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미술가로 산다는 것

변종필

미술가로 산다는 것

 

Ⅰ.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피로사회』는 정신질환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성과위주의 현대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책이다. 책의 저자는 인간의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과 같은 심리장애를 오늘날 성과사회의 근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패러다임적 전환의 결과로 해석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폐해와 정신장애 역시 성과사회를 추구하며 나타난 문제점이라는 점에서『피로사회』야말로 현재 대한민국의 건강상태를 진단한 예리한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성공만이 유일한 규율이고, 이 성공을 위해서 부정성을 폐기하고 긍정의 힘을 강조하지만, 정작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여러 부작용에는 예방책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2012년 12월 대선정국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대한민국은 또 다른 성과사회를 만들기 위한 주체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보면서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는『피로사회』의 글귀를 떠올리며 이 시대에 미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Ⅱ.

오늘날 진행 중인 우리나라 정치사회는 활동적이고 생산적 삶의 가속화에 치중하다 보니 정작 인간(자아)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사색적 삶의 중요성과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다. 외형적 완성, 즉 성과나 실적에 급급한 우리의 문화예술정책을 칸트의 말로 빗대어 표현하자면 ‘내용 없는 형식의 공허함, 형식 없는 내용의 맹목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용과 형식이 부재한 미술품을 보는 것과 같다. 사실 이론과 실재, 정책과 실행의 불일치에서 오는 계층 간 불협화음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예술문화시대를 외치면서 정작 그에 걸맞은 실천공약은 없고, 전문성을 강조하지만, 인프라구축에는 무관심하다. 창의적 활동의 중요성은 인식하면서도, 개인창작 활동의 지원은 미비하다. 경제성장과 문화성장은 따로따로이고, 복지와 분배는 이론적일 뿐 정작 현실에서 계층 간 양극화는 극심하다.

예술인의 70%가 예술 활동으로 얻은 수입이 월평균 100만 원 이하이고, 예술인의 81.5%가 거듭된 생활고와 가족부양의 책임감에 떠밀려 예술가로 사는 삶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은 화가의 삶이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학진학 때문에 목숨을 끊고 취업 때문에 자살하는 대학생이 늘어나는 사건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OECD 국가(140개국) 중 국민의 행복지수가 103위(2011년 기준)라는 리서치만 보더라도 국민에게 기초예술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과 정책과제 전반에 대한 점검과 대안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본질적 문제해결을 위한 뚜렷한 개선방안이 없이 특정직업에 대한 쏠림현상이나 직종에 따른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지난 2012년 우리나라 759개 직업에 종사하는 2만 6천여 명을 대상으로 직업 만족도를 조사한 리서치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초등학교 교장(1위), 성우, 상담전문가, 작곡가, 학예사(큐레이터), 대학교수, 국악인, 아나운서, 놀이치료사가 상위 10위권을 차지하고, 미술대학 졸업 시 직업으로 인정받지 않는 화가가 당당히 28위에 이름이 링크됐다. 금전적 수익보다는 직업의 만족도에 대한 리서치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결과가 주는 느낌은 크다. 예컨대 중고등학교 교장보다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교사보다는 초등학교 교사가 만족도가 높은 것은 그만큼 경쟁체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방증이다. 입시와 취업으로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고, 치료사, 상담사가 순위에 포함된 것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이 그만큼 병들었다는 의미이다. 소득의 측면에서는 의사, 판사 등이 월등하지만, 직업의 만족도만 놓고 보면 직업에 대한 국민의 인식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도 우리 사회는 각 대학과 전공의 정체성이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입학에서부터 졸업까지 줄 세우기로 대학을 평가하는 식의 비합리적이며 무의미한 정책을 반복하고 있다. 평가제도를 개선한다고 했지만, 작년까지 대학평가에서 미술대학 출신마저 일반 전공자와 같이 취업결과를 하나의 평가항목으로 삼은 과정은 국가가 앞장서서 예술가의 꿈을 취업 여부로 판단하는 오류를 보여준 셈이다.

759개 직업에서 직업 만족도 28위를 차지한 화가라는 직업은 현 대학평가제도에서는 여전히 무직일 뿐이다. 국민에게 약속한 일자리 창출을 대학의 취업률평가로 압박하고, 대학은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실적 쌓기에 고군분투하는 현실. 미술대학 강의실은 창작의 열정보다 취업경쟁 공간이 돼버렸고, 취업률 때문에 대학 내 공공의 적이 돼버린 미술대학은 교수가 나서서 학생들의 스펙 쌓기를 독려하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기초예술의 튼실한 기반을 육성하기보다 저급한 시장논리 속에 예술의 고유성을 심각하게 오염시키는 일에 국가와 대학이 앞장서고 있는 셈이다. 수치상의 데이터와 실적 쌓기 보다는 하나의 국가정책이 연관된 직업 종사자들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고민할 때이다. 말춤 하나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싸이의 열풍, 김기덕 감독의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과 같은 놀라운 반전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지만, 이들의 공로를 훈장으로 격려(?)하는 정부기관의 행정은 그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정작 예술인을 위한 창작지원정책에서의 특별한 감동이 없음이 아쉽다.

 

Ⅲ.

미술대학생들의 경우 취업하기 위해 젊은 날 꿈꾸었던 미술가의 길을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예술가적 의지를 탓하기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정책이나 사회적 인식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나 사회, 가족에 이르기까지 미술전공자가 한 사람의 예술가로 성장하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최근 한 미술대학의 움직임이 시선을 끈다. 미술대학 졸업전시를 ‘신진작가발굴프로젝트’라는 기획전시로 탈바꿈시켜 새로운 차원의 전시형태로 변화를 모색하려는 기획이 새롭다. 사실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변해버린 미술대학의 졸업전은 예술가의 길을 내딛기 위한 출발점의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 4년제 학부를 졸업하면서 쌓은 경력은 취직을 위한 스펙일 뿐 정작 창작활동을 위해 흘린 땀방울은 이력서 한 줄 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 미술대학 졸업전이 끝나고 나면 공허함이 가득한 실기실에는 창작의 열정이 가득했던 시절의 열기를 찾기 어렵다. 졸업생의 전공이나 대학의 정체성 확립에는 무관심한 국가를 대신해 대학 스스로 대안을 찾아야 하는 현실에서 이번 작가발굴프로젝트는 최소한 자신을 직접 홍보하고 스스로 예술적 가능성을 키워나갈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영국의 yBa 작가를 통해서 새로운 형식의 졸업전이 세계미술 시장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충분히 목격했다. 어쩌면 때늦은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미술대학이 더는 현재의 형식으로는 자생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에 공감할수록 변화는 불가피하다. 예술문화시대에 맞는 정책이 부재한 현실을 보면서 실망하기보다는 미술인 스스로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 빠른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며, 무엇보다 진정한 창작인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미술대학 출신자들의 이야기를 담은『미대 나와 무얼 할까?』라는 책을 보면 게임콘셉트아티스트, 모션그래퍼, 생태그림책화가, 미술품 복원사, 무대디자이너, 인테리어디자이너, 사진작가, 영화미술감독, 아트디렉터, 애니메이션제작자, 만화가, 아트스토리텔러 등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직업이 21세기 성공신화를 이끌 수 있음을 예시한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미술대학 출신이다. 미술은 그 성격상 이미 창조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분야라는 점에서 보편적 인식의 틀에 맞는 직장과는 출발부터 다른 셈이다. 작은 차이로 인생의 큰 차이를 이끌어내는 직업, 소위 ‘make a difference' 차이를 만들어가는 삶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강조되고 있는 융합도 중요하지만, 차이 역시 중요하다. 융합은 결국 강한 성분에 약한 성분이 흡수된다는 느낌이 강하다면 차이는 미묘한 다름마저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Ⅳ.

예술은 본질적으로 창작의 산물이다. 창조적 작품은 편리함보다는 불편하고, 익숙함보다는 낯섦에 가깝다. 세상의 모든 직업에는 창조성이 필요하지만, 창조성은 어느 한순간 혹은 우연한 일회성 아이디어는 아니다. 미술의 역사는 습관처럼 반복되는 전통과 형식보다 새로운 시각을 통해 미술을 재인식하는 창조적 도전에 더 가치를 두었다. 이 같은 역사는 당대 미술계의 주체들이 만든 견고한 아성을 향해 당당하게 창조적 의지를 표현한 미술가들의 힘이 만든 결과이다. 이는 어느 순간 무력해진 나태함을 일깨우는 부정의 힘으로 니체가 언급한 ‘아니다’고 말하는 힘과 같다. 이때의 아니다는 무조건적 반대가 아닌 무기력하게 어떤 것에 종속되거나 있음을 거부할 수 있는 부정적 힘이다. 한마디로 긍정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궁극에는 올바른 정신성을 되찾기 위한 과정으로써 필요한 힘이다. 이 점에서 보면 비평가 역시 차이를 만드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있는 사람으로 부정적 힘으로 창의성을 깨우는 직업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사회제도적 모순에 당당히 한목소리를 내며, 미술인의 지위를 스스로 지켜나가야 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몫이다. 미술평론가의 부정적(否定的) 사고는 창조적 삶을 이끄는 진정한 자유의지로써 필력(筆力)이라고 생각한다.

(미술평단 2012. 12)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