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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불어좋은날-북경 B-space 입주작가展

변종필

바람 불어 좋은날

제1회 북경 B-space 입주작가展

『제1회 북경 B-space 입주작가』展은 타이틀이 암시하듯 B-space라는 특정 공간과 연관돼 있다. 북경 북쪽의 헤이차오(Hei Chao, 黑橋) 지역에 있는 B-space 레지던시는 지난 2014년부터 한국과 중국에서 활동하는 유망작가들을 선정하여 특정 기간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일반적인 레지던스의 형식이지만 3개월의 단기간 창작공간을 지원하는 점이 특징이다.

헤이차오 지역은 빈민가 밀집지역이다. 빠른 변화를 거듭하는 현대사회의 움직임과 달리 여전히 생활환경이나 수준이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곳이다. 이런 점이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들에게 매우 흥미롭고 색다르게 다가온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지역이다.'(1기 유비 작가노트)라는 표현처럼 예술가들에게 헤이차오는 창작활동에 도움을 줄 만한 다채로운 장면을 만나게 해주는 곳이다. 2천 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모여 있어 일상 속에서 각자 작품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예술관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 실제 B-space가 위치한 헤이차오는 중국 미술의 중심 798, 차오창디와 인접하여 수많은 전시와 작가를 수시로 만날 수 있는 지리적 장점이 크다.

공간(혹은 장소)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의미가 달라진다. 단순한 추상적 수학적 공간이 구체적 체험적 공간으로 변환되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B-space 공간 역시 예술 특구인 헤이차오지역에 있는 여러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스 프로그램처럼 입주 작가들이 일정기간 개별적 경험과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특별하다. 이번 『;B-space 입주 작가』展은 레지던스 공간에서의 물리적, 정신적 경험에 근거한 작품을 선별하거나 작품의 변화나 제작 동기에 깊게 관련한 작품만을 선취한 전시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들만의 독자적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7인의 작품성향에 관심을 둘만 한 요소는 충분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란 부제는 참여 작가들이 논의 끝에 도출해낸 타이틀이다. 현상적이고 은유성이 강한 이 부제는 'B-space' 에 입주했던 작가들이 중국 날씨에서 느꼈던 공통된 체험에 근거한 말이다. 3개월의 시차를 두고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작가들이 중국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로 날씨를 꼽았다. 짙은 황사, 높은 습도, 건조한 공기, 강한 바람 등 거대 대륙의 날씨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바람이 불고 난 다음 날 날씨는 항상 청명했다고 한다. 자연은 변화무쌍하다. 예측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일쑤다. 바람이 심하게 몰아치고 난 후 언제 그랬느냐는 식의 평온함을 보이는 것도 그렇다. 이 점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오늘보다 내일의 안정을 예시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현재의 불안, 고뇌, 힘겨움을 이겨낸 후 찾아온 평온함처럼 『바람 불어 좋은 날』은 7인의 참여 작가 개개인의 미래가 현재보다 발전적이기를 희망하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참여 작가 7인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면을 가득 메운 이미지들이다. 양경렬, 이세준, 정규형, 진민욱 등의 작품은 얼핏 서사적 구조로 엮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동시에 겹쳐 나타난 구조로 기승전결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화려한 색채와 복잡한 구성, 다의적 은유 등이 이들의 작품을 처음 대면했을 때 감지된 인상이다.

● 양경렬의 작품은 진실과 허상의 조합이다. 그의 작품은 기법적 특성보다 내용에 눈길이 간다. 상·하의 구분이 모호한 독특한 화면구성을 선보였던 전작에 비해 「woman」, 「two man」, 「Who did kill the King」 등 연작은 한층 간결한 구성과 만화적 인물 도상으로 의미전달을 간소화했다. B-space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꿈꾸는 최고의 왕좌(예술가로서 위치)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시공간을 넘어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의 산물임을 자각하고,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암시한다. 불합리와 비논리로 가득한 현대사회를 비판적 어조로 질타하는 것은 전작과 다름없다. 작품은 부정성을 지닌 파편들로 가득하지만, 표현은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이지는 않다. 비판적 강도를 스스로 조율하려는 고민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 이세준은 다양한 환유의 정글처럼 존재확인이 불가능한 풍경들을 엮어낸 독특한 화면이 인상적이다. 작가의 정신세계에서 유발되는 추적 불가능한 형상들을 화면으로 표출하여 공상적이고 몽환적인 세계를 만든다. 마치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상향처럼 착각(작가는 이를 공상허언증으로 표현함)하게 한다. 화려한 형형색색의 색채로 가득한 화면은 장소와 설치(캔버스를 입체적으로 배치하기도 함)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이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하기」,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등과 같은 화제(畵題)가 암시하듯 세상은 하나의 정의로 규정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힌다. 병적일 만큼 현실의 모든 것이 한순간 낯선 사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정규형은 'Q'rawing'(Question+Drawing)이란 합성조어를 통해 일상의 가치를 자문한다. 순간적 직관을 옮기는 것에 유용한 드로잉을 통해 특정한 형식이나 구도보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나 궁금하게 여기는 것을 일기 쓰듯 표현한다. 중첩된 화면, 분할적 구성은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과 오버랩 된다. 자신의 일상을 확대하면 타인(현대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시각인 듯, 단순하고 건조한 일상의 반복행위나 일상에서 마주친 소소한 인연이나 관계도 주체나 상황에 따라 의미부여가 충분함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일상의 일」, 「같은 공간 다른 생각」이라는 화제는 이번 전시의 특성을 대변하는 또 다른 주제라 할 만하다.

● 진민욱의 화면은 뱀, 개, 새 등 생명체들로 가득한(때론 독립적 구성) 낯선 풍경이 이색적이다. 움직임이 서로 다른 동물들로 구성한 무질서한 화면이 복잡한 인상을 주지만, 서로를 헐뜯거나 괴롭히거나 약자 위에 강림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는 아니다. 지구상(작품에서는 도시)에 존재하는 동물들이 꼭 강자만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적자생존이 진정한 의미의 자연 질서이다. 전작에서 보이던 괴물체의 형상들 대신 온전한 생명체가 등장한 것은 작가의 시선변화가 반영된 부분이다. 외롭지만 독립적이고, 부정적이기 보다는 따뜻하다. 그가 그리는 '작은 소동'은 꿈과 현실을 오가며 마주하는 인간사의 또 다른 축소판이다.

● 유비의 'Chaos Driving'은 하나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갖기까지 끝없이 반복되는 자아의 혼돈과 무질서의 표출로 이해된다. 그는 끓어오르는 내적 갈등을 주체하지 못한 것은 자아의 의지보다 강력한 확인 불가한 힘에 지배받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결과 스스로 억제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자아의 혼돈상태를 분출하는 불꽃, 섬뜩한 표정, 그로테스크 한 모습으로 형상화 하고 감각적 색채와 필치로 강렬함을 더한다. 형광물질처럼 시각의 이끌림이 강한 색의 이면에 감지되는 불안과 어두운 면은 결국 삶의 부조리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다.

● 권승찬의 작품도 언급한 작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의 작품은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제시하는 방법이 한층 구체적이고 명증하다. 이는 7인의 참여 작가 중 선보인 작품들이 B-space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좋은 친구들」, 「대충 붓」, 「술에 취한 남자」, 「완성은 허무하고, 높은 것은 불안하다」 등 평면과 설치작업 연작들은 중국에서 경험했던 몇 가지 문제와 고민에 근원을 두고 있다. '언어적 소통, 새로운 공간의 활용,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 예술에 대한 근본적 고민' 등 그를 둘러싼 고뇌의 일상들이 고스란히 작품에 표출되었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B-space라는 공간이 아닌 한국이라는 현실에서도 매일같이 반복된다. 무엇보다 예술에 대한 근본적 고민은 화가의 숙명과도 같다.

● 유덕신의 「Drawing series」와 「女人」시리즈는 참여 작가 중 화면구성이 가장 간결하고 구상성이 짙다. 드로잉연작도 여인 연작과 맞닿아 있다. 여인의 형상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정작 그 내면에는 현대사회에서 바라보는 여성상의 시선이 깔려있다.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서 성숙하기 위해 여성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화면에서 파열음처럼 번져나가 적으로 드러낸다. 머리를 숙이고 있는 나체의 좌상은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불완전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한 단면을 직시하는 듯 보인다. 궁극적으로 그의 여인 시리즈는 구상적 미의 재현보다 현대 여성의 자아(정체성)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만하다.

살펴보았듯이 시차를 두고 'B-space'라는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참여 작가 7인의 작품세계는 각각 다른 결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에 담긴 의미와 관심사, 일상과 고민이 어느 순간 교차점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교차점은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에 대한 반감이나 불신, 의혹들로 가득하다. '자기부정과 자기 불안', '이중성으로 포장된 모순사회', '현실 도피적 이상향', '미지세계에 대한 호기심' 등이 공통분모처럼 둘러싸고 있다.

결국에 『제1회 북경 B-space 입주작가展-바람 불어 좋은 날』은 '논리적 해석이 불가능한 현상들의 집합'이라고 할 만하다. 비합리적인 7인의 작품세계에 담긴 형식과 내용은 지극히 다면적이고 다의적이다. 중층(重層)과 함축(含蓄)으로 가득한 화면 구성은 관람자들에게 낯선 대상으로 다가오지만 어느 순간 공감대를 형성하며 일종의 긍정적 반응을 끌어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혼란과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난무하지만, 그래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희망을 품는다는 의미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부제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국내소재의 많은 전시관에서는 특정한 개념, 새로운 발상과 전환을 상징하는 키워드를 내건 기획전시가 수없이 열린다. 동시대의 수많은 전시 중 파격적 어법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기존의 틀을 뒤흔들 만큼 파장이 큰 전시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특별한 콘셉트나 작가 정신의 부재로 의미 없는 공허함만 맴도는 전시도 있다. 읽히지 않는 난독성 글만큼 동기부여가 불투명한 전시는 공감을 얻기 힘들다. 애써 보고 싶을 만큼 시선을 사로잡는 전시를 마주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1회 북경 B-space 입주작가』展도 일회성이 아닌 연례전으로 기획되어 개별성 짙은 작가들의 집합체로써 상호자극을 주고 창조적 열정을 끌어낼 수 있는 전시로 거듭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층 명증한 주제와 날카로운 시대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7인의 작가에게 'B-space'를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하게 한 출발점이다.


*2016_0615 ▶ 2016_0622 _GALLERY GMA(광주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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