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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寫一言>인간의 에로티시즘은 동물적인 것과 무관하다.

변종필

 일생을 무신론의 시각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원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했던 인물,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 프랑스)는 인간의 에로티시즘이 동물적인 것과는 결코 무관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에로티시즘에는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있으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인간의 에로티시즘은 단순한 동물의 성행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거꾸로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 가치(혹은 에로틱한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성적인 금기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지으며 성적인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경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성행위는 동물적 충동, 다시 말해 억제할 수도 없고 덧없으며 의미도 없는 자유로운 성행위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바타유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해서 전개된다.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 성적 대상에 적용될 때 우리가 품는 열망을 에로티시즘이라고 부른다. 에로티시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사실 금지와 금기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점이 바타유가 에로티시즘이 동물의 성적 충동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던 이유기이도 하다. 동물에게는 특정한 금지나 금기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강신주 『상처받지 않을 권리』 프로네시스, 2009.

생각해보면,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금기사항을 붉은 글씨로 써넣은 영화광고판이 자극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야동(?)을 다운받을 수 있는 시절이지만, 90년대 전만 하더라도 미성년자에 대한 엄격함은 비윤리적, 비도덕적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어떠한 엄격한 제도적 틀로 가둘 수 없을 만큼 무한대로 열려있는 가상공간에서 과감한 성적이미지와 만난다. 노출증에 사로잡힌 세계마냥 성적이미지가 적나라게 드러나는 노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성적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타락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인간의 성적 욕망은 동물의 본능적인 것과는 엄격히 다르다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늘날 이러한 최소한의 책임마저도 무시하는 비인간적인 현상들이 즐비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금기와 금지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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