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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대면(三者對面), 삼자대목(三者對目), 삼자대안(三者對眼) _ 손철주 『사람 보는 눈』 - 손철주의 그림 자랑

윤지수

『사람 보는 눈』 - 손철주의 그림 자랑, 손철주, 2013, 현암사 

삼자대면(三者對面), 삼자대목(三者對目), 삼자대안(三者對眼)


왜 손철주는 사람 그림을 보여줄까?
  사람이 그립다. 사람과 함께하지만 사람이 그립다. 모순(矛盾)이 아닐 수 없다. 겨울이 점점 그치고 봄이 다가오고 있음이 보인다. 잔디가 자라고 꽃이 피고, 겨울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봄은 오겠지만 진짜 봄이 왔는지 알 수 없다. 따뜻한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는 점점 인간미를 잃는 것 같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인문학 서적은 많이 구입하여 읽지만 인간다운 행동은 정작 하지 않는다. 인문학 도서가 많이 팔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인 세태를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표면적으로 인물화만을 모아서 독자에게 소개하는 책이지만 필자는 이 책에서 손철주의 더 깊은 뜻을 읽어냈다. 바로 제목처럼 사람 보는 눈이다. 사람 보는 눈. 단순히 사람을 보는 눈의 기능을 말한 것이 아니다. 내 눈으로 사람을 잘 보고 사람의 눈을 통해 그 사람을 잘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철주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 밖의 사람은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고, 그림 속의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많다.” 그림 안의 사람은 그림 밖 세상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본문에 실린 손철주의 표현처럼 그림 안에 있는, 사람을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다면 그림 밖 사람을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우리 사회가 그림 안에 있는 사람도, 그림 밖에 있는 사람도 더 잘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사람이 나오는 그림만을 추려서 엮은 한 권의 책. 왜 사람 그림만 추려서 보여주는지 다들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인물화는 삼자대면(三者對面), 삼자대목(三者對目), 삼자대안(三者對眼)의 구심점(求心點)
사람그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초상화와 초상화가 아닌 인물화가 그것이다. 초상화는 사람이 주(主)가 된다. 따라서 사람이 그림 화면을 크게 차지한다. 초상화가 아닌 인물화는 사람보다는 자연과 그 주변의 이야기가 주(主)이다. 산수인물화, 고사인물화, 풍속인물화, 도석인물화 등이 있다.
 
〈초상화-정신까지 화면에 살려내다.〉
필자는 인물화에는 눈이 세 개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초상화를 살펴보자. 초상화에는 그림 안 모델의 눈, 모델을 그린 작가의 눈, 그리고 그 그림을 보는 제3자(감상자)의 눈 이렇게 세 눈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눈이 모여 그림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삼자대면(三者對面), 삼자대목(三者對目), 삼자대안(三者對眼)
   삼자대면(三者對面)은 말 그대로 세 얼굴이 마주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자대목(三者對目), 삼자대안(三者對眼)은 무엇인가.

  얼굴은 단어 그대로 얼이 통하는 구멍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얼, 즉 정신이 담겨있는 구멍이 바로 눈이다. 따라서 정신을 드러내는 부분으로써 얼굴을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눈이다. 필자는 얼굴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초점을 맞춘다면 얼굴과 눈을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삼자대면을 삼자대목, 삼자대안이라고 표현하려고 한다. 삼자대목, 삼자대안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없는 단어지만 세 얼굴, 세 눈, 즉 세 정신이 모여 그림의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뜻에서 인물화를 삼자대면, 삼자대목, 삼자대안의 구심점(求心點)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조선의 초상화는 ‘전신 기법’을 큰 자랑으로 삼는다. ‘정신을 전달한다’는 얘기다. 모델의 정신까지 화면에 살려내는 이 기법은 눈동자 묘사에 성패가 달려있다. <본문 중에서>
 
  초상화는 한 인물을 묘사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제3자(감상자)는 그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주목한 화가의 눈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림에서 작가의 눈이 표현된 곳이 얼굴에서의 눈과 표정이다. 화가는
눈과 표정에 모델의 정신을 담아낸다. 한정래가 그린 <임매 초상>을 보면 화가는 임매의 곁을 주지 않는 오기와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심지를 그의 올라간 눈매와 입가에 굵게 잡힌 세로 주름으로 표현했다.
 (107 p)
한정래, <임매 초상>, 1777년, 비단에 채색, 64.8*46.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상화가 아닌 인물화- 사람과 이야기 그리고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초상화가 아닌 인물화에는 어떤 눈이 있을까. 필자는 그 세 가지 눈을 첫째, 그림 안에 녹아든 눈. 둘째, 작가의 눈, 그리고 셋째로 그림을 보는 제3자(감상자)의 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림 안에 녹아든 눈은 무엇일까. 그림 안에 녹아든 눈은 이야기와 사람 사이를 보여주는 눈, 자연과 사람 사이를 보여주는 눈이다.
 
‘동양은 자연을 받들어 모셨고, 서양은 자연을 데리고 썼다.’ 받들어 모심은 곧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것을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서양의 그림에서 인물은 크고 자연은 작다. 동양화에서는 그 반대다. 자연이 크고 인물이 작다. 크기가 크냐 작으냐 하는 문제는 산수화에서든 인물화에서든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산수와 인물의 상관성을 따질 뿐이다. <본문 중에서>
 (227 p)
강희언, <은사의 겨울나기>, 18세기, 종이에 담채, 22.8*19.2cm, 간송미술관 소장

  필자는 초상화 외의 인물화인 산수인물화, 고사인물화, 풍속인물화, 도석인물화 등을 볼 때 관계(關係)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 인물화에는 사람과 자연간의 혹은 사람과 이야기 간의 관계가 그림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벼 타작>에서 김홍도는 삶을 긍정하는 태도, 일하는 자의 즐거움을 벼 타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타작하는 사람들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관계에 주목하면 그림의 정신을 알 수 있다.
 (172 p)
김홍도, <벼 타작>, 18세기, 종이에 담채,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물화에 얼굴이 없다면?
  손철주의 책 표지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이재관이 그린 <강이오 초상>이다. 책의 바깥 표지에는 얼굴이 없다. 그 바깥 표지를 벗기면 얼굴이 보인다. 얼굴이 없는 ‘강이오의 초상’은 어떠한가? 이 작품에서의 모델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어떤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겠구나 정도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인물화에서 얼굴은 아주 중요하다.
               좌측_책 겉 표지, 우측_겉 표지를 벗긴 속 표지 모습
  이재관, <강이오 초상>, 19세기, 비단에 채색, 63.9*40.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1485호 
  따라서 필자는 작가가 표지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절하게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인물화에서 얼굴과 눈의 중요성, 그리고 눈을 통해 얼굴 즉 정신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책을 통해 그림 속에 담긴 정신을 읽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림 밖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상대방의 정신을 읽어볼 때이다. 그 사람의 표정, 눈빛, 그리고 그 사람 주변의 것들을 애정을 가지고 읽어보자. 손철주의 ‘사람 보는 눈’은 사람의 읽어냄을 통해 사람공부 즉 인문학을 얘기하고 있다. jisu(yoonsart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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