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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운_'play : pray' - 시상(視象)과 심상(心狀)의 관계항

변종필

Play : Pray 강운展

시상(視象)과 심상(心狀)의 관계항


나는 '물 위를 긋다'를 통해 play, 즉 물과 종이와 긋는 놀이로 '일획'으로 무한을 표현함으로써 예술의 직관적 본질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리고 '공기와 꿈'을 통해 pray, 즉 작고 엷은 한지 조각을 오려 붙이는 수행과 기도의 과정을 통해 일상의 고뇌를 덜어내고 나아가 자연을 끌어안으려 했다.' (작가노트 중에서)

 

가스통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우리의 정신이 갖는 상상적 힘은 매우 다른 두 개의 축 위에서 전개된다'라고 말했다. 하나는 새로움 앞에서 비약을 찾는, 즉 회화적인 것이나 다양함, 예기치 않은 사건을 즐기는 것이고, 또 하나의 상상적 힘은 존재의 근원을 파고들어가 원초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을 동시에 존재 속에서 찾아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가 말한 두 개의 상상적 힘은 예술가의 창작활동이 지닌 특성과 닿아 있는데 강운의 전시 주제어인 'play : pray'와 맥락적으로 연결 지을 만하다. 상상력은 '실재(자연)'와 떨어져 있어도 끝없이 '자연(구름)'의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구름, 공기, 물 등)의 본질을 찾아 그 특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작가를 자극하기도 한다.

 

'play : pray'는 지금까지 펼쳐진 강운의 작품세계를 축약하는 단어라 할만하다. pray는 '유화 구름'에서 현재의 '한지 구름'까지 지속해서 탐구해온 「공기와 꿈」이라는 화제를 지칭하고, play는 구름 소재로 일관하던 작업에서 일탈한 「물 위를 긋다」라는 화제를 의미한다. 우선, 사전적으로 볼 때 play가 행위적이라면, pray는 정신적이다. 아크릴 판 위에 한지를 놓고 공기 중으로 물을 뿌려가며 한지 위에 맺히는 과정을 다루는 「물 위를 긋다」는 play적인 작업이다. 반면 「공기와 꿈」은 얇은 종이를 한 겹 한 겹 붙이며 구축하는 지난한 과정이 자신을 비우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수행 과정이라는 점에서 pray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보는 사람 혹은 생각의 차이에 따라 전혀 반대로 인식될 수 있다. 예컨대 관람자의 시각에서 「물 위를 긋다」를 본다면 무아의 정신에서 행하는 '일점일획(一點一劃)'의 행위를 자아를 성찰하는 수련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럴 때의 「물 위를 긋다」는 pray적이다. 「공기와 꿈」도 마찬가지이다. 한지 조각을 캔버스에 붙여가며 공간을 메워가는 행위는 화가의 시각에서 떨어져 본다면 그 행위 자체는 play적이다.

이처럼 'play : pray'는 창작과정의 의미를 행위에 두느냐, 정신에 두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play : pray'는 단어 의미상 대조적이지만, 정작 해석과 추구하는 뜻은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다. 인간의 감성과 이성은 대립적이지만,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play : pray'는 예술가의 창조과정에서 반복되는 숙명적 관계를 대변한다.

 

'play : pray'의 관계항에 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강운의 작품세계에 밀착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운은 매일 같이 구름의 '형상'이 지닌 비정형성과 무한성을 드러냄으로써 구름의 실재, 자연의 실재를 표현하고자 했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실재의 세계(이데아의 세계 혹은 화가가 꿈꾸고 소망하는 세계)를 그림이라는 틀을 빌려 추구한지 20년이 넘었다. '태생적으로 이름에 구름 '雲' 자를 달고 나와 '서정의 장소'가 몸 속 깊은 곳에 아로새겨져 있을지 모른다'(작업노트)고 고백했을 만큼 그에게 구름은 운명적으로 이어진 듯하다.

강운의 구름은 크게 유화 구름과 한지(이 글에서는 한지라는 재료가 지닌 특성을 굳이 언급하거나 특별한 재료로 연결하지 않았다. 한지는 화가 강운이 표현하고 있는 실재의 세계를 결정짓는 유일한 재료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구름으로 대별되는데 2000년을 기점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유화 구름은 어떤 가식이나 허세 없이 진실로 자연을 대한 화가의 감성의 폭과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당시의 작품은 시골의 하늘 풍경을 바라보며 느낀 감성적 체험이 기원이다. 화순 동복, 나주 비상 활주로에서 본 구름의 다양한 인상(색감, 형태, 움직임 등)을 거짓 없이 표현하려는 의지가 뚜렷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공기와 꿈」에서 '구름은 가장 몽상적인 '시적 오브제'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했다.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구름은 세상을 이루는 많은 물질 가운데 인간을 몽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물질이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뭉게구름을 보고 평화롭게 노니는 양 떼를 연상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구름을 볼 때면 순간 이동을 꿈꾼다. 괴테가 구름을 '안개구름, 뭉게구름, 새털구름, 비구름'으로 치밀하게 분석하여 구름이 지닌 특징과 상징적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듯이 구름은 어떤 영감을 주거나 꿈을 꾸게 하는 대상이다.

실제 강운의 유화 구름은 '환상적이고도 빛나는 형태를 지닌 이 모든 구름들, 저 암묵의 어둠들, 공중에 내걸려 서로 덧포개어져 있는 저 녹색 빛과 장미빛의 거대함……'으로 시작되는 한 풍경화가의 그림을 분석한 보들레르의 글처럼 구름의 모든 변화를 놓치지 않고 담아내려는 폭풍적 열정이 가득했다. 생성과 소멸, 평화와 분노, 행복과 슬픔 등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립적 현상을 품고 있었다. 이 같은 유화 구름의 시각적 강렬함에 견주어 한지 구름은 하나의 무한공간이자 여백으로서 하늘 공간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여러 색의 작은 한지가 일출에서 노을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하늘빛을 대신해서 캔버스 전체에 촘촘히 덮인다. 이때 서로 겹치는 작은 면들이 자연스럽게 밝고 어둠으로 나뉜다. 새털처럼 가볍고 얇은 한지 조각들이 흩어지고, 겹쳐지고, 포개지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화면은 하늘의 깊이를 더해간다. 작은 한지 조각들이 촘촘히 붙여지면서 층이 형성되고 포개지는 양에 따라 구름의 형태와 질량이 달라진다. 실재의 세계, 꿈의 공간에 이르고자 하는 화가의 절실함이 구름이 되어 유동한다. 무엇보다 하늘을 응대하며 빠른 붓놀림으로 구름의 움직임을 포착하던 유화 구름의 숨 가쁜 역동성은 사라졌지만, 구름에 관한 철저한 탐구와 사색은 한층 깊어졌다. 초기 구름과 현재 구름의 존재적 무게감의 차이가 발견되는 지점이다.

구름은 어떤 특정한 형상을 지니지 않는다. 어느 한 가지 형태로 규정할 수 없는 비정형이다. 그래서 매 순간 변하는 자연을 빠짐없이 화폭에 옮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단지, 화가의 망막이 아닌 마음에 반영(反映)된 특별한 상(象)을 옮기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한지 구름은 외형적 재현이 아닌 구름을 통해 생의 의미를 깨닫고 싶은 심상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도 '청년기에 마주한 구름이 마음에 품은 꿈과 방랑이었다면, 장년기의 구름은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로서의 고백과 겸손이다.'라고 말했듯이 한지 구름은 열린 마음, 열린 공간으로서 궁극에 작가의 마음이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볼 때 「물 위를 긋다」는 한층 더 심상에 가까운 작업이다. 작가가 작은 물방울들의 의미를 '인간의 마음'으로 해석한 이유를 알만하다. 인간의 마음은 곧 자신의 마음이다. 결국 마음의 탐구를 위한 행위가 「물 위를 긋다」 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위를 긋다」와 「공기와 꿈」은 환경조건차가 크다. 「물 위를 긋다」는 습도, 온도에 따라 물방울이 맺히는 정도, 한지에 스며들고 번지는 범위와 형태가 달라진다. 모든 과정에 작가의 의도보다 우연성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대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없다. 마치 자연의 흐름을 자의적으로 막을 수 없듯이 흐르고, 번지고, 맺히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유도하지 못한다. 특히 표현 방법적 측면에서 보면 「공기와 꿈」이 지난한 행위의 반복이 주는 노력의 산물(반복적인 행위의 축적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우연은 없다)이라면 「물 위를 긋다」는 물과 공기가 순간적 행위로 만나 만들어낸 우연의 효과이다. 이 같은 우연성은 철저히 작가가 원했던 특성이다. 우연성과 함께 「물위를 긋다」는 철저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의 의미가 크다. '일점일획(一點一劃)'에 모든 것을 담겠다는 것은 모든 것을 비우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채운 듯 하지만,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어떤 형태를 그렸지만, 결국, 아무런 형태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를 동양철학에서 찾는다면 노자가 자연이 주는 몽롱한 아름다움을 보고 표현한 '모양이 없는 모양이며, 구체적인 사물이 없는 상'(無狀之狀, 無物之象-『논어』, 14장)이란 말과 연관지을만 하다. 사실 공기와 물은 과학적으로 같은 질료이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아주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 알갱이로 변하여 흰색이나 회색으로 뭉쳐 공중에 떠다니는 것'이 구름이다. 따라서 구름은 가벼운 수분덩어리이다. 그 수분덩어리가 바람을 만나 어떤 형태를 생성하고 소멸하기를 반복하듯 「물 위를 긋다」도 한지 위의 물감과 만난 수분덩어리의 맺힘이다. 구름은 하늘이라는 공간속에서 물은 땅을 기반으로 움직이지만 구름과 물은 물질적으로 별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play : pray'전은 '시상(視象)과 심상(心狀)으로 접근한 실재의 세계에 관한 탐구'이다. 「공기와 꿈」은 눈에 보이는 상을 따라 옮기는 행위적 측면을 강조하고, 「물 위를 긋다」는 행위보다 정신일치로서 심상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두 주제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통해 순수, 본질, 근원에 관한 회귀적 탐구와 물음이라는 공통 목적을 지녔다. 문명과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이다. 외부의 자연환경을 끌어들여 캔버스에 묘사하는 것은 화가의 선택이지만, 이후 외형을 버리고 내면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도 화가의 몫이다. 문제는 자신을 둘러싼 외형을 벗고 내면을 얼마나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느냐다.

 

'기상학적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것보다 그 아름다움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더 힘들다고 했던 보들레르의 말처럼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표현해온 강운의 구름 그림은 부정할 수 없는 미적 아름다움을 내재하고 있다. 동시에 그의 그림은 숱한 시간과 지난한 과정을 거쳐 구름으로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세계'를 담아내고자 한 자기수련을 보여준다. 형이상학적으로 정의된 '실재'로서의 '자연'을 작가가 상상력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현재의 '구름', 즉 「공기와 꿈」이고, 그 과정에서 일탈적 행위로써 자신을 비워내는 수행과정으로 「물 위를 긋다」를 시도하고 있다. 이렇듯 강운 작품은 '실재'를 탐구해 가는 철학적 의미에서 출발해 '구름'을 통해 실재(이데아)의 세계에 닿아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작품은 만져지지 않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재'를 찾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에 작가는 과감하게 관람자의 몫을 남겨두었다. 자신이 느끼고 찾고자 했던 그 실재의 세계를 함께 찾아보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화가 강운이 'play : pray'전으로 전하고 싶은 진실한 메시지이다.


2016_0406 ▶ 2016_0506 :사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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