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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태 / 사각 공간에 축적한 ‘삶의 은유’

변종필

김봉태 / 사각 공간에 축적한 ‘삶의 은유’

 

 

김봉태(1937∼)는 한국, 미국, 일본, 프랑스 등 국제적 활동으로 뚜렷한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화가이다. 40회 이상의 개인전과 <비시원>, <WINDOW>, <DANCING BOX>, <ACCUMULATION>이라는 연작 타이틀로 독자적 세계를 형성하며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해왔다. 그의 주요작으로 꼽히는 <DANCING BOX>와 <ACCUMULATION>은 우연히 발견한 박스를 새로운 미적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 늘 새로움을 추구해온 그의 열정을 재확인할 수 있다. 회화, 입체, 사진, 콜라주, 드로잉 등 다양한 양식으로 표현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박스연작은 그의 50여 년 작업세계를 집약하고 있다.



박스 연작이 주는 첫 느낌은 ‘젊음’이다. <DANCING BOX>와 <ACCUMULATION>은 젊은 디자이너의 감각적이고 기능적인 손놀림을 거친 그림처럼 세련된 색채감각이 돋보인다. 완성도를 극대화한 치밀함이 기계적으로 느껴질 만큼 흐트러짐이 없어 산수(傘壽)에 이른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상자에 사용된 로고나 글귀를 변형 없이 그대로 옮긴 완결성은 고급 인쇄물 같은 인상마저 준다. 그의 작품에 사용한 매체는 단순하며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 작품 제작과정을 보면 대단히 복잡하고, 힘과 끈기가 필요함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드로잉, 수북이 쌓인 상자와 서적들, 색의 조화로움을 탐구한 흔적 등에서 오랜 시간 몸에 밴 창작 습관으로 능숙하게 작품을 완성해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정한 재료와 형식의 원리를 터득한 화가일수록 작품을 완성하는 원숙함이 뛰어나기 마련이다. 결국, 박스 연작을 통해 생생한 색감, 형태 구성의 기본적 법칙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은 작가 정신의 연장이며, 창작과정에 쏟은 열정의 성과이다.

 

김봉태 작품의 핵심소재인 박스가 단순히 조형적 요소에 머물지 않고 삶의 내재적 의미를 담아내기 시작한 것은 <DANCING 박스>연작과 <ACCUMULATION>연작에 이르러서이다. 먼저, <DANCING BOX>는 인간의 가치 있는 삶과 예술의 가치는 무엇인지 고민하던 때 우연히 슈퍼마켓 귀퉁이에 버려진 박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늘상 지나가는 골목에 있는 한 슈퍼마켓 모퉁이에 버려져 있는 상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불렀다. 난 그때부터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상자들을 모아가며 그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작가 노트 중

 

도처에 널린 박스에서 더는 희망을 꿈꿀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연상했다. 자본의 산물이었지만, 보존의 가치를 상실한 순간 용도폐기 되는 수많은 상자가 어딘지 인간의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순간 무가치한 박스를 새로운 색과 형의 옷을 입혀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미적 대상으로 변신시켜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미술작품이 인간에게 주어야 할 것은 절망이 아닌 희망과 환희여야 한다’는 평소 예술관을 반영했다. 스스로 경험했던 긍정의 힘이 담긴 박스가 누군가에게 희망의 매개체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작품에 내재된 따뜻함, 깨끗함, 신선함도 희망을 담고자 하는 긍정적 사고에 기인한다.


<DANCING BOX>에 표현된 독특한 기법은 3차원의 물체를 2차원 면 위에 표현하는 여러 방법의 하나인 축측 투영법(Axonmetric Projection)에 가깝다. 축측 투영법은 일반적인 투시도법보다 공간적 유기체를 구성하기에 훨씬 효과적인데, 김봉태는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무중력 공간에서 박스가 살아서 춤추듯 환상적 이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에는 캔버스 대신 선택한 플렉시글라스(Plexiglass) 매체의 역할이 크다. 5mm 두께의 반투명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선과 형태, 형태와 배경이 교묘한 시각적 착시를 일으킨다. 플렉시글라스의 반투명이 뒷면의 배경색과 상자를 톤다운 시켜 안정감 있게 하는 동시에 앞면의 색이나 테이프와는 색의 대비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입체감과 공간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색은 그 자체로 개별성이 강한 만큼 다른 색과의 어울림이 중요하다. 화음이 맞지 않은 음악은 소음이듯 색조가 무너진 배치는 시각적으로 불편함만 준다. 뚜렷한 경계에 대치한 색일수록 잘못 배치하면 색의 고유성은 물론 조형성까지 무너지기 쉽다. 김봉태는 이러한 위험요소를 재료의 특성과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극복하며 선과 면을 균형 있게 조합하여 거부감 없는 시각적 즐거움을 충족시키고 있다.

 

<DANCING BOX>에 이은 <ACCUMULATION>은 김봉태의 일상적 삶에 훨씬 밀착된 것이 특징이다. <DANCING BOX>가 의인적이라면 <ACCUMULATION>은 은유적이다. 작업실 곳곳에 가득 쌓인 다종다양한 박스가 그대로 작품 속에서 재현되어 현재 그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면역기능이 약화되면서 쌓여 가는 약 상자부터 작업의 필수품인 물감박스, 공구박스, 즐겨 먹는 초콜릿 상자 등 일상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박스가 작품의 핵심적 소재로 등장한다. 최근 <ACCUMULATION>연작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계산적이고 작위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한층 자연스럽게 구성한 화면이다. 초기의 박스 작품이 조형적 완결성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박스의 색과 면을 건축적이고 기념비적 구조로 표현했다면, 근작은 흐트러지고 엎어진 채 바닥에 뒹구는 모습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DANCING BOX> 연작이 다양한 색과 형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춤추는 상자’라는 제한적 틀에 갇히기 쉽다면, <ACCUMULATION>연작은 박스의 관습적 상징을 훨씬 포괄적 의미, 즉 창조적 상징으로 확장하여 표현의 내용과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


엄밀하게 보면 인간의 삶은 하나의 축적이다. 누군가는 부를 축적하고, 누군가는 지식을 축적한다. 또 누군가는 경험이나 기술을 축적한다. 사람들의 인생은 세상의 수많은 색과 형태의 박스처럼 개별적이다. 따라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교차하고 관계를 쌓아가는 구조만큼 각각의 박스에 담긴 내용물이 다르고, 축적의 크기, 높이, 무게가 다르다.


그림도 하나의 축적이다. 작품은 아이디어, 시간, 열정, 경험, 기억이 모여서 쌓인 축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축적은 인간의 삶에서 형성되고 관계되는 모든 것의 쌓임을 상징한다. 축적된 박스는 그러한 세상, 혹은 누군가의 개별적 삶이 집약된 결정체이다.


결국에 김봉태의 플렉시글라스에 담긴 각양각색의 박스는 그의 삶이 축적해온 순수한 은유의 세계이다. 박스는 완결한 육면체를 위해 모든 면이 필요하듯 색과 색, 면과 면, 색과 면도 서로 존재하게 하는 연합임을 암시한다. 더불어 그 연합은 인간의 생존방식과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의 <DANCING BOX>나 <ACCUMULATION>이 단순한 그림을 넘어 정서적 교감을 일으키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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