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우리 미술의 개화史와 부패의 법칙 _ 김윤수 외 57인 『한국 미술 100년 ❶ - 1. 전사 근대를 향하여 1876~1905』

윤지수

『한국 미술 100년 ❶ - 1. 전사 근대를 향하여 1876~1905』-김윤수 외 57인, 한길사』

 

(6-1)우리 미술의 개화史와 부패의 법칙

 

근대를 向하여
‘향하다’라는 말에는 생명이 담겨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자연의 섭리를 따르기 위한 그 나름대로의 노력을 한다. 터를 잡고 몸을 가누고 변화의 바람을 비로소 맞이하는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도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 있었다. 그 시기가 1876~1905년이다. 근대를 향한 개화의 시기를 맞은 것이다.

 

화엄경 / 김주대

새싹은 하나의 이념
가장 깊이 이르러서
가장 얕은 곳으로 올 줄 아는 이의 약속이다
우주 이래, 지구 이후
흘러온 기억이 개화할 때
쪼그려 앉아 귀를 세우고
아주 멀리서 왔으므로 무척 작아진 소리를 듣는다
우주에서 음표 하나가 빠져나와서
이토록 작고 푸르다
불가사의는 하찮게 실현되고 이념은 클수록 소박하다
햇볕 속에 단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고
음악으로 돌아갈 것이다
1)

 

진정한 개화란 무엇인가?
이 시는 개화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진정한 개화는 이념이 흔들리고 부패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빠져나온 작은 이념 하나가 땅에 떨어져 흙 속을 뒹굴다가 땅을 흔들고 또 다른 이념으로 재탄생 될 때, 그리고 그 새로운 이념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환할 때 진정한 개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개화를 ‘이념의 부패’라고 표현하려고 한다. 부패는 생명의 선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변화의 원동력이다. 단어의 뜻처럼 자연自然을 ‘스스로 그러하도록’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은 부패한다. 그리고 부패를 통해 모든 것들은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두 번의 개화사
필자는 먼저 “우리가 개화의 시기 안에서 이념이 부패하는 과정을 온전히 겪었는가?” 라는 의문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부패의 과정을 온전히 겪기도 했으며 그렇지 못하기도 했다는 것이 위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러한 의문점을 제시하기 전에 개화의 정의를 제대로 내렸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필자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념의 부패’를 ‘개화’로 정의내리는 것이 올바르나, 우리 근대역사의 시각은 ‘서구화’를 ‘개화’로 여겨 개항을 그 시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두 번의 개화의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개화- 완전한 부패, 건강한 선순환을 만들다.>
첫 번째 시기는 조선후기인 18세기이다. 조선후기는 한국 회화 역사상 가장 한국적이라고 불리는 경향이 나타난 시기이다. 조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리학 사상과 명의 쇠퇴 과정 속에서 자리 잡은 조선중화사상이 섞여 회화에서 조선만의 색채가 발현 된다2). 조선 후기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도서들이 국내에 많이 유입이 되어 남종화南宗畵풍이 유행하게 된다3).
  진정한 개화가 있도록 한 대표적인 인물은 겸재 정선謙齋 鄭歚(1676~1759)이다. 그는 중국의 남종화풍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을 우리 고유의 정서와 색으로 바꾸어 재탄생시켰다. 그는 우리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남종화풍으로 실제 경치를 그려 진경산수眞景山水풍의 일정한 형식을 만들어냈다4).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기존의 것과 함께 부패시킴으로써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풍속화 부분에서도 ‘부패’가 일어났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단연 김홍도金弘道( 1745~1806?)다. 그는 창의성, 해학성을 가미해 그동안 저급하게 여겨졌던 풍속화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5). 서민의 생활상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려는 김홍도의 노력은 낮게 평가 되었던 풍속화가 회화의 한 분야로 편입되는데 초석을 만들었다. 그의 그림에는 조선 후기의 문화적 격조가 배어있기에 우리는 당시 서민들의 일상을 그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개항기의 개화-부패 없는 개화, 우리 미술을 침체시키다.>
두 번째로,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되고 난 후 갑오개혁을 통해 서구화를 겪으면서 또 다른 개화를 한다. 19세기 중반 중국과의 개항이 확대되어 북학풍의 회화기법들이 조선으로 많이 유입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수용된 사진은 회화분야에서 표현의 중요성을 부각 시킨다6).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서양화법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기존의 수묵채색화에 서양화적 기법인 명암법, 투시도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7).

 

1) 진경산수화
그러나 우리는 ‘서구화’가 개화의 참 정의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의 회화 사조와 서양화법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이념에 맞게 변용시켜 사용했던 조선 후기에 비해 개항을 이룩한 후의 우리 미술은 그 표현력이나 창의력이 얕아졌기 때문이다.
  강관식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그리고 초상화에서의 대표작들을 비교하여 조선 후기에 진정한 근대화를 성취했음을 주장한다. 그는 진경산수화의 경우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백악춘효白岳春曉’를 비교하였다.



 

그리고 풍속화에서는 신윤복申潤福(1758~?)의 ‘계변가화溪邊佳話’와 고희동高羲東(1886~1965)의 ‘청계표백淸溪漂白’을 비교하였으며, 이명기李命基(생몰년미상)의 ‘강세황姜世晃초상’과 채용신蔡龍臣(1850~1941)의 ‘황현상(黃玹像)’을 초상화에서는 비교하였다.

 

2) 풍속화


3) 초상화

 



필자는 그의 이러한 구체적인 작품 비교가 독자들의 충분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개항 이후 근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저자가 본질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패되지 않은 개항 이후의 시기에 관한 근본적 접근
그렇다면 개항이후에 근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한국회화와 서양회화에 대한 근본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한국회화의 경우 바탕이 되는 사상은 조선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심성문제에 집중하는 사상으로 인간의 도덕적 근원을 밝히기 위한 학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자연을 온 우주가 담겨 있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탐구는 결국 자연에 대한 탐구로부터 비롯된다고 여긴다. 자연은 도덕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우주가 담긴 존재이기 때문에 궁구해야하는 것이 성리학이 추구하는 바이다8). 따라서 우리 선현들은 자연을 소재로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장엄한 자연의 모습과 그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작품에 담겨있다.
  조선회화와 서양회화에서 모두 자연은 다스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각각의 ‘다스리다’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다르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두는 우리의 ‘다스리다’는 ‘몸이나 마음을 가다듬거나 노력을 들여 바로잡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반면 서양에서는 ‘관리하고 통제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자연은 인간을 바로잡아주는 존재임이 우리 회화에서 드러난다. 
  서양회화의 경우는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14세기 르네상스운동으로부터 태동한 인본주의는 인간의 가치를 주된 관심사로 여기는 사상이다. 인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인간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을 동양처럼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자연을 다스리는, 즉 통치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리고 인본주의에 의해 합리적인 사고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회화적 기법 또한 우리와는 다르다. 서양화는 모든 대상을 실제처럼 그리기 위하여 원근법이 사용되었고 하나의 광경만을 표현하였다. 이는 인본주의에 의한 합리주의가 회화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화에서는 자연을 이상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대상의 영원성을 회화에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역원근법을 사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그림 안에서 모두 보이도록 하였다. 시점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전체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9). 이렇게 한국화와 서양화는 바탕이 되는 사상이 달랐고 그 사상에 따라 표현기법 또한 상이했다.

 

제대로 된 개화가 이루어지려면?
개항이후 제대로 된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서양회화의 표현 기법뿐만 아니라 그 기법이 나오게 된 근본적 사상을 이해하고 연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과 서양의 사상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발아한 작은 씨앗과도 같다. 조선에 서양회화가 들어선다는 것은 우주에서 떨어진 음표가 흙으로 내려앉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서양회화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흙으로 내려앉은 음표가 흙과 살을 맞대고 뒹굴어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이 씨앗이 제대로 싹을 틔우기 위해선 서양회화의 이념이 우리 이념 속에 녹아들도록 건강한 부패와 건강한 재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개항 이후 우리는 당시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운동에 휩쓸려 서양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려기보다는 서양화에서 표피와도 같은 기법만을 차용했다. 서양화의 기법을 우리 그림에 사용했으나 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올바른 개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부패의 이념이 발현된 조선후기와 그렇지 못한 개항기.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를 바탕으로 개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회화에서도 부패의 법칙은 옳다
필자는 부패라는 법칙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고 생각한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패는 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건강한 힘이며 올바른 방향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은 바로잡힌다는 것을 미술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jisu(yoonsart21@hanmail.net)




각주)

1) 김주대,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현대시학, 2014년
2) 이수정, 「서양화법이 반영된 조선시대 후기 회화작품 연구」p.18참조, 한국교원대학교대학원 미술교육전공 석사논문, 2010년
3) 송희경, 「18세기 전반 회화의 새 경향-정선(鄭敾)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의 유형과 그 표상-」,『한국문화연구 17』pp.235~236, 이화여자대학교한국문화연구원, 2009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경산수화’(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참조
5) 각주 2) p.25 참조
6) 홍선표, 「‘서화’의 확장과 ‘미술’의 출현」, 『한국미술 100년 ❶』p.32참조,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6년
7) 이중희, 「서양화풍의 수용양상」, 『한국미술 100년 ❶』pp.52~54참조,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6년 
8) 각주 2) p.9 참조
9) 각주 2) p.39 참조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