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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 | 그대로의 제주 - 강요배, 김옥선

김종길

그대로의 제주


강요배展 5. 25~6. 17 학고재 갤러리
김옥선展 6. 21~8. 8 일우스페이스


제주는 바다에서 불로 솟았다. 불덩이가 펄펄 끓어오르고 치솟아 섬이 되었다. 바다가 낳았으니 그 섬은 흐르는 땅이요, 그 땅에서 솟은 산은 선경(仙境)이어서 영주산(瀛洲山)일 터. 거기,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은하수를 당길 수 있으니 그 산의 이름이 오래전부터 한라산(漢拏山)이다.


그 섬의 첫째 날, 땅 구멍 세 곳에서 참사람[眞人/神人]이 솟았다. 참사람들은, 자줏빛 흙 바른 목함(木函)이 동쪽바다의 파도를 타고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다다르자 함을 열었다. 그 함에 옥함(玉函)과 심부름꾼[使者]이 있었다. 심부름꾼이 옥함을 여니 파란 옷을 입은 세 여자가 나왔다. 그 여자들은 소, 말, 다섯 곡식의 씨앗도 가지고 있었다. 탐라의 옛 이야기다.


강요배는 그 탐라의 신화를 날마다 엿보았다. 불이 솟나는 순간들을 마음에 새겼고, 흐르는 땅의 세찬 바람이 구름을 몰고 나무를 뒤흔드는 풍경을 그렸다. 그 풍경은 현실이었으나, 마음이 아니고서는 토해지지 않았다. 풍혈(風穴)과 풍목(風木)과 풍광(風光)이 펼쳐지는 작업실 마당 동쪽 풍경은 그래서 ‘항산(恒山)’이었다. 늘 거기 그대로의 한라산이 있었으니까. 그 산은 그에게 하나의 ‘상(象)’이었다.


김옥선은 카메라의 마음거울로 너들[他者]의 벗을 엿보았다. 자줏빛 목함 속의 심부름꾼이 옥함을 열 듯, 파도를 타고 제주에 다다른 이곳저곳의 벗들과 그 벗들의 삶을 눈부처로 박았다. 제주에서는 종려나무가 일상이듯이 토속과 이국의 경계는 오롯이 사진을 읽는 사람들의 편협(偏狹)에만 있을 터. 흐르는 섬에서 솟아난 사람들과 파도를 타고 온 사람들이 가족을 이룬 삶의 나날은 그래도 낯설었다. 그 섬은 남쪽에 있다.




빛살무늬 사진


일우사진상 출판 부문에 선정되어서 기획된 김옥선의 전시는 환한 빛살들의 무늬로 가득했다. 흰 빛 무늬의 빛살이 투영되어서 마음거울에 박힌 사진 속 나무들은 놀랍고 신기했다. 그것들은 오래전 한라산에 깃들어 살았던 흰 사슴을 떠올렸다. 숲 속의 흰 사슴은 사슴신이어서 삿된 것들을 치유하는 영험을 가졌다. 백록담(白鹿潭)은 우리말로 흰 사슴 못이다. 종려나무는 펄펄 끓었던 땅에 뿌리를 박고 서서 눈부신 머리칼을 흩날리고, 소나무는 넝쿨에 휩싸여서 용오름으로 치솟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내는 그 나무의 속살을 가진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이 전시는 한 판 휘모리장단으로 몰고 가는 회고(回顧)의 한 가닥처럼 보였다. 사진을 찍고 전시했던 그의 많은 시간들이 한데로 섞여서 다른 언어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1996년 이후에 발표한 서로 다른 사진들이, 서로 다른 말들이, 서로 다른 풍경들이 뒤섞여서 회오리의 문장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회고의 방식은 창조적 술수일 것이다. 그의 사진 언어가 새 언어를 입기 위한 탈바꿈이요, 이 세계 너머의 풍경을 엿보기 위한 시적 교란일 것이다.     


2016년 7월, 동강사진상 수상자전. 동강사진박물관 제3전시실에 펼쳐놓은 사진들은 충동과 이질과 하늘과 골목과 숲과 바다와 그 여자, 그 남자, 그 나무들이 모두 ‘낱생명’으로 홀로였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남쪽/제주’에서 마주친 그 모든 풍경들이 서로 어긋나고 겹치고 끼어들면서 카오스모제(chaosmose)의 전시구성을 보여주었다. 그 구성이 교란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요란을 떨진 않았다. 오히려 전시장 분위기는 놀랍도록 고요했고 작품들도 그 고요 속에서 당당했다.


그렇다면 회오리 문장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사진들은 스스로 “우리의 뿌리와 줄기, 열매는 무엇인가?”를 외쳤고 그 소리는 하늘과 땅을 갈라 치는 혼돈(混沌)이었다. 나무들은 어울리지 못하고 땅에 홀로 섰으나 전시장에서는 서로를 마주해야 했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창가 의자에 앉아서, 거실 진열장 앞에서 사람들은 그저 그들로 있었다. 그들로 앉아서 또한 그곳에서 나란했다. 때때로 어떤 나무들은 팽나무도 아니고 그래서 당산나무도 아닐 터인데 영험한 신목(神木)처럼 환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힘차게 웃자란 가지와 잎이 아등바등 해바라기하는 몸짓은 숭엄하였다. 그 옆에서 한 여자가 상실을 앓고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숭엄’과 ‘상실’을 나란히 놓으니 어느 새 그늘이 사라졌다. 그늘이 사라진 곳에서 ‘빛’이 환하게 터졌다. 사진들은 그렇게 2개씩, 3개씩 쌍을 이루며 벽에 걸려서 경계를 풀고 관계를 잇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사실 혼돈이 아니었다. 새로운 ‘온생명’의 관계학이었고 그 관계의 미학은 제주에 다다른 씨앗과 사람과 바람과 파도와 햇살의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김옥선은 궁리했을 것이다. 본래부터 있었던 것들은 무엇일까? 수천수만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본래 있던 것들의 정체성이 무의미해 졌을 때, 그 때, 이방(異邦)의 것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것일까? 토속은 무엇이고, 이국은 또 무엇일까? 호기-심, 경계-심의 그 호기와 경계가 갖는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가 솟아난 구멍은 어디일까? 그 많은 종려나무는 다 어디에서 왔을까? 그는 <방 안의 여자>(1996)이후, 2002년 <해피 투게더>(대안공간 풀)에서, <함일의 배>(2006~2008, 금호미술관)에서, <No Direction Home>(2011, 한미사진미술관)에서, 그리고 <The Shining Things>(2014, 한미사진미술관)에서 그런 질문들을 이어 나갔다. 그 질문의 소실점에 ‘제주’라는 섬이, 한 마리의 고래가, 파도를 타고 다다른 한 척의 배가 있는 게 아닐까!




코끼리 추상


강요배는 탐라국 사람이다. 이 말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면 그의 그림과 그림의 속뜻은 끝내 온전히 밝혀지지 못할 것이다. 그가 탐라국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의 존재와 의식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총체로 보았을 때 명료해진다. 존재를 ‘사람’ 중심에 두면 강요배는 지금 여기의 남한사람이요 제주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한 존재, 존재자로서의 예술가 강요배를 다시 말해야 한다면, 그는 분명히 탐라국 사람이다. 그의 의식과 사유는 탐라가 탄생했던 불의 시원에서부터 수천 년 제주역사를 교통하고 통어한다. 정치사회사는 물론이요 생물지리 자연생태사의 총화로서의 제주역사를. 


그는 시인 옥타비오 빠스가 「선명한 과거」(1974)에서 “나는 자라났다. 나는 이름 없는 폐허 속에서 자라난 잡초였다.”고 고백하듯이, 6․25전쟁과 4․3항쟁에 따른 폭압적 현실이 끊이지 않았던 1952년 제주의 폐허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런 다음 육지로 나가서 청년기를 보냈다. 남쪽의 청년 강요배는 교사였고 문화운동가였으며 비판적 현실주의를 지향하는 예술가였다. 그는 한국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예술가로서 반독재 민주사회를, 사회와 밀착하는 예술을 꿈꾸었다. 1981년부터 그가 참여한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미학적 실천주의는 모순으로 들끓는 우리사회의 현실을 낱낱이 뒤집어 까발리는 ‘바깥미학’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4.3이 아닌, 4.3의 너머에서, 제주로 돌아와 제주를 볼 때는 그 ‘바깥미학’이 오롯이 탐라의 오래된 풍경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러니 잡힐 것 같지 않은 소실점이 김옥선의 사진미학에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완연한 근경(近境)의 제주풍경은 강요배의 회화미학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도 먼 풍경이 있으나 그것은 소실점이 아니라, 늘 화제(畫題)의 중심이 되는 한라산이다. 그는 작업일지에 “삶의 풍파에 시달린 자의 마음을 푸는 길은 오직 자연에 다가가는 것뿐이었다. 그 앞에 서면 막혔던 심기의 흐름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하다. 부드럽게 어루만지거나 격렬하게 후려치면서, 자연은 자신의 리듬에 우리를 공명시킨다.”고 적었다. 그는 자연이 일으킨 공명을 마음으로 받아서 붓춤을 추는 화가다. 빗자루로, 말린 칡뿌리로, 종이를 접어서 캔버스에 색을 바른다. 상(象)이 마음에 치솟아서, 상이 마음에 물 부서지듯 흩날려서, 상이 마음에 우레비로 쏟아져서, 그는 늘 그런 붓으로 붓춤을 추며 제주를 그리는 것이다.


그의 작업과정은 얼핏 신명의 굿판이다. 갈필의 온갖 붓들을 손에 쥐고 큰 캔버스에 색덩이를 쳐 바를 때 그는 영락없이 샤먼 예술가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붓바람 붓춤이 아니고서는 펼쳐지기 힘든 색들의 현란한 춤판이다. 붓짓과 색짓의 짓거리를 몸짓과 섞어서 흥을 틔우다가 일순간 접신한 듯 추게 되는 그의 붓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풍경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종잡을 수 없이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현실과 제주풍경들의 장면 장면을 불러내어 신화 ․ 전설 ․ 역사를 되묻고, 다시 그 내부에 쌓였던 수천수만의 삶의 호흡과 결을 어루만지기 위해서이다.


마음거울에 치솟는 상을 쫓는 것이니 그림의 본질은 눈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보고 바로 그리지 않는다. 그 상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간직한 뒤, 그 강렬했던 느낌과 기억을 끄집어내어 그린다. “본 것을 내 마음을 통해 여과해 추상적인 이미지로 그린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어떤 그림이 그림다운 그림이냐고. 압축되어 있는 것, 상징적인 것, 바로 그 상을 잡아내는 것이 그림 본연의 몫이라고 나직이 말한다. 그는 지금 그 몫을 쫓고 있는 것이다. 인상이요, 추상이요, 표상이요, 형상인 상 본연의 몫을!


** ART in culture 2018년 8월호 포커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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