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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톡톡>시대를 뛰어넘어 되살아난 ‘피에타’

변종필

 

 

 

2012년 9월, 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황금사자상(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세계영화계를 놀라게 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그의 유명해진 영화만큼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영화 포스터였다. 한 남성이 여인의 무릎에 받쳐 안겨 있는 홍보용 영화 포스터는 세계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조각상의 하나로 꼽히는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피에타>를 떠오르게 한다. 격정이나 열정(Pathos)등 인간의 감정적 요소가 최대한 억제된 작품으로 유명한 <피에타>는 155cm 단신의 미켈란젤로가 23세에 완성한 작품이다. 1498년 루앙 교구의 추기경으로 불리는 산 드리 추기경이 로마에 체재하는 동안, 자신을 위한 기념물을 남기려는 의도로 미켈란젤로를 여러 차례 설득한 끝에 등신대 크기, 1년 이내 완성이라는 조건부 계약을 맺어 탄생시킨 조각상이다.

 

피에타(Pieta)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특별히 십자가에서 끌어내린 예수를 입관하기에 앞서 마리아가 잠시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주위배경으로부터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다룬 주제를 말하며, 그 의미는 ‘자비를 베푸소서’이다. 피에타처럼 미술작품에서는 어떤 단어가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거나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대표하는 단어로 사용되다 결과적으로 그 상징적 이미지를 뜻하는 단어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마에스타(Maesta)’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에서는 장엄한 연주법(maestoso)을 의미하지만, 미술작품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보좌에 앉아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그 주위를 천사들이 에워싸는 구성을 일컫는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작가의 모든 기량이 발휘된 작품으로 데생의 완벽함, 아취 있는 단순성, 표현의 진수, 안정 있는 삼각구도 등 누구와도 견주기 어려운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원근법적 표현, 골격 근육, 혈관, 신경, 팔의 위치, 무릎, 엉덩이 등 바사리의 묘사대로 모두가 기적의 소산이라 할만하다. 특히 피에타는 해부학에 근거한 인체 구조의 완벽한 표현에서 독보적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활동했던 미술가라면 누구든 인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 당연지사였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미켈란젤로만큼 표현한 것은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당시 수도원장이었던 니콜로 디 조반니 비키엘리니의 도움(인체해부는 종교적으로 비난의 대상이었던 점에서 미켈란젤로의 인체연구는 하나의 특권이었다)으로 인체에 관한 연구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관심은 ‘뼈와 근육 구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연구가 ‘신경과 순환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것과 비교하면 그 예술적 차이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먼저, 이 작품이 완성된 당시 볼품없는 돌멩이를 신과 같은 최고의 솜씨로 탄생시켰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작품을 제작한 미켈란젤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느 날 피에타가 설치된 장소에 왔던 군중이 작품을 격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이 작품을 밀라노의 화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그날 밤 성모마리아의 가슴에 두른 띠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는 그가 남긴 최초의 사인이었다. 작품이 완성된 후에는 <도판 2>에서 보듯이 성모마리아가 예수그리스도보다 너무도 앳된 얼굴이라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했다. 여기에 미켈란젤로는 “육체에 티끌만큼도 더러운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동정녀는 당연히 순결하지 않은 여자보다 젊음을 더 간직할 수 있다.”라고 하며 제작의도를 깊이 있게 통찰하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했다.

이 작품은 혹독한 유명세도 치렀다. 1972년 성신감림 축일, 헝가리 태상의 오스트리아 유대인 지질학자 라슬로 토트가 무려 열다섯 번이나 지질탐사용 망치를 휘둘러 성모마리아의 코가 떨어져 나가고 눈꺼풀이 깨지는 봉변을 겪었다. “나는 예수다”라고 외쳐대며 소란을 피운 그는 정신이상으로 판명되어 형벌 대신 정신병원에 갇혔지만, 이른바 반달리즘(Vandalism; 문화적 가치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보호받는 것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행위)으로 불리는 이 사건 때문에 현재 <피에타>는 피에트로 대성당(San Pitro Basilca)안에서 전체를 감상하지 못한 채 방탄유리를 사이에 두고 바라봐야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살아있는 동안 또 다른 ‘피에타’상들을 제작했다. 아래의 두 작품 역시 그가 제작한 <피에타>이다.

 

 

이 작품들은 1499년에 제작한 <피에타>와 비교하면 ‘같은 조각가 맞아?’라는 의구심이 들 만큼 다른 느낌을 준다. 1499년 작품이 혈기왕성한 20대의 열정적이고 뛰어난 재능을 선보인 작품이라면 <도판 3>의 <반디니 피에타>는 73세에 제작하기 시작한 작품 으로 삶의 깊이가 담겨 더욱 심오해졌다. 20대의 <피에타>가 시각적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대중적 작품이라면, 70대의 <반디니 피에타>는 노년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자화상이라 할 만큼 지극히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오른쪽의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80세에 시작한 작품으로 8년이란 시간을 투자하고도 끝내 완성하지 못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제자 볼테라에 따르면 미켈란젤로가 죽기 6일전(1564년 2월 12일)에도 온종일 손질했다고 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외형적 완벽함을 추구했던 작품들과는 또 다른 각별함을 준다. ‘미완성의 완성’이랄까. <론다니니 피에타>와 같은 미완성작은 미켈란젤로의 완성작품에서는 접할 수 없는 조각과정을 비롯해 삶과 죽음에 대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겪은 종교적, 작가적 고뇌를 동시에 엿볼 수 있기에 특별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당대는 물론 고전주의 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하다. <도판 4>의 왼쪽은 라파엘로가 1507년에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온 그리스도>다.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불린 그의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동세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라파엘로는 회화의 특성을 살려 그리스도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지만, 미켈란젤로의 조각상과 비교하면 오히려 더 딱딱한 느낌이 있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다비드가 1793년에 제작한 <마라의 죽음> 역시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연관 있다. 마라의 축 늘어진 팔이 미켈란젤로의 예수그리스도 팔과 흡사하다. 피에타는 세계미술인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작가에게서도 되살아나고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출품되어 주목을 받았던 이용백 작가의 <피에타-자기부정>은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의미, 재료, 제작기법 등에서 확연한 차이는 있지만, <피에타>를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작품이다.

 

 

손이 떨릴 만큼 힘든 말년에도 석공 3명이 족히 3시간은 해야 할 작업량을 단지 15분 만에 깎아냈다는 미켈란젤로. 조각술의 최고 경지에 있었던 그가 떠난 지 수백 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피에타>는 여전히 세계인의 곁에 남아 변함없는 찬사와 사랑을 받는다.

23세에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때로부터 89세로 영면에 들기 전까지 미켈란젤로의 삶과 예술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던 ‘피에타’는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전시가이드 연재글>

 

<참고문헌>

지오르지오 바사리 저, 이근배 역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탐구당. 1986.

이주헌 『지식의 미술관』아트북스. 2009.

장 피에르 윈터․알렉상들라 파브르 지음, 김희경 옮김『명작스캔들Ⅱ』이숲. 2012.

*전시월간에는 각주가 명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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