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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톡톡>모던시대를 열다: ‘야수주의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변종필

<아트톡톡>

모던시대를 열다: ‘야수주의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전문 미술분야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뉘앙스와 관련하여 일상에서도 평범하게 쓰는 단어 중 하나가 ‘모던modern’이다. 모던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새로움, 발전, 진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작품을 보면 쉽게 ‘모던하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모던은 근대나 현대라는 시대구분이나 특정 스타일을 지칭할 때도 쓰이는 대단히 다양한 용례를 지닌 단어이다. 현대미술을 클래식 모던, 모던, 포스트모던 식으로 구분하거나 상황에 따라 각기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모던에 관한 개념이나 정의는 학자마다, 시대마다 달라 하나로 정의하거나 규정짓기 어렵다. 다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모던이란 낡은 것에 대한 저항이나 부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혁신하고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클래식 모던은 1905년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1900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간하고, 빈에서는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와 같은 표현주의적 미술이 정신분석학과 함께 등장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미술 탄생이 예고되었고, 그 신호탄이 된 것이 야수주의이다.

야수주의는 1905년에서 1908년의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조지만, 20세기 첫 번째 주도적인 아방가르드 미술로 평가받으며, 현대미술을 촉발시킨 사조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France, 85세)이다. 마티스는 드랭, 블라맹크, 뒤피, 루오 등으로 대변되는 야수파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작가로 20세기 미술가 중 피카소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힌다. 피카소가 형태를 재해석한 화가라면 마티스는 색채에 관한 연구에 주목했던 색채의 탐미자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처음 대중 앞에 공개되었을 때의 반응은 비난뿐이었다.

비난의 시작은 1905년의 ‘살롱 도톤느전’에서부터였다. 전시 작품 중 <모자를 쓴 여인>은 인상주의 화풍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충격보다 더 강한 불쾌감을 주며 비난을 받았다. 한 관람객이 ‘이것은 여인을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없다’고 힐난했다. 이에 마티스는 ‘그렇다. 나는 여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것이다.’라는 말로 대응하며 미술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혔다. 이 그림을 본 비평가 루이 보셀은 경악하며 “야수들의 우리에 내던져진 기독교도 여인의 운명 같다”는 말을 했다. 야수주란 용어는 이렇듯 야수들(wild beast ; Fauves)이라고 헐뜯는 데서 탄생한 것이다.

사실 얼핏 보면 그의 그림은 색조차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아이들이 손에 잡히는 대로 색을 집어 마음대로 칠한 듯한 느낌을 준다. 얼굴색부터 배경까지 어느 한 군데라도 전통적으로 인식되어오던 색과 형태를 지닌 여인의 그림이 아니다.

마티스가 화가가 된 것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이다. 법률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아버지에 비해서 몽상적이고 자유로움을 좋아했던 마티스는 아버지와 갈등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옆 침상의 환자가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기분전환 삼아 그려보고 싶은 마음에 붓을 들었던 것이 화가가 되는 출발점이었다. 화가의 길을 선택한 이후 아버지와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마티스는 부모의 곁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1891년 파리에 도착한 마티스는 두 번째 연인 아멜리의 헌신적인 내조에 힘입어 자신만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아멜리는 첫 번째 여인이었던 카미유 조블로와는 달리 마티스가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아내의 든든한 내조를 받으며 자신만의 화풍을 찾던 그에게 돌파구가 되었던 그림이 1905년에 그린<마티스 부인의 초상><도판2>이다. 초록, 빨강, 보라색 등의 강렬한 색채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실험한 작품이다. 마티스의 목표가 아동그림 같은 단순함을 얻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 그림을 이해할만하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본 사람이 ‘이것은 그리기가 너무 쉽겠군’ 하고 말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그가 읊조리듯 내뱉은 이 말은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예술의 공리로 군림해왔던 재현의 의무를 벗어던진 결과로 이어졌다. 야수주의가 모사 대상의 색깔을 닮을 의무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원색의 향연, 즉 색채가 해방되는 순간이다

색채의 향연, 색의 해방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생의 기쁨>을 꼽을 수 있다.<도판3> 이 그림은 1906년에 그린 것으로 초기 시냑의 점묘법 위주의 스타일에서 탈피하며 자신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반 고흐의 주관적 색채, 고갱의 두터운 윤곽선, 특히 세잔의 작품에서 화면에 대비되는 색채를 분배하여 회화 표면 전체에서 색채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하는 색채에 관한 개념적인 부분을 배웠다. <생의 기쁨>은 소장자였던 미국인 의사 앨버트 반즈가 남긴 약정서 때문에 사후에 흑백도판으로만 출판되다가 컬러도판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93년 그러니까 1922년 반즈가 구매한 이후 70여 년이 지나서야 일반인에게 공개된 셈이다.

마티스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깨달은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색과 색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그는 야수주의 살롱전을 끝내고 난 후 “1제곱센티미터의 파란색은 1제곱미터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다”라는 말을 통해 색채간의 관계가 표현과 양(量)의 관계에 있음을 밝혔다. <도판 4>의 <붉은 실내>와 <춤>은 색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그의 대표작들이다. 특히 <춤>과 관련한 마티스의 고백은 작품의 특징을 엿보게 한다.

 

'대형의 춤을 위해서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랑, 인물을 위한 분홍, 그리고 동산을 위한 초록색이면 족하다. 우리의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 시킴으로써 고요함을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표현적이며 장식적인 ‘조화’이다.”

 

마티스가 추구한 조화는 아름다움보다는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장식적인 작품들은 1차 세계대전 동안 시대상황을 외면하고 이상적인 그림에만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 받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미술을 통해 꿈꾸었던 것이 절망이나 비극 등이 아닌 기쁨, 환희, 순수, 평온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적어도 필자는 마티스의 그림 앞에서 안락한 의자에 기대어 마티스가 안내하는 즐거움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마음이 들수록 마티스의 예술세계에 가까이 다가서는 셈이다.

마티스와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 중 1913년 이모리 쇼에서 그의 작품이 소개되면서 생긴 일과 말년에 관절염과 십이지장암으로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창조적 작품세계를 보여준 일화는 유명하다.

먼저, 1913년 야수파의 그림이 미국인에게 처음 소개되었을 때, 당시 마티스의 작품을 본 미국인 관객들의 반응은 8년 전 프랑스에서의 비난보다 더욱 격렬했다. 한마디로 충격에 휩싸인 관객들은 ‘폭탄’과 ‘침공’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비판과 조소를 서슴지 않았다. 급기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학생과 교수들은 마티스의 반전통적 색채와 왜곡된 형태에 분노하며 그의 복사본 그림을 불태우는 모의재판까지 열었다고 하니 마티스의 작품에 대한 미국인들의 적개심을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재미있는 일은 그렇게 분노의 대상이었던 마티스의 작품을 오늘날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42점이나 소장하고 있으니 이 또한 기막힌 반전이 아닐 수 없다. 현대미술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당시 마티스를 비판하던 미술계 인사들의 안목은 또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예술이 지닌 아이러니이다.

다음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탄생과 관련한 이야기는 이렇다. 그는 수술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지자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에 목탄 조각을 매달고 침대에 누워 천장에 거대한 인물상을 스케치하였다. 특히 원색의 색종이를 선택한 후 타인의 도움을 받아 일차 캔버스에 배치하여, 색들의 관계성을 고려해 화면에 붙이는 이른바 색종이 콜라주 시리즈는 신체적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보여준 마티스의 위대한 창조적 결과물로 꼽힌다. 콜라주시리즈는 마티스가 보여주고자 했던 단순한 형태와 색채의 조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제작했다는 삼원색과 보색의 관계를 표현한 <달팽이><도판5>는 단색 과슈를 칠한 색종이를 임의대로 자른 후 완성한 콜라주시리즈의 대표작이다.

20세기 피카소와 더불어 모더니즘의 창시자로 꼽히는 마티스는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2005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240만 달러(약 235억 원)에 팔린 ‘마티스에 대한 경의(Homage to Matisse)’<도판 5>를 그린 미국의 색면추상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70)는 마티스의 색에 대한 개념을 작품화한 대표 화가라 할 수 있다. 미술의 외적인 요소 대신 색과 면의 관계로 예술의 새로운 시각을 추구한 부분이 마티스가 색채들의 관계에 주목했던 시선과 같은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모던은 전통의 반복이냐 새로운 형식의 진보냐에 따라 논쟁이 일기도 하지만, 근래 유행했던 포스트모던 역시 결국 모던이 낳은 미술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모던시대를 열었던 야수주의야 말로 현대미술의 모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야수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야수주의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라고 단언했던 마티스는 모던미술의 시작을 열었던 화가이다.

 

<전시가이드 연재글-도판생략>

<참고문헌>

엘리자베스 러데이 지음, 최재경옮김『미술시간에 가르쳐주지 않는 예술가들의 사생활』에버리치홀딩스, 2010.

진중권『서양미술사-모더니즘편』휴머니스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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