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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화가 창운 이열모의 ‘老境의 美’

변종필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1933~)는 독자적 실경산수화를 확립하며 한국 산수화의 정체성을 추구해온 대표적 화가이다. 1970년대 초부터 시작한 현장사생을 40여 년 동안 지켜오면서 새로운 제작방식으로 한국 산수화의 지평을 넓혀왔다. 그의 작품은 1970년대 초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스승이었던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의 남종화적 산수화의 전통성에 관념성이 배태된 화풍이었다. 그러던 중 “재래적 방법을 통해서는 현장감을 살리기 어렵고, 스승에게 배운 기법이 저절로 묻어나와 관념적인 그림으로 변질되기 쉽다”는 생각에서 당시 스케치한 밑그림을 화실로 가져와 화선지에 옮기는 방식대신 사생 현장에서 직접 붓과 화선지로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 방식은 사생풍경을 벗어나면 자칫 관념적으로 빠질 수 있는 습관을 최소화하면서, 심중에 담은 풍경의 아름다움이 미처 사라지기 전에 현장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기 위한 것으로 그의 화풍이 독자성을 획득하게 한 실질적인 틀이다.

 

이열모의 작품은 1950-60년대 한국화단의 시대적 유행이나 흐름에 기댄 상업주의적 화풍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산수화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꾸준히 지속해온 일관된 태도에서 예술적 성취의 진정성을 찾을 수 있다. 작품 소재가 된 도봉산, 월출산, 용봉산, 북한산, 고석정, 춘천호반, 화양계곡, 안동, 설악산, 대둔산, 팔주왕산, 거제도, 남간정사, 갑사, 용주사, 송광사, 마곡사 등의 명승고적은 물론 인도 카주라호, 몬도비아 폭포, 중국 계림, 여강 고성, 무이산 등 국외 명소에서부터 이름 없는 소소한 장소까지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 화폭에 담았다. 사실 아름다운 풍경을 담기위해 흘린 땀이나 추위에 떨며 그려야하는 육체적 고통은 실경산수화를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따르는 과정이다. 한 자리에서 평균 6-7시간을 견뎌내는 사생과정은 하나의 극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열모에게 현장 사생은 단순히 낭만적 풍류를 즐기는 여행적 기록이 아니다. 정신과 마음이 일치된 장소이며, 그 곳의 경치를 담는 과정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무욕과 절제를 몸에 익히는 수련과 같다. 그는 수묵담채가 지닌 먹빛의 깊은 맛을 이해하고, 발묵과 파묵을 거쳐 선염의 조화를 터득하기 위해 보낸 숱한 시간들을 마치 수도승이 도(道)를 깨닫기 위해 수행정진하는 것과 다를 것 없다고 비유했다.

 

“자연이 주는 감동에 순응하는 그림을 그린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선비적인 삶을 몸소 실천하신 아버님은 시조를 좋아하셨는데 그런 영향인지 나도 한국적 풍류를 체질적으로 물려받아 삶 속에 묻어 있다.”-작가노트-

 

이열모는 원리원칙(原理原則)을 중시하며, 투명하고 거짓 없는 강직한 성품의 선비적 풍모를 지녔다. 이는 그의 문인적 삶과 작품세계가 추구한 청한(淸寒)정신이 대변한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좋아하고, 소박함과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인생철학으로 삼으며, 인간의 속기와 욕망을 비우기 위한 하나의 연습과정으로 작품세계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연습은 인간의 감성이 메말라가는 각박한 도시를 떠나 자연이 일깨워주는 자연섭리, 즉 자연 순환적 삶을 통해 인간의 삶을 돌아보려고 하는 삶의 자세와 연결된다. 이는 2007년 한국을 떠나 LA에 정착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고국산천을 떠나 살면서 새로운 환경을 화폭에 담았지만, 작품에 내재된 정신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한국의 풍경을 그리던 시절보다 더욱 간절하고 당당해졌다. 예를 들어 검은 묵선과 담청색 위주의 몰골 산수화는 지금까지 실경산수화와는 분명 다른 차원이다. 2008년 작 <삼선암> 이후 <청산>,<산운>과 <상Ⅰ>에서<상Ⅵ>연작까지 골기(骨氣) 서린 힘 있는 필법으로 표현한 자연의 근원적 이미지는 평소 그가 강조한 동양의 골법사상과 연결된다. 골법은 원형으로의 회귀이다. 원형은 어떠한 가식이 없는 상태라는 점에서 사물의 근원이며, 본질에 가깝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골법은 잡다한 뜬닢이나 너불가지를 다 떼어버리고 속에 있는 알 고갱이를 찾아내어 그리는 것이다. 골법은 직관의 터득이란 점에서 선(禪)과 연결되고 나아가 무(無)와 통한다고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자들이 일찍이 자연을 정신의 요람으로 삼아 진리를 깨달았던 것과 다르지 않으며, 궁극에는 동양예술이 지향하는 가치이다.

이열모의 산수화는 계절상으로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의 풍경이 주를 이룬다. 따스한 봄이나 가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계절 대신 잎이 떨어져 쓸쓸하거나, 하얀 눈이 쌓인 황량한 겨울의 자연 경치가 많다. 봄, 가을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에 가려 정작 그리고 싶은 산, 들, 시골 마을을 담아낼 수 없기에 앙상한 뼈를 드러낸 겨울에서야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고택과 정겨운 시골풍경을 그린다. 덧입은 것들을 벗어던지고 그 속에 숨어있던 속살을 드러낸 나목(裸木)을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의 본질을 들춰내고 싶은 것이다. 사실 그가 산을 좋아하고 추운 계절도 좋아하는 것은 산골에서 태어나 열두 살까지 시골에서 살면서 놀았던 산과 들을 요람과 보금자리로 여기며 보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겨울 추위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차츰 세월이 흐르고,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겨울이 지닌 아름다움을 깨닫게 됐다. 추운 겨울에서 오히려 ‘차가움의 미학’을 발견한 것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정신적 측면에서 바라본 결과이다.

 

‘차가움의 아름다움, 춥다고 하는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이 동양정서이다. 우리가 설경을 대할 때 갖는 기분은 이 차가움에서 느끼는 아름다움만이 아니고 청결의 아름다움도 내포되어 있지만, 그러나 차가움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이 더 크게 함축되어 있음을 안다.’ -『그림과 마음』화문집-

 

이열모 산수화의 또 하나 특징은 인물의 부재이다. 주로 전통 산수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점경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목가적 분위기를 상실해가는 현대사회를 살면서 그림에 관념적으로 인물을 배치하는 것보다는 객관적으로 자연경치를 바라보고 재현하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짐짓 인물이나 제발(題跋)이 산수화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최소한의 의도이다.

한마디로 자연 중심적 관점에서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가치 있게 생각한 화가의 마음이 드러난다. “흘러가는 세류에 마음 쓰지 않고 무욕으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심정으로 오늘도 산과 들과 그 아래 마을을 그리며 우리의 고유한 냄새를 화폭에 담고자 할 따름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소박한 자연주의 화가’를 꿈꾸었던 작품세계가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었음은 그의 글과 그림에서 충분히 목도할 수 있다. 특히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80세에 이르러 펼친 붓끝에서 그의 예술적 성취의 정수인 <인왕제색도>가 탄생했듯이 이열모 역시 팔순에 가까워지면서 한층 깊고 대담해진 화풍으로 예술적 정수를 느끼게 한다. 1994년 <군선>, 2000년 <두타산 용추>, 2006년 <상팔담>에서 느껴진 농담과 운필의 완숙한 경지가 2011년 <월출산>, <용봉산 병풍바위>, <금강 청벽>, <남간 정사> 등 작품에서도 흔들림 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라는 조형양식이 유행하는 시기에도 선조(線條)와 묵운(墨韻)의 깊이, 그리고 여백의 맛을 통해 동양화의 진정한 미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보낸 세월의 깊이가 고스란히 작품세계에서 우러나온다.

이열모는 말한다. “20세기는 서구 사상이 지배한 시대이다. 그들의 산업화, 과학화 때문에 인류사회에서 신, 자연, 인간이 소멸했다. 특히 인간은 자존의 위치를 잃었고, 자연은 공해 탓에 사멸되어 가고 있으며, 과학적 사고 때문에 신은 죽었다.”라고. 그리고 또 말한다. “이제는 자연과 인간을 동시에 소멸시키는 현대문명을 미력하나마 구도자의 정신과 마음으로 구원하고 싶은 열망을 담아 그린다”고. 팔순에 이르도록 노경(老境)의 미를 구현하며 일생을 걸고 탐구해온 그의 정신과 감정이 낳은 경언(鯁言)이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미술과비평-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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