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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진-억새에 담은 자연심상(自然心象)

변종필

화가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요소 중 환경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모네의 지베르니, 시슬레의 루브시엔, 고흐의 오베르, 고갱의 타히티, 이중섭의 서귀포, 전혁림의 통영, 김종학의 설악산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세계에 특정 장소가 직접적 영향을 끼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화가 박광진(1935~)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난히 여행을 좋아하는 그에게 자연은 언제나 작품의 소재이자 예술의 본질적 근원을 탐색하는 대상이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림에 담아왔다. 그중 제주도는 국내외를 통틀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이며, 예술작품의 모태가 되는 곳이다. 1964년 성산 일출을 그리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을 때 육지에서 보지 못한 풍광에 매료된 이후 제주의 풍경을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았다. 그의 작품 중 60% 이상이 제주도 풍경이 차지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알려진 대로 박광진은 아카데믹한 화풍으로 1950년대 이후 한국화단의 사실적(寫實的) 구상회화를 이끌어온 화가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유화로 그린 진경산수화라 할 만큼 뛰어난 구상력과 특유의 색채감각으로 독자적 풍경세계를 추구했다. 사계절의 자연변화는 물론 인간이 자연과의 교감에서 느끼게 되는 감성을 그림 속에 충분히 담아냈다. 그의 탄탄한 구상력은 대학시절 스승이던 이봉상 화가와 손응성 화가에게서 배운 투철한 아카데미 화풍 덕분이다. 남다른 구상력으로 1961년 일찌감치 국전추천작가로 화단에서 입지를 세우고, 일요화가회를 이끌며 20여 년 동안 사실성을 중시하는 화풍에 몰입했다. 그러던 중 특별하다 믿었던 자신의 구상력이 작품의 미적 가치를 결정짓는 절대기준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한 이후 자신의 화풍에 회의를 품었다. 그 결과 ‘구상도 현대성이 있어야 한다’는 자기반성을 시작으로 20년 이상 유지하던 철저한 사실적 묘사에서 일탈해 새로운 조형탐구를 시작했다. 풍경 소재의 다양성에서 특정 소재에 집중한 변화를 보였다. 2000년 파리 유네스코 본부 미로 홀에서 유네스코 초대전으로 개최된 '자연의 찬가' 전시가 전환점이 되었고 그때부터 유채꽃과 억새가 중심소재가 되었다.

유채꽃 시리즈는 제주와 유럽의 유채로 양분된다. 화산의 검은 돌과 대비를 이루며 노랗게 펼쳐진 장관에 매료된 제주의 유채꽃과 광활한 대지 위에 끝없이 펼쳐져 황홀감을 주는 유럽 유채꽃의 대조성을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제주의 유채꽃 그림이 초기의 사실적 구상력을 중시한 조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유럽의 유채꽃 그림은 화면구성과 표현기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북부(파리에서 메스로 가는 중간 지점)의 한 시골에 펼쳐진 유채꽃의 인상을 담은 <자연의 소리 2013-4>그림은 화면을 가득 채우던 초기의 사실적 구성과 다르게 색면추상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이는 시각적 범위의 인식체계로는 담을 수 없는 광활한 풍경을 추상적 형태의 심상(心象)으로 표출한 것으로 해석한다. 시각적 착시를 일으키는 가는 수직선은 풍경이 남긴 잔상이며, 울림이다. 유채꽃을 둘러싼 광활한 자연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함과 황홀감을 주는 유채꽃 시리즈와 달리 억새 시리즈는 시각적 만족감보다 삶의 깊이와 인생의 길을 돌아보게 하는 점이 특징이다. 그가 즐겨 그리는 제주의 억새는 키가 크고 꽃의 술이 크며 직선적인 유럽의 억새와 다르게 키가 작고 꽃의 술이 적당하며, 곡선적이다. 제주의 바람을 안고 자란 억새는 다른 장소의 억새에서는 느낄 수 없는 향토성과 정서가 스며있다.

제주의 억새는 열매가 익는 10월에 은백색의 새하얀 깃털이 산과 들을 덮을 듯 바람에 나부낄 때가 절정이다. 그러나 박광진의 화폭을 채우는 억새는 절정을 지나 깃털이 고개를 숙이는 11월 말쯤의 모습이다. 절정의 시기를 지나 비바람을 이겨낸 들풀의 생명력을 담고자한 의지다. 바람에 저항하지 않는 억새의 하늘거림과 황토빛 대지를 닮은 깊어진 갈색조는 자신을 잉태한 자연에 대한 반응이며 순응이다. 특히 대지의 촉감처럼 투박한 마티에르는 억새를 단순 그림소재가 아닌 자연으로 대한 심상의 표현이다. 표면 질감이 매끄러운 캔버스 천 대신 황량한 들판에서 자란 억새와 어울리는 마대의 거친 질감이 억새의 생태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처럼 ‘자연의 소리’ 시리즈는 자연의 질서와 본성에 몰입한 흔적이 짙게 배어있다.

억새시리즈의 또 하나 변화된 조형성은 배경이다. 초기의 사실적 표현과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를 화폭 가득 채우려는 구성과 달리 화면을 조금씩 비워가는 형식이 두드러진다. 배경을 채우기보다 비우는 면적이 커졌다. 대자연의 공기가 숨을 쉬듯 여백을 살리고, 필묵의 운용에 따라 수묵화의 깊이가 달라지듯 억새를 품은 배경이 물감의 강약 번짐 효과로 그윽함을 얻었다. ‘억새의 표현보다 공간 표현에 심혈을 더 기울인다’는 작가의 노력이 묻어난다. 인간이 자연에 부여한 가치는 자연의 강요가 아닌 자연의 섭리를 탐독하고 그것을 스스로 삶에 얼마나 가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결국, 박광진의 풍경화에 내재한 자연심상은 자연을 자신과 동일화한 축적된 시각과 심성의 발현이다. 이는 프랑스 미술평론가 제라르 슈리게라가 “박광진씨의 예술은 확실히 일련의 감추어진 기억과 예전에는 형태화되었지만 갱신된 경이를 통해 자기 자신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해독해 낸다. 그러나 주된 대상은 자연에 대한 욕구이며, 그 방식은 쉽게 해독 가능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파기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열린 상징을 통해서이다.”라고 해석한 시각과 다르지 않다.

궁극에 박광진의 풍경화를 기억 속에 머무르게 하는 힘은 빼어난 테크닉적 기법이 아닌 바로 자연의 은밀한 생명력을 읽고 해독해낸 화가의 정신과 마음에 있다. 그의 풍경화는 “상상력 풍부한 예술의 경치 속을 여행하는 것, 그러면서 거기서 얻게 되는 경험은 우리의 내적 삶을 도야하는 강력한 수단이다”라며 예술의 가치를 강조한 예술철학자 매튜 키이란의 주장과 연결지을만하다. 유채꽃 그림은 광활한 대지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속을 여행하는 것처럼 상상력을 이끌고, 억새 그림은 스스로 삶의 가치를 되짚어보게 하는 힘이 있다.

‘좋은 그림은 테크닉이 아닌 생각의 표현이 앞서야 한다. 손의 기술로 주목을 끌기 보다는 생각의 표현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라는 지론으로 제주의 억새를 여생동안 그림의 주된 소재로 삼아 넓은 미술관벽면을 가득 채우겠다는 노(老)화가의 의지에서 산수(傘壽)를 뛰어넘는 열정이 느껴진다.

‘한국 구상미술의 후진성은 작가들의 안일한 태도, 즉 자기 변신의 게으름 때문이다.’라고 강조한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2015 Winter <미술과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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