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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톡톡> 예술과 비예술①-창조적 행위의 기준과 추상화

변종필

<아트톡톡> 예술과 비예술①-창조적 행위의 기준과 추상화


 

“네 가지 그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선택해 집안을 장식한다면 어떤 작품을 고르실 건가요? 그리고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현대미술 감상에 대한 특강에서 강의를 시작할 때 주로 하는 질문이다. 수강생들은 의외의 질문에 순간 당혹함을 느끼면서도 이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을 하나둘씩 선택한다. 그림을 선택하는 기준은 연령층, 성별,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의 유무에 따라 다르다. 평균적으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는 작품은 2번과 3번이다. 2번은 정열적인 색채가 강렬하여 에너지가 느껴지고, 3번은 시원한 색채가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는 이유가 응답의 주를 이룬다. 반면, 1번은 어수선하고 복잡해서, 4번은 색채가 어둡고 칙칙하다는 이유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많았다. 처음부터 2, 3번 그림이 색채가 강렬하여 시각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선택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한 셈이다. 어쨌든 선택 이유와 답변을 듣고 난 후 예시된 작품의 작가들을 소개하면 강의실은 놀라움과 웃음이 섞인 반전이 일어난다.

먼저, 1번과 4번은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칸딘스키와 잭슨폴록의 작품이다. 미술에 대한 조금의 관심이 있다면 작품은 몰라도 두 작가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세계적 작가이다. 문제는 2번과 3번의 작가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사람이 아닌 ‘콩고’라 불리는 털 없는 원숭이가 그린 애니멀아트이다. 이러한 사실이 공개되는 순간 1번과 4번을 선택한 사람들은 어딘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지만, 2번과 3번을 선택한 사람들의 반응과 표정은 애써 태연해하거나, 허탈함과 민망한 표정이 교차한다. 그럴만하다. 유명 화가가 아닌 원숭이가 그린 그림을 선택했으니 스스로 안목에 대해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원숭이의 그림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림 보는 안목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수년간 비슷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콩고의 그림을 선택했다. 특히 외국에서는 콩고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몰래카메라로 관찰했는데 대다수 사람이 이 그림을 유명작가의 작품으로 생각하며 유심히 바라보며 감상을 했다. 심지어 어느 저명한 미술평론가는 ‘콩고’의 그림을 보고 작가의 개성이 뚜렷한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콩고의 그림이 미술품 안목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재미있는 사례를 덧붙이면,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와 미로가 콩고의 그림을 소유했으며, 2005년 영국의 한 경매에서 콩고가 그린 세 점의 추상화가 무려 2만 5620달러(약 2,600만원)에 낙찰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이 점에서 보면 그림을 동물이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하다.

사실 작품의 선택이유를 놓고 보면 콩고의 그림을 선택한 사람들과 칸딘스키나 잭슨폴록의 작품을 선택한 사람들에서 명확한 기준이나 뚜렷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실제 1번과 4번의 선택자들에게 선택이유를 물었을 때 2번과 3번을 선택한 사람에 비해서 기준이 모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1번과 4번 작품에 대한 뚜렷한 선택이유를 지닌 경우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2, 3번의 응답자에 비해서 오히려 자신감이 모자란 답변이 많았다. 1번과 4번은 작품에 뚜렷한 주관적 선택보다 사전정보가 대부분 선택이유로 작용했다. 결국 1번과 4번 그림을 선택한 사람들의 기준은 작품에 내재한 예술성이 기준이 되었다기 보다는 작품과 관련한 내용을 학습하며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대상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콩고의 그림은 창조적 활동일까?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콩고의 그림은 하나의 이벤트적 사건일 뿐 창조적 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콩고가 다른 동물들과는 분명히 다른 행동으로 차별적인 그림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콩고의 그림을 미술사에 기록된 명작처럼 대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적어도 콩고 그림을 칸딘스키와 폴록의 작품처럼 사유, 즉 생각의 탄생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콩고의 그림에서 색채의 자유로움이나 화려함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러한 표현을 창의적 생각의 결과로 볼 수는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말해주듯 인간의 존재적 가치는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명제가 부정되지 않는 한 인간의 창조적 행위는 분명히 콩고와 같은 동물의 행위와는 같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칸딘스키와 잭슨폴록의 작품이 미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사유가 근원으로 작용한 창조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예시작품 중 1번은 미술사에서 최초의 추상화가로 꼽히는 칸딘스키의 작품이다. 1910년에 제작한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라는 작품으로 보다시피 확인 가능한 이미지가 없다. 단지 무질서해 보이는 선과 자유분방한 색이 화면을 메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칸딘스키는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의한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무의미해 보이지만 자신의 정신성이 내재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칸딘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굳이 해석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그림은 자신만의 내적 필요성에 의한 표출이기에 작품에 대한 느낌이 동일할 수 없다며 작품의 개별성을 강조했다. 칸딘스키의 주장과 무관하게 현대미술에서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 작품은 자유로운 붓놀림과 수채물감의 부드러운 번짐이 어우러져 마치 음악의 화음을 조율하듯 형태와 색채가 조화를 이루며 꿈틀댄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미적 평가는 추상표현주의 대표화가인 잭슨폴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폴록은 클레멘트 그린버그라는 당대 최고 비평가로부터 순수한 시각적 경험을 주는 회화세계라는 절대적 신뢰와 호평 속에 미국 내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모래를 이용하는 인디언의 주술적 표현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에 도입한 폴록의 드리핑 기법은 그 자체가 창의적 행동으로 다른 작품과 뚜렷한 차별성을 획득했다.

폴록 작품의 매력은 물감과 물감(엄밀하게 말하면 페인트)이 캔버스라는 공간에서 우연히 만나 무한한 심연의 세계를 만드는 특별함에 있다. 화가 대부분은 캔버스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폴록은 작품이 시작되고 끝나는 순간까지 바닥에 놓인 캔버스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물감과 물감의 충돌과 만남을 유도한다. 캔버스에서 나오기 전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정과 결과를 인식할 수 없다. 자신의 액션페인팅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캔버스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캔버스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잭슨폴록의 역할은 천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물감을 뿌리는 일이다. 폴록의 작품을 액션페인팅으로 칭하는 것도 이 같은 행위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누구나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드리핑으로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는 자칫 콩고의 그림과 잭슨폴록의 그림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다. 예술에 대한 사유를 추상표현주의라는 내적 정감으로 표출한 잭슨폴록을 콩고 그림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언급했듯이, 인간은 사유를 통해 존재적 가치를 획득한다. 따라서 콩고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물감을 선택하고 캔버스를 요구한 것이 아닌 한 콩고의 그림은 인간의 강요나 호기심에 의해 그려진 애니멀 페인트일 뿐이다. 이를 인간의 창작행위의 결과물과 비교․평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콩고 이후 오랑우탄이나 코끼리가 콩고와 같은 행위를 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일들은 하나의 이벤트일 뿐 예술행위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자칫 창작행위의 기준 또는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마저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부분은 ‘추상미술은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가? 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그림은 보는 순간 느껴지는 정감이 현재 자신의 감상 눈높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고, 어떤 대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의 차이다. 이 점에서 잭슨폴록이나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고 어떤 정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안목이 없거나 감정이 메말랐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음은 앞서 강조했다. 그럼에도 추상화는 미술사에서 회화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평가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기왕에 추상화를 무조건 기피하기 보다는 한번쯤 감상의 대상으로 가까이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추상화의 매력에 빠질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피카소의 작품은 추상화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가질만하다. 피카소가 입체파라 일컫는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의 시각적 이해를 저버린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이것이 도대체 뭐지? 뭘 그린거야?” 피카소는 대꾸했다. “사람들은 새소리는 묻지 않고서도 듣기 좋아라 하면서 그림만은 왜 그토록 물으려 드는가.” 당시 아는 것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한 피카소의 이 같은 항변은 오늘날 추상미술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갈등하는 사람에게 유효한 답변처럼 들린다. 피카소는 모든 대상을 잘 그리는 것뿐 아니라 미처 인식하지 못한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도 화가의 능력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미술사적 평가는 여러 시각에서 재평가되고 논의 되지만, 대상을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추상의 본질에 다가간 창조적 행위는 현대미술에서 추상화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한다. 그의 추상은 대상을 단순화시키며 사물의 본질에 순수하게 다가서는 하나의 과정이자 선택이었다.

피카소는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림을 배우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추상이란 항상 구체적인 실재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미술사에서 누구보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이었던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 그가 추상화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은 되새겨볼만 하다. “당신들은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아라!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라!”

 

<도판생략>

<참고>

* 콩고(털 없는 침팬지)는 1954년 영국 동물원에서 태어나 2∼4살 무렵에 약 400점의 데생과 유화를 남긴 뒤 1964년 결핵으로 죽었다. 이 침팬지는 연필과 붓을 받아들 때 다른 침팬지들과 달리 재빨리 사용법을 익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붓과 연필 잡기를 거부해 ‘마구잡이로 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콩고를 세상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털 없는 원숭이’의 저자로 유명한 데즈먼드 모리스. 1957년 콩고의 그림들을 모아 런던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 그는 “침팬지들이 인간 예술의 몇몇 요소를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화가와 모델>통해 피카소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마리테네즈의 사실적 모습이 아니라 그림 속 캔버스에 그려진 추상화이다. 피카소가 그린 마리테네즈의 모습은 사실적 형상은 아니지만 그녀가 뜨개질 하는 손동작의 궤적을 따라 그린 것임을 아는 순간 피카소가 그린 추상화는 자신과 모델보다는 마리테네즈가 머물고 있는 공간에 주목한 것임을 읽을 수 있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저, 박종성 옮김『생각의 탄생』에코의 서재. 2007. 참조 재작성.

*<아트톡톡>은 월간 전시가이드에 연재하는 글로 일반대중에게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쉽게 풀어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쓴글들입니다. 참고문헌은 글의등록절차상 생략한부분이 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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