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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후퇴하는 전진_ 김윤수 외 57인 『한국 미술 100년 ❶ - 2. 계몽과 항일 사이 1905-1919』

윤지수

『한국 미술 100년 ❶ - 2. 계몽과 항일 사이 1905-1919』-김윤수 외 57인, 한길사』

 

(6-2)두려움, 후퇴하는 전진  

 

두려움의 발로, 애국심과 국민 상
1905년,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빼앗겼고 점차 식민지로 전락해간다. 나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고 나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주는 국가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국가를 향해있는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 혹은 국권침탈, 외교권 박탈에 대한 두려움에 감정이 치우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크다. 나라를 생각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무너지면 진짜 붕괴할 것이라는 걱정에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국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다.      

 

 

아리랑은 대한제국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사회 변화를 인식시키는 도구이자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 중에는 아리랑을 탄압하고 변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1). 필자는 이런 아리랑에 당대 지식인들의 고민이 담겨있다고 보고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아리랑을 재해석 해보았다. 필자는 진도아리랑에 나오는 문경새재를 애국심이라고 생각한다. 문경새재는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를 가졌다. 그만큼 높고 험준해서 전쟁 시에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높고 험준하지만 넘어간다면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이 이곳이었다. 애국심은 문경새재처럼 견고하여 무너지기 힘들다. 그러나 점령되면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완전히 점령당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국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우리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려한다. 그러나 새재를 함께 넘는 지식인들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중세적 백성을 근대적 국민으로 재창안하여 일제와 맞서려하는 노력들은 우리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일제를 위한 것인가? 이 모순된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특히 남들 속에 있던 내가 고독 속에서 홀로 대면할 때, 그러한 변화가 있을 때,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한다. 나는 사랑하는 임(국가)과 고갯길에서 이별을 하고 있다. 임과의 이별은 나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내가 그동안 알던 나는 누구이며 이 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 이 의문과 함께 나는 임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이는 헛될 뿐이다.  

 

완전하지 못한 국민상

당대의 지식인들은 나라가 완전히 사라질 위기감 속에서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 국민국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그들에게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고 온 힘을 바쳐 나라를 지켜낼 이상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기존의 백성을 계몽하여 근대적인 국민 상으로 탈바꿈하려고 했고 계몽을 이루어낼 수단으로 교육을 택한다. 당시의 교과서에는 국민이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는 그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여 바람직한 국민 상을 만들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바람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국민 상에는 해야 할 의무는 있었으나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그 권리란 참정권이었다2). 국민은 납세와 병역의 의무는 있지만 정치적 권한은 보장받지 못한 존재였다3). 
  이처럼 ‘국민’이라는 이상은 두려움을 발판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완전함이란 없다. 마치 이것은 눈으로 덮인 세상과 같다. 차가움, 두려움, 죽음의 공포는 눈 속에 실재한다. 단지 그것이 눈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포근해 보이는 겨울의 이미지는 눈이 녹으면서 그 상을 깬다. 눈이 녹으면서 기대하던 것들은 깨어지고 비로소 조금씩 균열이 드러난다. 이렇게 완전하지 못한 국민 상은 진정한 본질을 가리고 균열을 덮어 우리를 착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필자는 완전하지 못한 국민 상이 사회 안에서 반복된 문제를 낳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술계와 다른 문화계에서 드러나는 균열
우리 미술계에서도 이러한 점들이 보인다. 계몽과 개화를 위하여 신교육제도가 시행되면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교과 과정에는 미술교육으로써 ‘도화’와 ‘수공’과정이 포함되었다. 도화 교육은 보고 그리는 기능화 중심의 교육이었다. 그리고 수공과정은 실업교육으로 도입이 되었는데 이것은 세계 각국이 이것을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이유로 도입된 것이었다4). 필자는 이러한 교육이 국민들을 계몽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본다. 뚜렷한 목적이나 학생에 대한 파악 없이 행해지는 가르침은 학생들에게 올바른 배움의 자세를 심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배움의 자세를 갖춘 후에야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을 수 있고, 위기지학이 있은 후에서야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존재할 수 있다. 즉, 올바른 배움의 자세가 있은 후에 개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교육으로는 학생들이 배움의 자세를 함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화 또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외에도 서화의 진흥과 후진양성을 위한 미술계의 노력이 있었다. 바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설립이다. 서화미술회는 1912년 6월 1일 이왕직李王職과 총독부에서 재정을 후원받아 설립되었다. 매년 4월에 선발시험을 통과한 학생들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정해진 커리큘럼은 없었다. 당대 유명한 서화가였던 안중식安中植(1861~1919), 조석진趙錫晋(1853~1920), 김응원金應元(1855~1921), 강진희姜璡熙(1851~1919)등이 교원이었는데 학생들은 주로 스승의 그림을 보고 모사하는 방식의 교육을 받았다5). 스승의 그림을 같은 기법으로 정확히 따라 그리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기 때문에 그들의 초기 작품은 스승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띤다. 그리고 서화미술회는 중요 교원이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이 타계한 이후 그 맥이 끊기고 마는데 이는 당시의 교육이 체계적인 과정 없이 스승에게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1. 안중식과 그의 제자 이상범李象範(1897~1972)
이상범은 안중식에게 그가 범본範本으로 그려준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똑같이 모사하는 방식의 수업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인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는 안중식의 도원문진挑源問津과 매우 유사한 화풍의 작품이다.

 


2. 조석진과 그의 제자 변관식卞寬植(1899~1976)

변관식은 그의 외조부인 조석진에게 7년간 서화를 배웠다. 그는 외조부의 화풍과 화기를 이어 받았다. 그의 어해기명절지도魚蟹器皿折枝圖는 외조부인 조석진의 군리도群鯉圖와 매우 유사한 화풍의 그림이다.

 



  당대의 미술교육은 계몽을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계몽을 이룰 당시에 국민은 두려움 위에 서있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그 위태로움은 교육에서 드러났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색안경을 씌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쏠린다. 또한 급한 마음을 먹게 하여 통찰력을 잃게 하고 감정을 치우치게 한다. 따라서 중요한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미술교육에서도 본질이 사라지고 다른 외부적인 요인들이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원하는 성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문화계에서도 미술계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음악계의 경우, 19세기까지 예도를 위한 음악과 돈벌이를 위한 음악이 존재했다. 이 음악들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균형은 근대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깨지고 만다. 근대적 음악의 존재이유가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첫 20년까지 우리 민족들이 좋아했던 민속악은 수요자가 급격히 줄었다. 그리고 서양음악과 대중음악이 등장하여 음악계가 세 갈래로 분화되었다6). 미술계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처럼 음악계에서도 존재이유를 묻지 않고 근대라는 변화의 흐름 위에 몸을 내던졌기에 기존의 균형이 깨지고 전통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서예의 경우에는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서예사의 발전을 이룩한 후,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근대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서예의 이념과 서예를 계속 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이념 없이 서구미술의 공격을 당하면서 존속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또한 서예가 서구의 칼리그래피calligraphy와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으로 서예와 마주하지 않았다. 단지 서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순수예술로써 인정받지 못했다7).     

 

두려움 없는 발판 - 완전한 전진을 위한 이상
  모든 끈이 끊어질 때 우리는 진정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속에 아주 얇은 끈을 남겨둔다. 두려움에 휩싸인 우리는 그 끈을 끊을 수 없고 따라서 나의 진짜 모습, 현 상황을 정확히 직시하지 못한다. 국가의 위기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두려움을 이용해 변화를 감행했고 사람들은 마음속에 얇은 끈을 간직한 채 급하게 새재를 넘었다. 외부의 상황들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그들 내면에 존재하던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그늘을 태연히 끌어안을 수 있을 때 두려움의 발판 없이 도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늘은 내면에 시선을 두고 자신과 직시할 때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다. 당대의 사회적 모순과 미술계, 그리고 다른 문화계의 성과는 이러한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jisu(yoonsart21@hanmail.net)

 

 

각주

1)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아리랑’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2078&cid=41708&categoryId=41736) 참조
2) 金素伶, 「한말 계몽운동기 敎科書 속의 ‘國民’ 인식」,『大東文化硏究 第63장輯』, p.268, 成均館大學校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2008년
3) 각주 2) p.264참조
4) 홍선표, 「학교미술과 서화학교의 대두」,『한국미술 100년 ❶』pp.150~155참조,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6년
5) 각주 4) pp.156~161참조
6) 권도희, 「20세기 초 음악계의 지형도」,『한국미술 100년 ❶』pp.131~133참조,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6년
7) 이동국, 「신구의 병존-근대 초 서예 사정」,『한국미술 100년 ❶』pp.165~167참조,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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