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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환기와 소통 - 고길천의 예술행동주의 미학

김종길


환기와 소통
- 고길천의 예술행동주의 미학


김종길 | 미술평론가


진인(眞人)이란 언젠가 때가 오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새 국가를 창업한다는 비기(秘記) 속의 인물이다.
_ 고길천, 〈진인의 무기1〉(1992)에서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미국의 테러와 폭력을 집중적으로 반대했다. 첫째 미국의 행위는 국제적 폭력사태의 중요한 요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둘째 미국의 행위는 내가 대응하여 뭔가 할 수 있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_ 노암 촘스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3:민중이 권력에 저항하는 방식에 관하여』(시대의 창, 2005)에서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동하기 위해 태어났다.
_ 프리드리히 셰링, 『촘스키의 아나키즘』(해토, 2007)에서 재인용




비기(秘記)가 전하는 진인(眞人)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고, 그래서 그 사람은 고통의 현실로부터 민중을 구원할 구세주여야 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 앞에 나타난 ‘진인’ 트루먼(Harry S. Truman/미국 제33대 대통령, 재임 1945~53)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시켰고, 반소․반공을 골자로 ‘트루먼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했다. 그는 결코 진실(Truth)한 사람(Man)이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에 재선되던 해인 1948년 제주는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 찍혔다. 4.3은 트루먼독트린의 지옥불일지 모른다. 고길천은 4.3을 사유하면서 ‘진인’의 존재와 실체를 캐물었다.


고길천의 ‘물음’은 끈질긴 데가 있었다. 4.3은 양파껍질 같아서 까면 깔수록 새로운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단독 선거 반대, 이승만의 정권 야욕과 반공정책, ‘빨갱이 섬’의 낙인, 서북청년단 입도, 좌익 색출, 양민학살, 학살, 학살…. 도대체 왜? 그의 물음표 화살들의 과녁은 모두 팍스 아메리카 ‘미국’을 향했고, 거기에 한 국가의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폭력성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 )가 그의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던지고 있었다. 물론 책에서 말이다. 그는 촘스키를 만나기로 작정했다.


촘스키에게 달려가기 전에 그는 ‘아나키즘’을 집어 들었다. 제주라는 섬과 그 섬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나, 아나키스트인 촘스키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촘스키의 아나키즘』(해토, 2007)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의 아나키즘은 계몽운동과 고전자유주의에서 싹텄던 ‘진정한 연대와 공동체’, ‘상호지지와 상호연대’ 같은 것들이다.


촘스키는 그의 책에서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바쿠닌(Bakunin, Mikhail Aleksandrovich, 1814~1876)이 파리 코뮌에 대해 쓴 “나는 자유를 좋아한다. 이 자유는 국가가 부여하고 할당하며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가 특권을 누리고 나머지 대다수는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오직 우리 인간본성의 법칙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는다.”를 아나키즘의 핵심으로 인용했다. 고길천은 제주의 ‘조냥정신’을 떠올렸다. 쌀독에서 바가지로 쌀을 뜰 때마다 쌀 한 줌을 다른 항아리에 옮겨서 아껴두었다가 쌀이 떨어졌을 때 나누는 것을 말하는데, 이 조냥정신에서 제주 방식의 아나키즘을 생각한 것이다. 촘스키의 아나키즘과 제주의 조냥정신은 많이 닮았다. 결국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촘스키를 만났고, 4.3에 대한 미국의 폭력성을 서로 공감하고,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지지도 이끌어 냈다.


이렇게 보면, 고길천이라는 한 사람은 4.3의 실체를 미학적으로 궁구하는 예술가이면서 아나키즘을 연대하는 평화운동가이고, 실천적인 예술행동주의자일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많은 작품들은 4.3미술과, 4.3을 성찰하면서 시작한 생명․생태운동으로서의 생태미술, 그리고 반인륜적이고 반생태적인 모든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는 정치미술로 구분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약 30년의 미술세계를 망라하는 전시이다. 그러나 전시만으로는 그가 살아 온 생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작품은 또 과작(寡作)이어서 30년을 엿보기 위해서는 한 점 한 점을 세밀하게 살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그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그가 왜 실천하는 예술행동주의자인지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사실 필자에게 이번 전시는 5년 전에 치렀어야 할 평화박물관 초대전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그만 그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전시는 기약 없이 연기되었다. 강정의 예술행동을 지속적으로 아카이브하면서 예술가들의 동참을 이끌어내자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일어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작년과 올해, 그의 제주 원도심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가 뜨거운 열의(熱意)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목격했다. 
    



2004년에서 2013년 사이, 대추리에서 강정까지 

2013년, 뇌출혈


2013년 8월 6일 오후 1시에 문자가 떴다.
“고길천 선생님 8월 3일 강정평화대행진 중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현재 한라병원 응급 중환자실에 계심. 연락바람. 최성희”
긴급한 문자였다. 3일과 4일, 주말을 보내고 뒤를 이어서 7일까지 휴가를 보내는 중이어서 문자를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1시간 19분이 지나서야 문자를 확인하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휴가 중이어서 문자를 이제야 보았습니다. 문자 받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현재 상태는 좀 어떠신지요?”
1시간 7분 뒤에 다시 답장이 왔다.
“며칠 있으면 일반 병실로 옮기실 것임. 상태는 호전되고 있어요. 지금 병원 가는 중.”
22분 후에 문자를 보냈다.
“근일 중 내려가 뵙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겠습니다.”
바로 답장이 왔다.
“감사합니다. 일반병실로 옮겨지면 카페에 공지할게요.”


그리고는 며칠 간 잊고 살았다. 휴가를 끝내고 복귀했으나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우선 7월까지 처리했어야 할 2014년 예산 작업이 시작도 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8월 중순까지는 핵심사업 콘텐츠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흘이 지나고, 9일 12시 8분에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걱정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8월 3일 행진 때 뇌출혈로 쓰러지신 고길천 작가님, 한라병원 응급 중환자실에 계시다 어제 8일 목요일, 일반 병실 936호실로 옮겨졌습니다. 뇌를 다치셨으므로 의식이 완전 명료해지기 전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현재 24시간 간호가 필요하며 교대 인력이 논의될 것 같습니다. 남자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음 주 이후 어느 때고 잠시 몇 시간이라도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는 분들은 저에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제야 빠르게 흐르던 시간을 일시정지 상태로 돌려놓고 곰곰 생각에 빠졌다. 여차하면 주말에라도 내려가 봐야지 하는 생각과, 내려간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엔가 하는 생각, 게다가 8월 14일까지 연장해 놓고 있는 평화박물관의 <제주 강정해전> 전시마무리 생각, 2014년 4월로 계획된 평화박물관의 초대개인전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엉켜서 머릿속을 뒹굴었다.




2004년, 4․3미술


고길천 작가와는 2004년에 만났다. 당시 경기문화재단에서 발간하고 있던 『기전문화예술』에 ‘작가 대 작가’라는 꼭지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작가 대 작가’라는 것이 두 명의 목판화가를 취재하고 인터뷰해서 쓰는 글이었다. 김준권 선생이 추천한 홍진숙 작가의 거주지와 작업실이 제주여서 제주로 넘어 가게 된 것이 계기였다.


홍 작가의 작업실은 사실 고길천 작가의 판화공방이었다. 1박 2일 일정으로 내려가 취재를 했고 밤에는 제주작가 예닐곱 분과 어울렸다. 다음날 아침, 추가 취재차 공방에 들렀을 때 고길천 작가와 만났다. 그는 얼굴로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눈빛이 예리했으며 말수가 적었다. 그런 그가 4․3미술 10주년 자료집을 건네주며 “미술평론가라면 이런 활동을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나?” 했을 때는 너무나 선명한 말의 힘에 기가 눌렸다.


제주 사람들은 종종 “육지 것들!”이라고 힘주어 말하곤 한다. 제주는 육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깊은 신화적 내력과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바람 여자 돌이 많다고들 떠들지만, 그것은 제주를 일도 모르는 자들의 관념적 수사에 불과하다. 제주는 맵찬 칼바람이 시시때때로 불어올 만큼 바람이 많은 게 사실이고, 1932년 1월 제주 해녀들의 항일 투쟁에 동부지역에서만 연인원 1만 7천여 명이 참가할 정도로 여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며, 화산섬답게 현무암 잔돌도 많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제주를 대표하는 정체성의 핵심어는 아니다.


삼별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제주는 충분히 많은 수난과 민란과 항쟁을 겪었던 역사를 가졌고, 육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1만 8천여의 신화적 서사를 가진 신화의 땅이며, 두어 달 뱃길이 말해 주듯 고향으로 돌아가기 힘들었던 아니 목숨조차 제대로 부지할 수 없었던 유배의 땅이었다. 


고길천 작가가 건네 준 4․3미술 10주년 도록과 몇 권의 책을 받아들고 어안이 벙벙했다. ‘4․3미술이라니, 도대체 4․3이 언제 적 사건인데 지금 그 미술을 하고 있단 말이지?’, ‘아니, 좋아,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55년이나 지난 역사를 이제 와서 뭘 어떻게 작업한다는 거야?’ 이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았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시대가 1994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전>으로 역사적 종지부를 찍었을 때, 탐라미술인협의회는 ‘4․3미술’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고 거기에 작가들이 모여들어 현장을 답사하고 의제를 토론하면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민중미술’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4․3을 통해 제주인과 제주역사의 신명나는 주체회복을 꿈꿨다.


그 뒤로 그는 매 년 4․3전야제에 참석하라는 전화를 걸어 제주행을 독려했고, 그 인연으로 4․3미술제를 연구의 큰 줄기로 키우게 되었다. 처음엔 4․3미술제에 참여한 작가들과 얼굴을 텄고 시나브로 출품작을 분석했다. 전시리뷰를 길게 발표할 지면이 부족해서 짧은 단편을 미술지에 기고하는 게 고작이었으나, 4․3미술은 어느새 1980년대 민중미술과 함께 나의 한국현대미술사 연구의 고갱이가 되었다.











2007년, 제주 강정


2007년, 대추리 현장예술 활동을 백서로 남긴 뒤에 다소 지쳐 있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따른 대추리 주민들과 활동가들, 예술가들, 종교인들의 저항은 새대추리 정책의 주민 수용과 함께 종료되었다. 그런데 하나가 닫히자 다른 하나가 터졌다. 그것은 마치 쉼 없이 배턴을 주고받으면서 달리는 계주와 같았다. 대추리의 배턴이 곧장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이어졌고 바다 건너 제주 강정으로도 튀었다.


모두들 부산 한진에 집중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남일 같지 않았다. 부산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부산역에 집결한 희망버스 사람들과 조우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김진숙 위원장은 ‘희망 영웅’이 되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싸움은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제주 강정이 문제였다. 강정은 오히려 부산 때문에 잊히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영화감독 양윤모 단식투쟁 64일째”라는 소식이 속보로 타전되었다. 2011년 6월의 일이다. 그는 단식투쟁과 구속, 수감, 옥중투쟁, 석방을 반복하면서 투쟁을 쉬지 않고 있었다. 영화감독 양윤모 선생의 단식 속보는 희망버스 열기로 묻혔던 제주 강정의 해군기지 문제를 재인식, 재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그 즈음일 것이다. 2011년 4월인가 5월 쯤, 고길천 작가한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무조건 내려오라는 전갈이었다.


몇 명의 기획자와 기자 한 명을 데리고 그곳을 찾았다. 고 작가는 강정과 구럼비를 투어 시키며 상황을 설명했다. 해군기지 공사현장과 강정이 파괴되어선 안 되는 이유들, 예술가들이 무엇을 했고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는 이미 대추리를 방문해서 예술가들의 예술해동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직접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는 내게 무조건 최평곤 작가부터 내려오게 해달라고 종용했다. 종용이었다.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또 그것은 4․3미술을 전염시킨 뒤에 비평적 작업을 요구했던 맥락과 다르지 않았다. 그 종용을 받아 곧바로 최평곤 작가를 밀어 붙였다. 최 작가도 내 종용을 거부하지 못할 약간의 마음 빚과 충분한 친분이 있었다. 시간을 쪼개서 낱낱의 분초를 땀으로 메꾸며 사는 그가 종용을 받아 들였다. 그는 트럭을 몰고 완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


대추리 황새울 들녘에 <문무인상>을 세웠던 그는 도착하자마자 곧장 작업에 돌입했다. 강정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구럼비 지킴이>를 세우고 <가시고기>를 세웠다. 세운 뒤에는 하늘에 제를 올려 ‘지킴이’가 구럼비와 강정에 평화를 가져오기를 기원했다. 그것은 강정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 작가의 작품이 솟대와 장승처럼 구럼비에 서자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이 이어졌다. 플래카드를 제작해서 보내는 작가들도 있고, 파견미술팀처럼 팀으로 몰려가 퍼포먼스, 걸개그림, 그라피티를 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영상, 사진, 회화, 드로잉 등 매체 미디어를 불문하고 다양한 예술가들의 참여가 줄을 이었다. 그 예술가들의 활동을 고길천 작가는 묵묵히 기록했다.


우리 둘이 ‘강정해군기지 반대 예술행동프로젝트’(공식 주관은 강정마을회와 탐라미술인협회로 했다)라 명명한 2011년의 ‘예술가 제주 강정 파견 보내기’는 그렇게 결실을 맺고 있었다.


강제욱, 고권일, 고경화, 노순택, 송동효, 양동규, 알파 뉴베리(미국), 에밀리 왕(대만), 임윤수, 사진집단 현장, 최성희, 홍보람, 홍원석, 홍진숙으로 꾸려진 <동행Ⅱ>전은 그 해 11월 20일 강정마을회관에서 아카이브전 형식으로 개최되었다(프로젝트 기간은 6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로 정리했다. 실질적인 프로젝트의 시작이 그 해 6월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모든 기획의 배후에는 고길천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초대장에 쓴 그의 육성이다. 
 
초대의 말씀                          
여름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예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숨 가쁘게 치달은 해군기지반대 운동에 미술로서 현장을 채우기 시작 했습니다. 이번 예술행동 프로젝트 <동행Ⅱ>은 5월 30일 민족미술협회의 강정해군기지건설 반대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진행된 6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자 합니다. 약 50명이 넘는 참여 작가 중에 21명이 강정마을 현장에서 작업한 회화, 영상, 사진작품들을 여러분에게 선보이려고 합니다. 비록 지난 9월 해군측이 중덕 삼거리 침탈로 인해 펜스로 가로 막혀 구럼비에 있는 작품들은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구럼비와 함께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행사에 참여 하셔서 많은 격려와 성원 바랍니다.
- 2011년 11월, 강정마을회 탐라미술인협회


2011년 이후, 다시 2년 간 지속된 예술가들의 기록까지를 모아서 총 7년간의 기록을 평화박물관에서 전시하기로 했고, <제주해전>이라 이름 붙인 그 전시는 2013년 8월 14일까지 장장 두 달간의 전시기간을 끝내고 막을 내렸다. 그 준비를 위해 제주에 갔을 때 그는 제주 원도심에 마련한 작업실을 보여주었다. 강요배 작가가 그랬듯이, 그도 강정에서의 7년 투쟁을 기록화로 남기고 싶어 했다. 평화박물관은 그 해 연말이나, 2014년 4월에 그 기록화를 전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쓰러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그와 전화하면서 제발 부탁이니 작업실에 들어가 작품에만 매진하라고 ‘종용’했다.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그도 느끼고 있었으나 강정과 관련된 일들이 너무 많았다. 사실 누군가는 그에게 따끔한 경고라도 했어야 했다. 전시가 불과 수개월 앞이었으니까. 그는 강정평화대행진만큼은 잘 끝내고 작업실로 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노암 촘스키를 찾아가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 연대를 끌어냈던 그였기에, 대행진에 참여하는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과의 연대에도 참여해야만 했을 것이다.


서귀포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 7년의 기록 1800여점 모은 '아카이브' 전시
햇수로 무려 7년째.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예술인들이 그 동안의 기록을 통째로 서울 한복판에 가져다 펼쳤다. ‘강정예술행동 아카이브전-제주해전’이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평화박물관에서 오는 26일까지 진행된다. 지난 2007년부터 외롭고 힘든 투쟁을 시작한 마을 주민들을 지지하기 위해 약 300여명의 미술가들이 드나들었고 흔적을 남겼다. 이번 전시는 마을 일대에 흔적으로 굳었던 사진기록이 주요 전시물이다. <제주해전(濟州海戰)>이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을 단 건 지난 7년이 강정마을과 구럼비, 강정 앞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술가들의 저항이기 때문이라고 참여 작가들은 설명하고 있다. 이곳이 실제 전쟁기지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 공포를 상기시키려는 이유도 섞였다. 시간이 너무 흘러버린 탓일까. 마을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 무뎌져버린 국민들에게 이들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너무나 무감각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마을 곳곳에 설치된 예술작품 기록사진, 공사 구간 철재 휀스에 그리거나 쓴 이미지 사진, 구럼비 인근 구조물들에 새겨놓은 그래피티 사진, 구럼비에 쌓거나 세운 방사탑과 조각, 사진가들의 구럼비 등의 다큐사진 총 200점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또한 스크랩해뒀던 강정 관련 언론 기사 1600여건, 강정과 구럼비를 주제로 다룬 책 20여권, 기금마련을 위해 때때마다 만든 티셔츠, 강정에 드나든 여러 사람들이 담긴 엽서, 비바람에 낡고 삭은 플래카드까지 그 동안의 시간을 증명하듯 내보이고 있다. 참여 작가만 무려 90여명. 이번 전시된 사진 자료 90%는 7년 동안 끈덕지게 강정 마을에 드나들었던 고길천 작가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다. 전 
- 김태연 기자, 「서울 한복판에 뜬 제주 강정마을 7년 저항의 기록」, 제주의 소리, 2013.7.3


그는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았다. 응급조치가 잘 되었는지 빠른 속도로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뇌출혈의 후유증은 쉽게 정상화되지 않았다. 그가 하고자 했던 것, 그가 가고자 했던 것,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그는 다시 일어나 시작했다. 삶의 부조리, 모순, 억압, 착취, 갈등, 파괴, 해체가 배턴을 넘기며 지속되는 한, 민주적 저항과 투쟁은 지속되어야 했으니까.




1990년에서 2018년 사이, 4.3에서 트럼프까지


이번 전시는 1990년에서 2018년 사이의 작품이 출품되기 때문에 그것에 한정해서 분석하기로 한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의 시대적 상황을 늘 콘텍스트로 녹였다. 주간경향의 임도형 기자는 “촘스키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논평할 때, 그 사건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벌어진 사건의 현상적인 문제보다는 사건 뒤에 가려진 본질, 진실, 음모 등을 정확히 짚어내 폭로한다.”고 했는데, 고길천의 작품도 그와 유사하다.


작품의 제목도 종종 반어법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작품이라는 이미지에만 갇혀서 해석하면 그것의 진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은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작품) 뒤에 가려진 본질, 진실, 음모 등을 정확히 짚어내 폭로”하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Text)은 그 작품이 놓인, 혹은 그 작품이 갖는 문맥(Context)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해석이 불가능 할 수도 있다.


큰 갈래로 보았을 때 그의 작품세계는 4.3미술, 생태미술, 정치미술로 구분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 세 개의 갈래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아서 상징적으로는 이어지고 맺어지는 특성을 보인다. 4.3미술이 망각을 강요했던 억압적 주체들과의 상징투쟁일 수 있다면, 생태미술 또한 잔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새들의 투쟁으로 읽히고, 정치미술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무관하지 않다. 그의 작품들은 외국의 레지던스에 참여했을 때조차도 그 지역의 역사와 인물과 사건을 놓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들은 콘텍스트라는 알고리즘에 의해 연기적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 그물망의 미학적 구조는 부분과 전체가 하나의 병렬구조로 탄생하기도 한다. 제1회 4.3미술제에 출품했던 <닫힌 가슴을 열며>는 좋은 사례다. 이 작품은 4.3과 동학을 병렬로 이어서 문제의식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보여준다. 한라산에서 잡혀 내려 온 이름 모를 한 사람과 서울로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좌우로 배치했다.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려는 뷰파인더는 과녁처럼 읽힌다. 제주의 4.3과 19세기의 동학은 섬과 육지, 저항과 혁명, 무장대와 혁명군만큼이나 그 양상이 다르지만, 그것의 문맥을 완전히 다르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두 개의 사진 속 인물들이 카메라 너머를 향해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 눈빛은 꿋꿋하고 당당할 뿐만 아니라 무언(無言)의 ‘시대적 증언’을 쏟아내고 있으니까.


<금장성경>(1992)과 <조건>(1997)도 비슷하다. 그는 홋카이도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금장성경>을 제작했다. 홋카이도에는 항공자위대 기지인 치토세(千歳) 공군기지가 있다. 유사시 이곳은 미 공군의 전략적 기지로 활용된다. 고길천 작가는 이러한 지역적 현실을 작품에 차용했다. 제주도와 홋카이도를 검은 바다 위의 섬으로 좌우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 ‘몽골리안’ 인물사진을 끼웠다. 금장성경이 무엇을 구원할 수 있을까? 치토세는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기지로 꼽힌다. 그렇게 미국/미국문화를 상징하는 금장성경은 극동의 두 섬을 전략적 ‘기지화’ 할 뿐이다.


<조건>은 검은색 바탕에 ‘전천후 한국형’으로 등장한 카멜레온오리발 돌연변이와(왼쪽), 그 돌연변이의 특징을 오른쪽에 배치한 작품이다. ‘오리발 한국형’은 “다목적 용도에 적합-철새형”, “수륙양육 전천후 요격용-돌격형”, “위장 및 은폐에 용의함-오리발형”이고, ‘카멜레온 한국형’은 “공격력이 우수함-폭력형”, “한국지형에 적합-지방색형”, “야간전투에 우수함-날치기형”이다. 천박한 한국정치의 민낯을 조소하는 이 작품은 ‘카멜레온’과 ‘오리발’로 정치인들의 잦은 변심과 거짓말, 헛소리를 꼬집었다.


정치의 성숙 없이는 사회도, 문화도 성숙할 수 없을 것이다. 1992년의 한국정치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을 넋 놓고 지켜보더니, 급기야는 ‘세계화’를 선언하는 몰염치를 이어갔다. 1995년의 대한민국은 국가경쟁력 강화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한다며 세계화 정책을 폈기 시작했던 것이다.


4.3미술 ; 특별전시실   


그의 첫 4.3미술은 ‘바라본다’는 주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무엇을 볼 것인가’의 문제는 1948년과 동학혁명 100주년이었던 1994년의 차이만큼이나 넓었다. 그 시야로 4.3을 좁혀 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는 4.3과 동학을 병렬로 배치해서 둘의 상징으로 문맥을 엮었으나, 1995년과 96년에는 그가 발 딛고 있는 그 시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948년이라는 역사적 시간은 너무 멀어서 잡히지 않았으므로.


제2회 4.3미술제의 주제는 “넋이여 오라”였고 그는 다시 <바라본다>를 출품했다. 1995년은 앞서 언급한 UR때문에 농산물 수입 압력이 거셌다. 4.3은 1995년의 현실에서 UR이라는 ‘세계화’였다. 쌀 시장 개방은 유예되었으나 오렌지를 비롯한 농산물 수입은 시작되었고, 한국농업의 미래는 어두웠다. 그는 전시장에 과일 가게를 차렸다. 그것은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실로서의 실재였고 그 앞에 흰 석고상으로 서 있는 인물은 껍데기였다. 그 상황을 1994년 작품에 차용한 4.3의 제주도민이 쭈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보고 있도록 설치했다.


1996년의 <바라본다>는 여행용 텐트였다. 전시장에 텐트 한 동을 설치했다. 관광지 제주는 여행객들의 낭만이었고 ‘판타스틱 파라다이스 제주’를 체험하려는 텐트족들이 줄을 이었다. 아름답고 즐거운 섬 제주를 생각하는 말풍선이 텐트를 덮는 플라이에 새겨져 있다. 그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제주의 곳곳은 4.3 학살터다. 하필이면 풍광이 좋은 곳들이 그렇다. 소개당한 마을 터도 한둘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그렇게 관광지로 바뀌어 가는 제주를 바라보면서 어떤 회한과 아픔과 아이러니를 상상했을 것이다. 제1기획전시실의 <영남마을 풍경>(2007)은 충격적이다. 4.3으로 스러진 영남마을에서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4.3유적지에 짓다만 콘도 건물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게임은 왜 4.3이 모두의 기억투쟁이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표출시켰다. 이 작품도 두 개의 장면이 병결구조인데, 디지털 게임 속 장면들이다. 영남마을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그의 4.3미술은 동학만이 아니라 광주 5.18민주항쟁과 대추리 예술행동으로도 이어졌다. 1998년의 <바라본다>는 분단과 5.18을 엮어서 4.3으로 잇는 설치작품이다. 그는 뿌리 뽑힌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 푯말을 거꾸로 걸어두고 그 밑에 둥근 무덤 같은 원형의 돔을 만든 뒤 “굽이치는 저 물결이 전하네. 산자락을 휘감아 흐르는 바람이 큰 울림으로 전하네. 하나 되라 하네. 사랑으로 하나 되라 하네. 우리 탯줄을 살라 묻고 마침내 흙이 되어…”의 글을 적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검은 천을 깔고 그 위에 흑백의 초상을 비스듬히 세웠다. 작은 등불을 밝히면서. 추념과 염원을 담아서 제의가 되는 이 장면은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어떤 믿음이요, 신념일 것이다.




반면, 2006년 대추리에서 촬영한 <10시간의 이륙>은 현기증 같은 현실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그 해 3월 어느 날 대추리를 방문했다가 캠프험프리에서 이륙하는 전투기를 보았다. 그날 하루 그는 꼬박 10시간을 이륙하는 전투기만을 찍었다. 43장의 사진은 대추리의 현실이 4.3의 현실이라는 것을 증좌이다. 미군은 한반도 어디에나 있었다. 1948년의 4.3은 2006년의 현실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43장의 사진과 5점의 청사진 작품을 함께 걸었다. <아름다운 강산>(2006)은 그야말로 ‘청사진’에 출력한 청사진인데, 대추리 주민의 투쟁 장면과 황새울 들녘의 풍경을 바탕으로 “미귁님 말ᄊᆞ미 우리와 같아 ᄂᆞᆼ민과로 서로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쐬, 이런 젼ᄎᆞ로 어린 ᄂᆞᆼ민의 재산을 기준 시가 보다 싸게 미군에게 넘기ᄀᆞ져 ᄒᆞᆲ배 이셔도 ᄆᆞᄎᆞᆷ내…”를 새겨서 한국토지공사, 국방부, 한국감정원, 대한주택공사를 비꼬았다. 그것은 그대로 이 나라 이 정부를 향한 일침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강산>(2006)은 1990년에 제작한 <아름다운 제주> 연작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총 9점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4.3미술에 속하지는 않으나 주제의식은 1996년 작품 <바라본다>과도 연결된다. 이 작품도 청사진에 이미지를 출력했다. 첫 장면은 1990년 판 한라일보다. 헤드 기사는 “濟州 ‘하와이形’으로 開發”인데, 그 밑에 “綜合開發 기본방향 確定”이라 적혀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제주시 탑동을 개발하면서 제주를 하와이처럼 만들겠다는 노태우 정권의 야심이었다. 중간제목엔 “제주를 토지공개념 시범지로 정착-지사가 권한․위임 갖고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에게 제주는 역사도 문화도 무엇도 없는 관광지여야 했을 것이다.


고길천의 촉각은 민감했다. 그는 그 청사진에 찍힌 신문 이미지에 붉은색 동그라미를 그리고 다시 그 위에 검은색 ‘+’를 새겼다. 그런 다음 이미지마다 붉은 색 ‘-(빼기)’와 ‘|(더하기)’를 입혔다. 물질에서 돌아오는 해녀는 ‘빼기’, 비키니를 입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늘씬한 여성들은 ‘더하기’, 수저와 젓가락은 ‘빼기’, 나이프와 포크는 ‘더하기’, 태극기는 ‘빼기’, 성조기는 ‘더하기’, 제주도는 ‘빼기’, 하와이 군도는 ‘더하기’, 훈민정음은 ‘빼기’, English는 ‘더하기’, 몽골리안은 ‘빼기’, 폴리네시안은 ‘더하기’, 제주=하와이는 같지 않음, 그리고 뒤집힌 아이 사진에 붉은 동그라미에 검은색 ‘+’, 그 밑에 붉은 글씨로 쓴 ‘아름다운 제주’. <아름다운 강산>에 ‘강산’이 없듯, <아름다운 제주>에 ‘제주’가 없는 이 역설의 아이러니!


‘없다’는 상실의 자각은 <학생-사라짐>(1997/제2기획전시실)에서 4.3미술로 등장한다. 그는 실크스크린으로 4.3에서 학살당한 중학생의 교복을 찍었다. 아홉 개의 조각 이미지로 구성한 이 이미지에는 총구멍이 확실하다. 붉은 동그라미 중앙에 있는 흰 구멍. 그는 이 작품에 사운드를 함께 설치했는데, 지금은 유실되고 없는 그 사운드는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이 4.3을 ‘빨갱이들의 폭동’이라고 발언하는 내용이었다. <와이샤쓰-사라짐>(2000)도 상실을 다룬다. 30장의 엽서와 15장의 해석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대구와 대전 등지의 수형소에서 보내온 편지들이다. 엽서의 내용을 해석한 문무병 선생은 이 엽서 모두가 한 편의 4.3 시이자, 굿이라고 말했다 한다. 두 편을 옮긴다.


“아버님 전 상서. 집을 떠난 지 부모님 기력이 어떠한지, 형님과 어린아이도 평안하며 어리석은 아들은 객중이 되어 잘 지내고 있으니 그리 아옵소서. 집안일 부탁드릴 말씀은 매형 문 씨에게 부탁하느니 소, 말들을 잘 거념(보살펴)하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그 사이 어머님 기력이 무사한지 아들도 여전하오니 안심하고 겨울내의 상.하(즉 샤쓰)를 보내라고 하였으나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아버님에게 알려 드리오니 명심하셔서 월동에 유리한 샤스 상. 하를 보내 주시면 아버님 은혜를 각별히 잊지 않고 그전도 편지를 보냈지만 임금 사.오천환도 신속히 보내 주십시오.”


고길천은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전략은 신식민지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듯하다. 1998년의 <비밀상자>와 2002년의 <매우 바람직한 염색체>는 4.3미술에서 가장 강렬한 작품 중 하나이다. 그는 전시장 벽면에 검은 색 띠 모양의 막대기 구조물을 설치했다. 관객은 가까이에서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붉은 색 글씨에 흠칫 놀랄지 모른다. 그런데 가만히 살피면, 양쪽으로 써 있는 ‘출입금지’와는 다르게 막대기 가운데의 동그란 구멍에서 영상이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4.3 당시 미군 딘소장이 제주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기록영상이다. 무언가 비밀스럽게 보이는 이 장면은 ‘엿보기’, ‘목격하기’를 유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스스로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든지 식민화 전략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문화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식민화가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먹는 것과 입는 것, 듣는 것과 노래하는 것, 심지어 지식의 보편성은 ‘서구화’라는 문화적 식민성이 깊게 침윤된 지 오래다. 아프리카의 소설가 응구기 와 씨옹오는 책 이름 그대로 『마음의 탈식민지화』를 이야기하고, 프란츠 파농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탈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심리학을 촉발시켰듯이, 고길천도 사진잡지 『아사히 카메라』에 실린 인물사진을 차용해서 눈동자 색깔을 바꾸었다. 아시안들의 얼굴과 싯푸른 눈동자는 이질성을 극명하게 노출시킨다. 그는 그것을 ‘매우 바람직한 염색체’라고 농을 친다. 어쩌면 식민성은 우리 안에 그렇게 물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으로 문제는 씨옹오가 말한 ‘마음의 식민지화’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정치미술 ; 제1기획실 


대추리 예술행동과 투쟁이 주제였던 2006년의 <아름다운 강산>과 달리 1998년에 설치한 <아름다운 강산>은 이승만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까지의 정치적 선전 구호를 다룬 것이다. 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이미지는 군화다. 그가 믿었던 것은 미군이었다. 박정희는 “하면된다”를 역설했다. 새마을운동과 산업화를 상징하는 로고와 재봉틀을 새겼다. 전두환은 “정의사회구현”이다. 삼청교육대를 만들었고, 시위는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이미지는 방패다. 노태우는 “보통사람”을 강조했다. 군 장성 출신의 대통령이 보통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비현실이었다. 이미지는 별 네 개다. 김영삼은 “세계화” 정책을 폈다. 이미지는 카지노 빠칭코 도상이다. 이승만의 구호에서 화살표를 따라 김영삼에 이르면 그 사회가 어디에 다다랐을까 의문이 든다. 과연 세계화를 실현하는 것이 ‘아름다운 강산’일까? 금빛 철모를 썼던 대통령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전략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전략으로 위기에 처했다. 고길천은 이번 전시를 위해 막바지까지 <트럼프의 부위>를 제작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황소상’ 머리를 트럼프 얼굴로 뒤바꾼 황소는,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포즈와는 달리 매우 키치적이다. 그는 석고붕대로 제작한 소의 동세는 물론이거니와, 트럼프의 울부짖는 표정도 키치적으로 보이게 했다. 왜? 이것은 트럼프의 얼굴로 풍자한 미국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몸의 한쪽을 단면으로 자른 뒤, 각 부위마다 적은 글귀는 다음과 같다.


THE ART OF THE ARMS SALE
RACISM
PENIS FETISHISM
HARASSMENT
TRADE WAR
NARCISSISM
AMERICA FIRST





그는 우리 내부의 문제도 직시한다. 미국이라는 권력은, 이주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우리들의 권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폭로하는 방식이다. <외국인 노동자>(2011)은 2000년대 초반의 외국인 노동자를 캐스팅해서 제작한 작품이다.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급격하게 증가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인권 유린이나 임금 체불이 심했다. 불법 노동자는 갈 곳이 없어서 그런 폭력에 쉽게 노출되었다. 이주 노동자들은 사실 망명을 한 경우도 있고, 그들의 사회에서는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들은 고강도의 노동을 견뎌야 했다. 불안과 초조는 일상이었다. 그들은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의 초상’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희망의 땅’이요, ‘기회의 땅’이었을 테니, 어쩌면 그들도 우리를 ‘진인’의 국가로 생각 했을까?


<진인의 무기2>는 미국식 민주주의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고길천은 정십자의 평면이미지에 다섯 개의 그림을 배치했다. 위아래 검은 바탕에는 수저와 포크를, 좌우 흰 바탕에는 군용 물통과 도시락이다. 그리고 정중앙에는 어디선가 잡혀온 포로들이다. 그들은 쭈그리고 앉아서 카메라를 불안하게 바라본다. 그 얼굴들 위로 ‘LIBERTY OF AMERICA’와 별 하나를 새겼다. 트루먼의 무기는 생활 곳곳으로 스며서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들의 무기는 총칼이 아니라 ‘가위눌림’의 억압이고,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문화이식의 침투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말 총칼이 없는 것일까?


<자유․평화․미래>는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실을 폭로한다. 최근까지도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수조원의 예산을 들여 전투기를 구입했다.


영화 <1급 비밀>은 1997년 국방부 조달본부 군무원의 전투기 부품 납품 비리, 2002년과 2009년 공군 전투기 구입 외압설과 군납비리, 방산비리를 다뤘다.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이 사업의 이면에서는 비리가 끊이지 않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 무기의 사용여부다. “자유․평화․”를 내걸고 “맥도넬 더글라스의 F/A-18기를 선정해 주신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떠한 적도 ‘DEFENDER’헬리콥터로부터 숨을 곳은 없다.”, “전천후 공격헬기 AH-64 APACHE”, “‘하푼’이 해상도전을 차단하여 영해의 자유를 지켜 드립니다.”, “오늘도 국지전은 발생하고 있습니다. ‘슬램’이 해결합니다.”라고 선전하는 포스터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만얀 이 무기들이 사용된다면 우리의 삶은 안전한 것일까? 전쟁은 어떤 자유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오른쪽 끝에 펄럭이는 ‘백기’를 배치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2년 뒤, 그는 <에로스에 관한 6개의 단상>을 발표했다. 칼라 레이저 프린트로 제작한 A3크기의 작품은 여섯 이미지와 여섯 문장으로 되어 있다. “몸값이 내리면 전쟁이다.”의 문장 위에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들어 올리는 아버지가 있다. “숲을 파괴하면 GNP가 오른다.”는 영롱한 푸른 숲을 보여준다. 다른 그림은 아마존의 강줄기 같기도 하다. “전쟁은 잉여이다.”고 적은 문장에는 죽은 아들의 얼굴을 만지며 오열하는 이슬람 어머니다. “에너지를 파괴하면 GNP가 오른다.”에는 총을 든 미군병사와 화염이다. “몸값이 오르면 전쟁이다.”는 오사마 빈 라덴이고. “몸값이 오르면 멸종이다.”는 고릴라. 그의 에로스 단상은 전쟁과 죽음과 테러와 공포와 오열과 슬픔이 떠돈다. 그 어디에서도 에로스를 찾아 볼 수 없다. 그가 사유하는 것은 그러므로 치열한 현실일 것이다. 파괴와 죽음이 난무하는 곳에서만이 그 의미가 치솟는 것, 바로 그것이 에로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4.3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한 미학적 구상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4.3미술 인터넷 사이트를 위한 에스키스>(2000)는  사실 작품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훌륭한 포스터이기도 하다. 세계적 잡지들인 PLAYBOY, VOGUE, TIME, Roling Stone 등의 표지를 뒤엎고 패러디한 장면들은 모두 4.3미술이다. 4.3의 학살을 보여주는 장면들. 그는 그 위에 “What a Wonderful Wold!”를 특집기사로 크게 강조하고, 그 아래에는 “The party held on April 3rd 1948 in Che ju do, Korea”를 새겨서 의아하게 했다. 역설이요, 모순이다. 두 말의 충돌이 만들어 내는 강렬한 의구심과 표지 이미지는 4.3의 비극을 상상하는데 무리가 없다.


올해 제작한 <미국식 수확>은 성조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부조로 제작한 흉상을 배치했다. 총탄에 맞아 평생 턱을 잃고 살아야 했던 무명천 할머니와(오른쪽), 운디드니의 학살에서 희생된 아메리카 인디언의 초상이다(왼쪽). 4.3 70주년을 맞는 올해 미국은 침묵했다. 그 어떤 논평도 사과도 없었다. 고길천은 성조기를 직접 걸었다. 미국의 책임을 묻는 가장 직접적인 미학적 행위일 것이다. 그는 성조기의 붉은 색 띠를 흐리게 한 뒤 그 위에 검은 글씨로 “,Apil 3rd massacre=Wounded knee massacre”라 적었다. 4.3의 학살과 운디드니의 학살은 같다는 것! 미국을 향한 이러한 미학적 시위는 팔레스타인의 카투니스트 나지 알 알리(Naji Al-Ali)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복합적인 상징을 가진 작품은 프로타쥬로 제작한 <잠자는 체체모카>(2009)일 것이다. 그는 2009년에 미국 워싱턴주 폿타운센의 센트럼 아트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그의 작업방식이 그렇듯, 그곳에서도 그는 센트럼이 있는 폿워든 주립공원을 산책하면서 지역을 답사했다. 그러다가 해변의 모래톱에 방치되어 있는 작은 배 하나를 발견한다. 약 5미터의 철과 나무로 제작한 배는 이미 많이 녹슬었고 부서져 있었다. 그는 뱃머리에 적힌 ‘GHETZEMOKA’에 주목했다. 나중에 그는 그 이름이 19세기 말 그 지역에 살았던 클라람족 추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0년의 시차를 사이에 두고 ‘배’로 만나게 된 그와 체체모카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고길천은 낮게 엎드려 배의 피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배의 양 옆에 검은 종이와 흰 종이를 붙인 뒤 프로타주로 떠낸 것이다. 검은 종이의 흑연과 흰 색 종이의 흑연은 그 빛이 달라서 저승과 이승이 거울로 되비추는 장면과 같았다. 검은 우물 속의 검은 배 그림자. 그는 긴 시간동안 배를 떠내면서 스스로 체체모카 배가 되는 체험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듬해 그는 <날으는 체체모카>를 다시 제작해서 설치했다. 여섯 개의 종이배와 제주 굿의 종이 장식물인 기메를 함께 걸었다. 그의 표현대로 티베트에서 시베리아, 제주도, 북아메리카, 남미에 이르기까지 샤머니즘은 초자연적인 의식이고, 그 문화적 정체성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어떤 동질성마저 느끼게 한다.


<날으는 체체모카>는 <미국식 수확>과 다른 맥락에서 이어지는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길천은 폿워든에 살았던 인디언 클라람족의 삶을 주술적으로 불러냈고, 그 지역주민들과 공유했다. 인디언의 주술이나 우리의 굿이나 사실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곳에 설치한 장면들은 한국의 굿이 보여주는 색채와 한지 조형이 다양하게 어울리면서 미묘한 영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배와 기메가 매달려 설치된 스튜디오는 무언가 살아있는 공간 같았고.     




생태미술 ; 제2기획실


생태비평은 생명에 반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담론이다. 환경미술로서의 생태미술도 또 다른 면에는 ‘생태’에 반하는 모든 억압적 기제들의 반대편에서 그것과 맞서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고길천의 생태미술은 바로 그 위치에 있다.  


근대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므로 만일 이 세계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세계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떠돌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관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 말을 생태학의 위기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보와 해방의 신화로 대표되는 근대 신화는 모든 지식과 판단의 근거로서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주창하는 계몽사상으로 이어졌다. 그런 계몽사상 역시 인간의 본질로서의 항구적 인간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도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근대 신화는 무엇보다도 이성에 의한 합리적 사고와 주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 그리고 과학과 기술에 의한 무한한 진보라는 이념위에 구축된 믿음체계였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이제 뒤바뀌고 있다. 구조주의 이후 등장한 반인간주의 사유는 인문주의적 가정을 뒤집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탈중심화 된 주체로 대변되는 반인간주의 주체론은 인간주체의 자기 동일성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크 라깡(Jacques Lacan)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이렇게 뒤집는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라고.




<출토-부활>(2000)은 제주의 철새 도래지인 하도 습지를 답사하고 그곳에서 수집한 죽은 새를 나무 상자 속 흙에 파묻어 설치한 작품이다. <목 긴 청개구리 제주 습지전>에 출품한 12개의 상자에는 새의 뼈와 깃털이 담겼고, 그 장면은 곧장 인간이 초래한 자연환경의 파괴를 떠올리게 했다. 새들에게 억압적 기제는 무엇이었을까? 새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살 수 있을까? 인간이 항구적 인간성을 확보하려면 ‘탈중심화 된 주체’로 비켜서야 할 것이다. 인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새들이 미래의 시간에서 출토되는 장면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예지적 메시지를 타전하고 있는 셈이다. <출토-부활>의 맞은 편 계단 위에는 <대지를 딛고 서다>(2009)가 있다. 4.3미술제에 출품한 이 작품은 학살 뒤 제주국제공항(옛 정뜨르 비행장)에 암매장 당한 희생자들을 표현한 것이다. 2007년부터 이곳에서는 4.3희생자 1차 유해발굴이 이뤄졌다. 2009년까지 388구의 유해가 발굴되었고, 2018년 올해 다시 재개되었다. 그는 석고붕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었다. 그리고 그 형상 위에 흙을 입혀서 설치했다. 흙이 된 사람들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던 것. 그런데 전시기간 동안 겉에 바른 흙은 말라서 껍질처럼 떨어졌다. 젖은 흙을 바르고 그것이 말라서 떨어지고를 반복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개념이다. <출토-부활>과 <대지를 딛고 서다>의 메시지는 다르나 같다. 2008년 작품 <귀향 준비>도 그렇다.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석고 붕대를 붙여서 만든 작품인데, 해골에 살과 피가 살아 오르는 장면들로 구성된 부조 작품이다. <60년 만의 외출>은 2010년 4.3미술제에 출품한 작품이다. 미술제 주제는 ‘내력담’이었다. 정뜨르 비행장의 학살터에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희생자의 옷을 프로타주로 제작했다. 사람의 몸은 없고 옷만 남아서 투명하게 그려진 옷 자국에 총구멍이 뚜렷하다.


그의 생태미술은 주로 ‘새’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눈 먼 새-왜가리>, <눈 먼 새-까마귀2>(2004)에서처럼 눈이 먼 새들이다. 눈 먼 새를 표현하기 위해 그가 구상한 것은 새의 머리를 통째로 붕대 감는 것이다. 그러니 눈이 먼 것인지, 아니면 머리에 상처를 입은 것인지 분가하기는 힘들다.


붕대를 감고 있는 눈 먼 새들은 두 발을 땅에 딛고 가만히 서 있거나 머리를 낮게 낮추어 경계하는 모양새다. 앞을 볼 수 없으니 나아갈 수도 날아갈 수도 없는 노릇. 붕대감은 가마우지는 쭈뼛거리며 한 발짝 나아가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새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알락오리는 그래서 기우뚱 거리며 앞으로 쓰러지고 있다.


<앞 못 보는 새-까마귀2>(2004)는 눈 먼 새의, 아니 붕대 감은 새의 우울한 초상이 깊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그는 검은 까마귀와 붉은 까마귀 두 마리를 아래위로 배치하고, 아래에 하도 습지에서 수집한 깃털 하나를 꼴라주했다. 깃털 뿌리에 네 가지 색실을 감았는데, 우리 문화의 샤머니즘적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새의 위상은 오롯이 ‘자연’과 ‘생명’이라는 생태성으로 비춰진다. 그러므로 새가 처한 상황은 있는 그대로 제주가 처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테다. 그러니 눈 먼 새는 제주의 습지가, 자연환경이 얼마나 빠르게 파괴되고 사라져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고, 실제로 매우 심각하게 제주는 상처를 입고 있다.




새의 두 번째 주제는 ‘멸종’이다. 그는 1999년에 <멸종위기 동식물>(1999, 2010)을 옾셋 인쇄로 제작한 바 있다. 멸종위기의 동식물과 멸종 되어가는 동식물을 임으로 선정해서 제작한 작품은 생태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생태정치학』의 저자 코늘리는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현대의 지적 조류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그 정치성은 일종의 저항적 성질의 것으로서 인간중심주의 사고에서 인간 스스로에게 맞서는 것을 말한다. 인간중심주의와 함께 성장해온 진보, 발전, 성장, 개화, 계몽과 같은 부수적인 이념들에 대한 근본적 재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고길천이 <멸종위기 동식물>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인류에 대한 ‘경고’이다.


고길천의 작품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의 작품들은 메시지를 위한 그릇일 뿐 어느 하나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판화, 사진, 포스터, 애니메이션, 설치, 조각, 회화, 만화, 영상, 아카이브 자료, 청사진에 이르기까지 재료는 그저 메시지를 위한 가장 적절한 도구로 등장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생태적 리얼리즘의 리얼리티일지 모른다.


그의 미술세계는 한 편의 거대한 굿이기도 하다. 제주 굿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은 산자를 위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지금, 여기의 현실을 비판하고 조롱하고 위무하고 해원해야만 산 자들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투쟁은, 상징투쟁은, 인정투쟁은 오롯이 산 자들의 몫이다. 그러니 그는 산 자들의 몫을 찾기 위해 실천하고 행동한다.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찾는 일은 지난하다. 작품은 그 몫을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삶-정치’, ‘삶-미술’이 싱싱하게 살아서 산 미학으로 살아나는 생철학의 한 면모를 엿보곤 한다. 피안은 여기에 있고, 차안도 여기에 있을 터. 부처의 반야세계도 도피처가 아니라면 사바세계인 이 현실로부터 도래하지 않을까. 고길천이 30년 동안 궁구하고 실천한 미술은 그래서 모두를 위한 환기이며, 소통이라는 생각이다. 불러 일으켜(喚起), 탁한 것을 맑게 바꾸는 행동(換氣), 그리고 그것의 공감으로서의 외치기(疏通)!
 

*** 제주현대미술관 전관 <고길천 : 바라본다 1990-2018>(2018.11.7~2019.1.13)
*** 고길천 개인전 평론글. 2018.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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