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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존재론적 삶의 표상’

변종필

화가가 붓을 드는 한 가지 이유는 그만의 단 하나 중요한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간절함 때문이다. 그리고 붓 끝에 표현된 극것이 타인의 삶과는 무관할지라도 진솔함이 담긴 화가의 시선은 관람자의 눈길을 빼앗을 만한 이유가 된다. 특히 그 간절함이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을 때 그림은 삶의 가려진 쪽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정수일의 작품은 대학원 이후 8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었던 만큼 일관된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오랜 공백을 깨고 개인전을 통해서 보여준 그의 작품세계는 순수하게 그림을 사랑했던 시절의 열정과 꿈을 포기하지 못한 한 사람의 욕망으로만 보기에는 의외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세계를 주목할 만한 충분한 동기를 준다. 정수일의 작품은 근작을 중심으로 볼 때 ‘인물’과 ‘풍경’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압축할 수 있다.

먼저, ‘인물’은 가족 중심으로 주된 표현 대상은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단순한 표현 대상을 넘어 현재의 작품세계를 이끈 근원이자 하나의 매개자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버지의 병환은그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궁극에는 자신이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고, 자각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첫 개인전이다.

 

‘2004년 1월 16일 오전 8시경,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누워서 거동조차 못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그림은 철없는 아들이 놓지 못하는 못된 버릇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 때문에 멈췄던 작업을 아버지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작가노트>

 

‘아버지’시리즈는 ‘극한의 고통에서 찾아낸 극한의 아름다움’이다. 그의 그림은 아버지 생전에 보여 드리고 싶은 사부화(思父畵)이다.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오른쪽 반신마비와 언어장애를 겪고 있다. 마비와 장애는 아버지의 고통이지만, 이는 가족에게도 똑같은 삶의 마비와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동안 현실을 받아들고 그 현실에서 또 다른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가족의 사랑이고 힘이다. 정수일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살아오는 동안 가장 가까이서 아버지를 모시며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아버지와 자신의 현실에 순응한 결과이다. <이눔에 똥파리>와 <휴(休)>는 이러한 작가의 솔직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슬픈 현실을 오히려 해학적으로, 또는 가벼운 일상의 모습으로 접근한 작가의 시선이 여유롭다. <이눔에 똥파리>는 ‘왱~왱’거리며 귀찮게 하는 파리 한 마리를 쫓을 힘도 없을 만큼 나약해진 아버지와 유독 마비된 쪽에서만 맴돌며 괴롭히는 파리와 신경전을 유쾌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 달리 이 작품은 나약해진 신체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가 세상살이의 힘겨운 이 시대 아버지들을 대변하는 느낌을 준다. 어느 순간 손과 발이 된 전동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시대의 아버지상으로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휴(休)>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산책 후 요구르트 한 병에 목마름을 달래는 일이 하루 중 기다려지는 순간이 돼버린 모습에 삶의 순박함과 허무함이 섞여 있다.

한편, 그의 작품 중 <충전중>은 섬뜩할 정도로 진한 빨간 입술과 어색한 아이라인 때문에 당혹스럽다. 작가는 아버지의 남겨진 삶이야말로 또 다른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인생을 재충전하는 모습으로 그렸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렬한 빨간색, 흑과 백으로 이분화 시킨 화면구성은 생과 사, 즉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론적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궁극에는 <흐뭇>, <이눔에 똥파리>, <휴(休)>, <충전중>으로 이어진 시리즈는 아버지 삶의 흔적이자 작가 정수일의 삶이다. <흐뭇>과 <휴(休)>에서 처럼 그의 작품 속에는 항상 과거와 현재의 아버지가 공존하고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 모두 작가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진실임을 말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 등 모순된 반대 개념이 결국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강조한 어느 문학가처럼 정수일에게 아버지는 대립이나 갈등의 대상이 아닌 자신이 인정하고 따라야 하는 정체(正體)이다.

 정수일의 ‘아버지’시리즈가 현실이라면 ‘풍경’시리즈는 화가로서의 이상을 한층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그의 풍경은 재현의 대상을 넘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붙잡아 두고 싶은 어느 시공간을 가리킨다. 그 곳에는 예술, 가족, 친구, 꿈, 이상 등 삶을 생기 있게 한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작가는 오늘이라는 시공간 속에 있지만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화폭에 담으려 한다. 이는 화가의 삶을 당당하게 그려나갔던 과거 속의 자신을 현재의 시점으로 이동하고 싶은 욕망의 한 가지이다. <26분의 상념(想念)>은 이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02년 어느 날, 작품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지인들과 함께했던 한계령 휴게소의 추억을 되살려 10년이 훌쩍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그린 것으로 특별히 그때의 추억을 26조각으로 나누어 조각마다 연상되는 상념을 담았다. 하나의 조각이 완성되면 그 풍경은 떼어내고 다음 부분을 그리고, 다시 떼어내고 다음 풍경을 그리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분절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하나의 연결된 풍경으로써 완결성보다 기억과 마음속에 잠재된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살리기 위한 시도이다. <충정로의 아침>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화면의 조각들을 조금씩 엇나가게 설치하여 서로 연결이 조금씩 끊어지는 효과를 의도했다. 길목에 세워진 볼록거울에서 바라본 충정로의 아침 인상을 조각마다 집중해 담았다. 볼록거울은 형태구조상 인간의 눈 구조와 닮았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사물의 본질에 상관없이 볼록거울처럼 사물의 특징과 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므로 본디 사물은 하나의 명확한 형태로 확정지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그의 풍경은 사의(寫意)를 중시했던 전통수묵의 정신처럼 풍경이 더는 풍경으로만 머물지 않고, 회화적 언어를 획득하는 과정이자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정수일 작품의 개별성은 화면구성과 기법에서도 드러난다. 외형적 완결성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고집 때문에 형태로부터 일탈을 위해 화도(畵圖), 즉 밑그림 없이 그리는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 큰 붓에서 중간 붓, 그리고 세필의 순으로 질감을 만드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의 화풍은 먹의 번짐, 갈필, 여백, 농묵 등 전통 수묵기법을 부분 활용하지만, 현대적 구성을 의식한 디자인적 면 분할과 전반에 걸쳐 메마르고 건조한 필법이 특징이다. 직각과 원형을 도입한 면 분할은 전통과 현대의 구성적 조합을 시도한 것으로 먹의 깊이감 보다 긴장감과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를 준다. 특히 먹물 가득 머금은 붓을 애써 말린 후 최소한의 물기만으로 그린 갈필(渴筆)은 윤필(潤筆)이나 수묵담채에서 느껴지는 맛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는 갈필에서 느끼는 특성과 작가가 추구하려는 회화관이 강조된 의도가 짙다. 욕심을 비우고 최소한의 것으로 최소만을 남긴다는 의미에 몰입하고자한 흔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필은 ‘포쇄(曝灑)-마음을 말리다’라는 개인전에 사용한 주제와 직결될 만큼 작품 전체에서 목도할 수 있다.

현실과 이상이라는 길목에서 갈등하는 자아의 잠재적 무의식이 드러난 <몽>이란 작품처럼 화가로 꿈꾸었던 이상적 삶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적 갈등은 결코 정수일 작가만의 고뇌는 아니다. 화가를 꿈꾸는 누구라도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정수일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 그 존재론적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자각하는 지점에 있다. 가족 중심의 ‘인물’을 통해서 본 과거와 현재의 모습, 도시와 자연의 ‘풍경’을 통한 현실과 이상의 추구는 궁극적으로 그의 삶이 존재하는 가치이자 의미이다. 따라서 정수일이 화가로서 살아가는 의미는 작가의지와 삶의 체험적 깊이만큼 달라질 것이다.

<미술과 비평>

 

                                                   <충전중> 2012 장지에먹 60-60cm

 

 

<이누메똥파리> 2012 장지에먹 60-60cm

 

 

<휴> 2012 장지에먹 60-60cm

 

 

<26분의상념> 2012 장지에먹 180-780cm

 

 

<충정로의아침> 2012 장지에먹 80-240cm

 

 

 

<몽> 2012 장지에먹 160-272cm

 

 

<엄마> 2012 장지에 먹 60-60cm 

<흐믓> 2012 장지에 먹 60-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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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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