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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향한 항거와 응전 -손기환의 강박산수

변종필

 현실을 향한 항거와 응전 -손기환의 강박산수

 

손기환은 오랜 시간 소략(疏略)과 담박(澹泊)이 깃든 칼끝과 자유분방한 필치로 독자성 강한 자연이미지를 창출해온 작가이다. 그가 표현해온 자연은 단순한 풍경의 재현이 아닌 인간의 삶과 정신에 밀착된 인문학적 심상이다. 작가 스스로 작품의 대상을 풍경 보다 산수로 칭하는 것은 자신이 표현한 자연이 재현의 대상보다는 뜻과 의미를 품은 정신적 공간이라는 인식에서이다. 이는 옛 문인화가들이 자연을 마음에 품고 시서화로 표현하던 산수와 맥락적으로 닿아있다.

     

   산수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은 오랫동안 동양에서 쓰여 온 미학으로 예술이 가져야 할 많은 부분  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산수는 사람들이 살아오고 버텨 온 우리의 자연 풍 경과 삶의 풍경이라는 정신적 의미를 담아 온 미학 사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손기환의 작품세계는 자연을 산수라는 미학적 개념으로 치환하고, 물리적 관점․심리적 관점의 두 가지 접근법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사색한 후, 회화와 판화가 지닌 표현기법과 양식적 특성 사이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번 ‘DMZ-산수’展은 이런 손기환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미지는 어떤 전제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은 그 자체로 전적인 자신의 현실성을 갖는다.’라는 질 들뢰즈(1925-1995)의 말처럼 화가의 눈과 마음에 착상해 그의 손 끝에서 화폭으로 옮겨진 대상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표현되는 그 순간부터 화가자신에게는 실재하는 현실이 된다. 손기환에게 DMZ는 실향민인 아버지, 자신이 군복무를 했던 지역이라는 시간과 삶이 중첩된 장소이다. 보통의 일반인이 발길을 둔 적 없는 DMZ는 그 자체가 이미 물리적이면서 관념적 존재이지만, 이 대상을 자신의 삶속에서 기억하는 작가에게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와 관념적 현실이 더욱 극대화 된 장소가 된다. 이 물리적 실체와 관념적 현실이 가져다 준 강박적 사고가 예술적 표현이라는 작가의 강박 행동을 통해 완화 또는 승화된 결과물이 그의 회화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강박 사유와 행동이 치열한 표현 행위를 통해 해소된 개인적 삶과 시간의 흔적들이다.

회화에 표현되는 주된 조형요소는 분출하는 듯한 선과 다채로운 유색상이다. 두 조형요소는 화면의 생기를 책임진다. 판화에서 마주하는 묵직함이나 우직함에 담긴 무언의 힘과는 다른 분위기를 발산한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차분한 마티에르가 질료의 감응을 넘어 자연의 순응을 담아내고 있다. 사실 회화는 표현방식상 판화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심상을 멈춤 없이 직설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특성 덕분이다. 그의 회화 작품 역시 판화에서 억눌러야 했던 직관을 한층 폭발적으로 쏟아냈다는 인상을 받는다. 현실적인 색보다 이상적인 색채를 사용하고, 사실적 묘사보다는 마음에 자리한 특정한 잔상을 거침없이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고화(古畵)에서 차용한 산수이미지는 과거 속 허상이다. 예컨대 보라색 바탕의 몽유도원적 이상세계는 심리적으로 존재할지라도 지각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처럼 DMZ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존재성은 다른 자연공간과는 다르다. DMZ는 우리의 슬픈 역사와 아픈 상처를 간직한 공간으로 현실에 존재하지만, 정작 쉽게 갈 수 없다는 비현실적 공간이다. 자연에는 허락되었지만,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금역지대이다. 그의 풍경이 현실성과 동떨어진 색채와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은 물리적 존재감의 실체를 체감할 수 없는 현실인식의 결과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갈 수 없는 자연은 이상향일 뿐이다. 이 점에서 DMZ는 화가의 심상에만 존재하는 산수 이미지이다. 결국 그의 회화는 비현실적 공간이 돼버린 DMZ의 오늘의 모습에 관한 고발이며, 응전이다.

손기환의 회화작품을 먼저 언급했지만, 사실 그는 판화작가로서 대중적 인지도가 더 높다. 그의 판화는 작가 특유의 감성과 비교적 뚜렷한 작가 정신이 스며있다. 이는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의 전투적 민중성의 결여를 대중 친화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판화를 선택한 순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라 여겼다. 동시대 활동작가들이 내뿜는 시대의 열기 속에서 오히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며 판화의 강한 흑백대비를 통해 미술작품의 사회적 역할을 재고했다. 그렇게 제작해온 판화가 100여 작품이다.

목판은 단순한 듯 보이지만, 숙련된 기술과 힘이 없으면 다루기 힘들다. 칼끝에 담은 힘의 강약을 조율하지 못하면, 자칫 노동 이상의 가치를 획득하기 어렵다. 이에 견주어 손기환의 목판화는 현란하지 않은 우직함에 숨겨진 단호한 의기가 압권이다. 여기에는 재료적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가 즐겨 쓰는 목판은 단단해서 일반적으로 판화용으로는 꺼리는 합판(Plywood)이다. 목질이 단단해서 칼질이 어렵다. 현대판화가들 중 사용이 간편하게 효과를 낼 수 있는 도구(치과용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손기환은 이러한 도구를 철저하게 멀리한다. 힘의 조절에 의한 칼끝으로 결정되는 음양각의 고유한 재질감은 역시 손끝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목판화는 고단한 과정에서 결정되는 질감을 통해 작품 주제를 효과적으로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무의 재질은 그가 목판에 새긴 한강시리즈의 주제와도 직결된다. 한강시리즈는 풍류나 여유를 즐기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정신적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미적 가치를 시각적 만족이 아닌 정신적 채움으로 이루고자 한 의중을 다루기 힘든 합판에 새기면서 뜻과 의미를 강조한다. 이렇게 새긴 목판을 찍어내는 과정 또한 남다르다. 그는 간편한 프레스를 두고 바렌을 고집한다. 프레스에서 균일하게 찍히는 기계의 완벽성보다 거친 듯 채마무리하지 못한 자연스러움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인위성을 배제하고 최대한 자연성을 부가하고 싶은 작가의지가 묻어나는 부분이다. 이와 같이 손기환만의 ‘판화 맛’은 남들이 꺼리는 단단한 나무와 힘들게 손으로 찍는 고집스러운 작업과정에서 결정된다.

데카르트(1596–1650)는 ‘객관적인 재현에 관한 한 판화는 색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과 자연을 묘사할 수 있다’고 했다. 손기환의 목판화는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색을 중점에 두지 않고도 흑백에 침잠된 정신성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한다. 흑백의 강한 대비로 표현한 자연만으로도 진실성을 전달할 수 있다. 이는 색이 객관적 실재성을 보장해주는 절대요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작가에게 한강은 굳이 사계절 변화를 밝히는 색으로 묘사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적 이상과 역사적 무게감은 그대로인 장소이다. 이는 DMG와 한강을 대하는 작가의식, 관점, 표현 등 조형적 특징이 다른 이유와 직결된다.

손기환의 구현된 산수는 시각의 만족을 벗어난 사고의 영역에서 자연을 해석하여 어떤 의미를 구현하기 위한 과정이 스며든 물리적․정신적 공간이다. 그의 산수는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예술을 정의할 때 감각보다 의미를 중시하며 예술작품을 단순히 취향의 차원을 넘어 ‘어떤 것에 관한 것’을 제시하는 것에 예술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철학적 시각과 상통한다. 손기환의 산수이미지는 ‘DMG와 한강’이라는 특정 장소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어떤 것에 관한 것을 상기시킬 수 있는 대상임을 어필한다. 이상향을 그려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고발하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제시하는 것도 예술의 역할이다.

궁극적으로 손기환의 예술은 현실을 향한 외로운 항거이자 중단 없는 응전이다. 끊임없는 항거와 저항을 통해 슬픈 역사를 거둬내고 희망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새긴다. 실현되지 않은 행복일지라도 홍길동의 유토피아를 그린 것처럼, 삶을 환기하고 버텨내는 힘과 위로를 담고자 노력한다. 손기환이 강박증처럼 자신을 억누르는 산수이미지를 새기고, 그려내는 지난한 과정을 되풀이하는 이유이다.



손기환 展 리각미술관.2016. 11. 22. -  2017. 0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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