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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 엄태정-낯선 자, 낯선 경험

변종필

엄태정-낯선 자, 낯선 경험


현대미술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를 추출하자면 소통, 수행, 치유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많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 활동을 수행이나 치유와 관련지어 강조한다. 예술활동의 종착지가 소통, 수행, 치유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조각가 엄태정의 작품세계 역시 이 용어들이 관통한다.

엄태정은 한국 추상조각 1세대 작가로 50여 년간 자기만의 조형언어로 수행 같은 제작과정을 통해 자신과 타자의 치유를 시도해왔다. 이번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삼청과 천안 두 곳에서 1969~2018년까지 50여 점의 대표작을 선별한 ‘두 개의 날개와 낯선 자’전시 또한 같은 맥락에서 엄태정의 예술철학을 들여다볼 기회이다.

조각 작품 위주로 선보인 천안 전시는 작품 사이사이 벽면에 적힌 ‘두 날개와 낯선 자’, ‘어느 평화로운 공간’, ‘고요한 벽체와 나’, ‘엄숙한 장소’라는 제목 하의 자필 시문들이 시선을 끈다. ‘텅 빈 무소유로 아름다운 공명공간이 치유의 낯선 자’라는 글귀가 작가와 관람자 모두에 해당하는 메시지로 인식된다. 각기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관련한 4개의 작품과 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회화작품 <만다라>가 놓인 공간이 이번 전시의 정신이자 중심을 이룬다. 동시에 전시장을 떠나 우리가 마주치는 세상을 의미한다. 간결하고 함축적이지만 침묵이나 느림의 방식으로 일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물리적 시간을 초월하며 정신적으로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끈다.

작가는 스스로 ‘낯선 자’이기를 원한다. 작가에 따르면 조각가로 사는 것은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일이며, 조각품은 치유의 공간에서 얻은 깨달음의 결과물이다. 그 결과물은 고정화된 형식이나 형태를 아름답게 꾸미는 형식을 지니지 않아야 한다. 작품성보다 기술(손재주)이 부각되는 것을 멀리하고 경계하기 때문이다. 대신 물질과 정신, 물질과 비물질적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사유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중요시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낯선 자’로 임한다. 작품은 낯선 자가 되어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떤 삶이 가치 있는 것인지 무수히 많은 사물과 만남의 관계를 통해 답을 구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삶에서 부딪히는 기쁜 일, 슬픈 일, 좋은 일, 나쁜 일, 행복과 불행은 매 순간 반복되는 것이지 한 가지만 지속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 같은 삶의 현상에서 인간은 결국 치유의 삶을 사는 것, 살아가야 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관객은 작품과 만남에서 사유의 시간을 통해 치유받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 관객도 낯선 자가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권한다.

회화를 중점적으로 전시한 서울삼청 갤러리에는 2018년에 제작한 <천지인>, <무한주-만다라>, <하늘도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란 작품이 핵심이다. 회화작품이지만, 조각적이다. 잉크 선들로 채워진 드로잉 위로 1cm 간격의 황금색 띠들이 교차되도록 구성한 화면은 금속 물질을 녹이고, 두드리고, 용접하고, 연마하는 지난한 조각 작품의 제작과정과 맞닿아 있다. 이는 수평과 수직, 면과 선을 이용한 간결한 추상적 형태로 우주만물의 관계성을 사유해왔던 그의 조각 작품세계가 회화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도르노는 미적경험을 ‘낯설어지는 경험’이라 했다. ‘예술의 상품화에 맞서서 투쟁하며, 지식과 비판적 성찰로써 예술의 낯섦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예술은 익숙함보다는 낯섦이란 단어에 친숙하고 어울린다. 이는 작가에게도 관객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낯섦을 통해 공유 또는 공감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궁극에 엄태정의 작품은 그의 표현대로 “결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나와 만나는 치유의 공간으로서 ‘낯선 자’이다. 동시에 ‘낯선 자’는 무한우주의 혼돈 같은 세상 속에서 진리나 종교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얻거나 참된 자아[眞我]를 찾기 위해 쉼 없이 자문(自問)하는 구도자의 다른 표현이다.


<아트인컬처 2019-3월호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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