 그 바다는, 여느 크레파스보다 진하디 진한, 푸르다 못해 검푸르고 거대하며 육중한 비늘을 그토록 무겁게 뒤채면서, 거친 숨을 내쉰다.”
_ 남종신, 손예원, 정인교, 〈누구의 것도 아닌〉, 《잠재문학실험실》, 작업실유령, 2013.


본래 이 문장은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흐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이다. 문장은 주장, 반복, 되풀이의 제약으로 뒤틀렸으나, 아름답게 변주되었다. <풍정.각2>의 몸짓이 펼치는 문장도 주장과 반복과 되풀이의 순간들이다. 송주원의 안무는 스스로 제 안무를 반복하면서 신나는 놀이를 펼쳤고, 명징한 유희의 장면들을 변주해 냈다.


몸의 짓으로 말글을 창조하는 것인지, 말글의 창조가 몸과 짓을 이루는지는 모를 일이다. 몸과 짓이 하나를 이룰 때 그것이 ‘망설임’인지, ‘욕설’인지, ‘이야기’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울리포의 작가들은 99가지 상이한 방식(은유, 회고투, 놀람, 꿈, 부정문, 망설임, 욕설, 공식서한, 의성어, 주장, 무지, 불완전 과거, 미래, 과장법, 반복법, 속어, 의문문, 희곡, 철학투, 환상투, 더듬는 말버릇, 무례한 말투, 자유시, 단정적 어투, 무기력, 모던 스타일 등)으로 변주했는데, 그의 안무도 종종 그런 변주를 떠올리게 했다.




5. 흔들어 깨우는, 명적의 몸짓들  
장소 _ 옥인동 47-133번지. 통의동 골목


명적(鳴鏑)은 우는살이다. 살은 화살이다. 화살촉에 사슴뿔로 만든 피리를 달아서 살은 하늘을 날며 운다. 골목에서 춤을 추는 몸짓들, 헌집 대문 앞에서, 층층이 좁은 계단에서, 오토바이 위에서, 아찔한 담벼락에서 몸짓들은 타악과 현악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음 위에서 춘다. 운다. 달린다. 까분다. 신난다. 논다. 우는살의 음이 몸을 깨운다. 그 몸에 우는살이 있다.


흩어지고 사라지고 도망치고 이사 가고 쫓겨난 동네에서 접신의 춤을 추는 ‘짓’은 몸이 없는 짓이어서 유령 같고 귀신 같고 그림자 같다. 공기에 깊이 새겨진 오래된 그림자들, 산 춤의 짓이 흔들어 깨우자 그림자는 다시 몸으로 살아서 동네를 뛰어 다닌다. 동네는 어느 새 활기로 가득하다.


골목의 근경과 원경에서 골목에 음각된 사라진 사람들의 어떤 일상들을 벗겨내는 일은 오롯이 몸짓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안무는, 내달리고 뛰고 장난질하는 몸들의 그림자를 숱하게 불러내어 ‘짓거리’의 음각을 돋을새김으로 뒤바꿨다. 그러자 짓은 몸을 얻어 생기발랄하게 장소들을 잇기 시작했다.




<풍정.각4>는 대한민국 현대사가 상실해 온 풍경들의 속살을 보여준다. 무용수들은 그 원형의 속살로 들어가 스스로 그림자 되기를 수행했다. 처음에 그들이 곳곳의 장소들에서 혼자, 둘이, 여럿이 펼치는 짓거리는 짓의 그림자일 뿐이었으나, 골목과 골목이, 집과 집이, 담과 담이, 놀이와 놀이가 신나자 불현 듯 살아 오른 것이다.
한 방울의 물에 숭고가 있고 바람 한 점에도 숭고가 있다. 숭고는 한 호흡에도 있다.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의 숨결에서 숭고는 찬란한 ‘얼빛’이다. 숭고는 그 이면에도 존재하는데, 어둡고 불확실한 그림자에서 무섭게 돌변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한(恨)의 신명이 곧 숭고이리라.


옥인동, 통의동에 어둠이 내릴 때 짓거리를 추었던 몸들은 다시 그림자로 돌아갔다. 동네를 찾은 한 청년이 본 것은 그렇게 그림자로 돌아간 몸들의 등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러하듯 포조의 실명과 두 주인공의 끝없는 기다림이라는 허무와 비극의 세계인식이 떠돈다. 부조리한 삶에 깃든 블라디미르의 실존적 독백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는 그러한 비극적 세계의 내부 묘사에 다름 아니다. 옥인동과 통의동에서 들리는 소리는 무엇일까?




*** 이 글은 창동 레지던시 입주작가인 안무가 송주원을 위한 매칭 비평이다.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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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풍정.각>은 영상이다. 다큐 영상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나, 정확하게 말해서 독자적인 하나의 ‘영상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무가 송주원의 안무와 그에 따른 무용수들의 춤을 기록하는데 초점이 있고, ‘춤’의 시간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다큐적 기록 영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되, ‘편집’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 따라서 영상은 다층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2)‘울리포’는 프랑스의 시 창작 집단이다. 그들의 철학은 시작(詩作)과 수학을 통섭하는 것이다. 수학자와 시인들로 구성된 울리포는 1960년에 설립되었고, 두 권의 공동 창작집을 출간했다. 남종신 손예원 정인교가 펴낸 『잠재문학실험실』(작업실유령, 2013) 115~118쪽에서는 이렇게 적혀있다. “우(OU), 이것은 바로 작업실(OUVROIR), 아틀리에이다. 무엇을 제작하려고? 리(LI)를. 리(LI), 이것은 문학(littérature), 우리가 읽는 것이자 지워버리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리(LI)를? 리포(LIPO)를. 포(PO), 이것은 잠재성(potentiel)을 뜻한다. 무수한, 잠재적으로 영원히 생산 가능한, 모든 까다로운 실제에 있어서 다량의, 무한정의, 문학에 대하여. 누가? 달리 말하자면 누가 이 가당찮은 기획의 책임자인가? 레몽 크노(Raymond Queneau), RQ, 초창기 창단자 중 한 사람, 그리고 프랑스와 르 리오네(François Le Lionnais), FLL, 공동 창단자이자 대부, 최초의 그룹 대표, 그 새로운 설립자 대표(Fraisident-Pondateur).”


3)미술평론가 박용숙은 『천부경 81자 바라밀』(소동, 2018)에서 “우리는 앞에서 지구가 자전 공전하는 모양새를 ‘공空’이라고 했다. 지구의 자전 공전은 합리도 아니고 불합리도 아니고 합리와 불합리의 혼합체라고 하면 어떨까. 이것이 메두사의 빛이다.”라고 했는데, <풍정.각1>의 첫 부분(남여가 마루에서 추는 춤)이 꼭 그랬다. 우주(宇宙)는 ‘집’이라는 단일한 개념에서 시작한다. 집 ‘우’, 집 ‘주’이다. 둘의 춤은 집이라는 텅 빈 ‘공’에서 자전과 공전으로 돌아가는 춤으로 읽혔다.  


4)사전적으로 카오스모제는, 카오스가 일관성을 부여하고 사건들의 경과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뜻하나, 쉽게 말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상호침투’를 말한다. 펠릭스 가타리의 최후의 저작은 『카오스모제』이다. 모든 사물은 새로운 배치와 접속을 통해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는 것이 상호침투의 개념이다.


5)위의 각주 4)를 잇는 것이 카오스모제로서의 ‘잔망스런 수다’이다. 몸말이 터지는 수다는 아리랑 스리랑의 수다이기도 하다. 박용숙의 『천부경 81자 바라밀』을 한 번 더 인용하면, “‘아리랑’은 봄여름의 지구이고 ‘스리랑’은 가을겨울의 지구이다. 아리랑이 스리랑이 되고 동시에 스리랑은 아리랑이 되는 빛 그림자의 신출귀몰하는 곡예인 것이다. ‘아리랑고개’란 『천부경』에서 ‘끝나는 것이 뒤집혀서 다시 이어진다.’는 뜻의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다.” 춤은 ‘빛 그림자’로 곡예를 타듯 뒤집혀서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이때 ‘빛 그림자’가 바로 ‘흰 그림자’이다.


6)위의 각주 5)를 잇는다. 각주 5)의 본문 “두 몸짓, 세 몸짓, 한 소리, 그리고 악기음이 변주하는 한옥의 공간은 한 우주이리라”와, 각주한 6)의 본문 “사람의 몸짓을 소리꾼이 두 몸짓으로 이었다가 다시 세 그림자로 틔웠다”는 실제로 작품에서 2-1-3-5로 이어지는 무용수의 수를 헤아리다가 생각한 개념이다. 『천부경』에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이란 말이 있다. ‘일시무시일석삼극무진본’으로 읽고, “모든 것은 하나에서 시작하나 그 하나는 시작이 없고, 하나가 나뉘어 셋이 되지만 그 다함이 없는 근본은 그대로이다.”로 푼다. 그 중 ‘일석삼극(一析三極)’이 중요하다.


*** 이글은 2018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스튜디오 매칭비평을 위해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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