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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의 '태고의 신비와 전설, 그 영원을 향한 노정'

변종필

태고의 신비와 전설, 그 영원을 향한 노정

 

박돈(1928~)은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원로화가로 향토적 정감이 가득한 화풍으로 널리 알려졌다. 분단의 아픔을 초극(超克)한 그의 그림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고향의 푼푼한 정과 향기를 느끼게 해준다. 박돈은 1970년 중반부터 지금까지 고유의 정형화된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신비한 분위기에 향토적 모티브가 강한 소재들로 구성한 독특한 화풍을 펼쳐왔다. 멀리 수평선 너머 떠오르는 붉은 해, 어머니 품 같은 자연, 댕기 머리 빨간 저고리 처녀, 벌거숭이 피리 부는 소년, 그리고 백자, 오리, 닭, 말, 사슴 등의 다양한 소재들이 여전히 그의 회화세계를 대변한다. 목가적 향취가 그윽한 풍정(風情)은 차라리 원시적이라 할 만큼 소박하고 순수하다. 환상과 신비가 넘실대는 묵화(墨畵)적 세계를 통해 태고의 신비와 전설을 그린다. 이토록 40여 년 이상 일관된 조형의지를 고집한 박돈 회화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현대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미감과 의미를 되짚어본다.

 

박돈은 황해도 장연(長淵) 출생으로 백령도의 장군바위가 그려진 <명사심리의 노래>작품처럼 원시적 풍광을 뽐내는 곳에서 자랐다. 하지만 해방 후 1949년(21세), 예술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남하한 그에게 고향은 작품으로밖에 찾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의 창작활동을 망향의 설움을 달래는 하나의 위로이자 향수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박돈은 1940~1950년대 향토성이 한국 정서를 반영한 하나의 양식처럼 전개되던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만큼 그의 작품이 당시의 시대적 정서와 향취를 담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관련해 박돈의 회화에 표현된 모티브의 특성과 상징적 의미들을 조합하여 ‘식물성의 회화’라고 했던 견해(오광수)나, 잠재의식에서 내재된 향토적 정감을 끌어내는 환상적 창조력을 강조하며 ‘향토미의 찬가’라고 했던 시각(이구열)은 그의 작품에 내재된 공통적 미감을 이해하는 시선으로 충분하다. 여기에 박돈 작품을 시대를 역류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느림의 미학’이라고 밝힌 시각(신항섭) 역시 설득력이 있다.

솔직히 박돈의 회화는 속도가 강조되는 최첨단시대의 현대인 삶과는 분명히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그의 화풍은 인터넷의 가상현실을 즐기는 세대에게는 한편의 설화나 동화적 이미지로 보이기 쉽다. 몇 번의 클릭으로 세상 곳곳에 펼쳐진 신비하고 환상적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현대인에게 그의 작품은 시간과 세월을 거스른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 시대를 뛰어넘어 미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적 미감이 내재하고 있을 때이다. 작품의 가치는 개인 추억이나 소재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 진정한 미적 가치는 작품 내면에 침잠되어 있는 작가 정신과 조형의지가 만난 무게에 있다. 박돈 회화의 진정한 가치 역시 개인의 복고적 향취에 머물지 않고, 개별성을 획득한 회화이자 현대사회에 던지는 예술적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 속도감 없는 정적인 화면구성, 동양적 감성이 가득한 묵화(墨畵)적 표현은 단순한 조형적 형식을 넘어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실상 그의 회화는 우리의 보편적 정서와 감성을 자극하는 파토스가 강하다. 소녀와 소년, 말, 황소, 닭, 오리, 비둘기, 소나무, 초가집, 야산, 바다, 하늘, 달 등 자연적 소재와 질그릇, 백자, 접시, 그릇 등의 인공적 소재가 유기적 관계로 등장한다. 때때로 백자항아리가 둥근 달을 대신하고, 둥근 달로 삼은 질그릇에는 토끼 대신 피리 부는 소년이 그려지는 등 회화에 등장하는 소재에서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공존공생(共存共生)하는 유기적 관계로서 인간과 자연은 태초에서부터 함께했던 관계이자 삶의 근원임을 밝힌다. 인간이 과학의 발달이후에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상향에 대한 희망과 꿈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박돈이 현대사회의 빠른 변모만큼 인간미를 상실하고,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자연친화적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인간적 감성을 회복하고자 고집하는 것도 비슷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알려진바, 박돈 회화의 대표적 개별성은 독특한 마티에르(matiere)이다. 그의 독특한 마티에르는 우연이었지만, 아연화(亞鉛華)에서 기름 제거법을 발견한 시점에서 출발한다. 1974년 개인전(신세계)에서 새로운 기법으로 제작한 47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회화세계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는 화가로서 삶을 통틀어 가장 큰 변화의 전환점이었고, 현재까지 그만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마티에르 형성과정에 따른 화풍의 변화는 1956년 작<언덕의 소년>, 1957년 작<성지>와 비교하면, 1974년 이후 정형화된 패턴이 뚜렷하게 자리 잡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그의 독특한 마티에르의 모티브는 투박하고 토담 같은 질그릇에 푹 빠져 그 표면의 질감을 따르고 싶었던 욕구가 생기면서 유화의 광택(기름기)을 빼는 작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림 속 소재 중 유독 눈에 띄는 도자기 이미지가 바로 마티에르의 근원이다. 이는 실제 집안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다양한 도자기에 대한 화가의 편애에서 충분히 감지된다. 흙으로 그릇을 빚는 일이 인류 창작활동의 시원이었듯이 그는 자신의 회화를 통해 태고의 숨결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박돈 회화의 마티에르는 옛 도기를 매일같이 매만지고 쓰다듬으며 느꼈던 질그릇 감촉을 그대로 옮기는 고단한 과정으로부터 탄생한 결과이다. 고요하면서도 깊이 있는 마티에르를 얻기 위한 집중력과 긴장은 그의 삶 속에서 변함없이 반복하는 유일한 행위이기도 하다. 실제로 몇 해 전의 그림이라도 부족하거나 형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수정 후 새로 제작연도를 적는다. 하나의 작품에 기울이는 열정과 집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시간에 쫓기는 삶이 아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마음의 여유인지, 고단한 과정을 애써 거부하지 않는다. 옛것으로부터 무욕, 무심, 여백을 발견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인사동, 박물관을 돌며 우리 도자기를 감상하며, 옛 선인들로부터 절제와 비움의 미학을 배운 것은 작품의 결과를 넘어 스스로 삶을 지탱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원하는 마티에르가 나올 때까지 문지르고 깎아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숱한 노력과 시간이 이제 세월의 깊이에도 변하지 않는 색감으로 보답하고 있다.

박돈 회화의 조형특징에서 빠트릴 수 없는 묵화(墨畵)적 표현 역시 같은 맥락이다. 모든 것을 흡수할 것 같은 깊이감은 마티에르와 함께 그가 추구해온 표현의지이다. 사막의 모래 늪처럼 펼쳐진 황색 빛깔 해변이나 자연을 휘감아 품은 구름은 전통수묵화가 지닌 먹의 다양한 변화와 깊이에서 찾아낸 결과이다. 그의 회화가 동양적 정취를 품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묵직한 마티에르에서 번지듯 스며든 색이 최근작일수록 더 투명하고 가벼워졌지만, 상대적으로 평면성과 단순함에서 오는 깊이감은 세월의 흐름만큼 더 깊어진 느낌이다. 안(마음)으로 쌓일수록 밖(현실)으로는 비운다는 의미로 읽힌다.

결론적으로 박돈의 회화는 자연과 인간의 존재적 근원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심정으로 태고의 신비와 전설을 찾아 떠나는 영원한 노정이다. 유독 빠른 변화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인간상을 싫어하는 화가의 마음에 동요된 탓일까. 세월을 붙들어 둔 적요의 공간 속에 잔잔하게 담아낸 간결함과 순수함, 서정성과 인간미가 한없이 정겹다. 오랜 세월 한결같은 작가 정신으로 인간의 원초적 삶을 따르는 노정이 아름답다.

 <미술과 비평-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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