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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 반복되는 작은 것들의 에너지를 모으다

정영숙

판화작가 신수진

반복되는 작은 것들의 에너지를 모으다


일상 속의 작은 이미지의 반복에서 나타나는 자연의 생명력 포착···

판화에서 회화, 설치작업으로 꾸준히 작품세계 확장


정영숙 문화예술학 박사, 경희대 겸임교수, 갤러리세인 대표


신수진은 1996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총 14회 개인전을 가졌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외에서 그룹전과 초대전을 100회 이상 참여했을 정도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다. 미국 유학 당시, ‘Frameless 99: A National Juried Exhibition of Works on Paper’에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국내 공모전이나 문예진흥기금 지원전시에서도 수차례 선발됐고 국내외의 여러 미술관과 기업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작업실은 경기도 수지의 광교산 자락에 있는 한적한 주택가에 있다. 작업 공간 한켠에 놓인 여러 개의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하다. (그는 2011년 미술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업실로 사용되는 다른 방에는 판화제작에 필요한 프레스기가 놓여 있고, 캔버스와 물감 등 그림도구들이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얼마 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영은미술관에서의 레지던시 중에 완성한 작품과 새로 구상 중인 작품이 작업실에 펼쳐져 있었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마침, 작가는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뒤였다. 자연스럽게 그의 대학생활이 궁금해졌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겨 했고 주변에서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터라 화가의 꿈을 키우며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정작 미대에 들어가보니 그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1~2학년 때는 작업내용에 사회적인 의식이나 개념을 담아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Dancing Leaflet(춤추는 작은잎)>,77x55cm, 에칭, 2014.

자연 속 ‘미묘한 움직임’에 주목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다 3학년부터는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남의 시선보다는 여성작가로서의 감정과 내면의 감수성을 이끌어내는 조형작업에 주목했다. 대학원에서는 판화를 전공하여 새로운 미술 기법에 눈을 떴고 더 심화된 판화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판화 과정으로 가장 유명한 곳 중의 하나인 위스콘신주립대-매디슨 대학원(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 들어가 보다 확장된 판화의 기법을 수학하고 다른 장르의 수업도 병행하면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갔다. 3년의 유학기간 동안 다양한 매체를 습득하면서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를 확장한다는 신념으로 치열한 창작의 시간을 가졌다. 유학을 다녀온 후에 발표한 2007년 개인전 ‘미묘한 움직임(Subtle Movement)’은 신수진의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그때의 작품에 들어있는 기본개념이 현재까지 확장을 거듭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작업이 시간, 세월, 삶의 흔적에 대한 관심으로 풀어갔다면 이 전시회를 기점으로 작가는 자연물에 나타나는 반복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균질하지 않은 자연물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다. 씨앗이나 잎새에 관심을 갖고 이처럼 작은 단위의 이미지를 수백 개씩 그려서 재배치하면서 새롭게 변주되는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작가의 의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Spring> <Falling> <Blooming> 등의 작품이 선보인 것도 이때였다. 작가가 표현하는 자연은 광활한 풍경이 아니다. 여행에서 만리장성, 그랜드캐니언, 나이아가라 폭포 등 웅장한 자연 풍경을 보면서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거대한 풍광보다는 오히려 작은 씨앗이나 잎새였다. 도시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상의 자연이다. 가정집 화초, 도로의 가로수, 공원의 나무들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과 개울가 물의 파장 등도 눈여겨봤다. 너무나 작은 요소 안에서 나타나는 변화와 차이가 경이롭고, 조형적으로는 하나의 작은 유닛이 모여서 큰 것을 이루어가는 데 관심이 많았다. 작은 변화와 중첩, 섬세한 결이 갖고 있는 디테일과 가능성에서 무한한 생명력을 느낀다. 자연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소멸로 이어지는 순환의 세계를 아주 작은(미시적인) 단위로 들여다보며 이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한 작가는 판화의 복제성과 표현 기법 등에 매료되어 이를 자신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손으로 일일이 새겨서 만든 선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주는 오목판법 중의 하나인 인그레이빙(engraving)기법과 드라이포인트(drypoint)기법이 주종이다.



<lntervened Flow(개입된흐름)>전시전경.2012년 갤러리그림손에 전시됐다.


판화의 변용과 끝없는 확장


작품에 따라 다수의 단위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각 작품에 따라 수백 개, 수천 개의 작은 이미지가 새겨지는데 모두 손으로 일일이 새겨서 만든 이미지다. 이렇게 각각의 많은 이미지를 그려서 판을 제작하는 것은 손작업에 의한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집중과 몰입이 필요하다. 잠시 한눈을 팔게 되면 아크릴판의 표면이 미끄러워 선이 엇나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각의 선은 손을 움직이는 속도나 힘, 심지어 호흡에 의해 그 성격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일정한 성격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강약을 끊임없이 조절해야만 한다.”

신수진 작가는 작업실에서 프레스기를 이용하여 판화로 찍는 작업 과정을 선보였다. 판에 판화물감을 선택하여 바르고 물감이 새겨진 선으로 스며들도록 손의 압력을 가하고 바탕의 색을 지우고 먼저 찍어낸 종이에 다시 프레스기로 찍으며 동일 과정을 반복한다. 그리고 판화로 완성된 이미지 위에 작품에 따라서 유화나 아크릴로 채색을 더한다. 고도의 테크닉과 집중을 요하는 작업과정이고 몸으로 체화된 작가의 감각이 투영되는 시간이다.

작가가 표현한 판화는 전통적인 판화와는 차별성이 있다. 다른 판화가 다색을 표현하기 위해 다수의 판을 사용한다면, 작가는 한 판을 이용해서 매번 색상, 농도 등에 조금씩 차이를 주어 잉킹(inking)하고 한 장의 종이에 반복해서 여러 번 찍는다. 그래서 복제가 불가능한 유일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최근에는 이런 판화적 기법과 회화적 방식을 결합한 작품을 진행하기고 한다. 판화적 기법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는 판화의 매력을 의도한 선의 효과, 압력에 의한 촉각적인 표현, 판이 종이와 붙었다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선의 떨림과 번짐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매체와는 다른 이 같은 매력을 계속 사용하고 발전시키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작가는 2008년 초에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의 방에서 수련을 감상한 적이 있다고 했다. 미술관 벽면이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이어지는 모네의 수련 연작에 몰입하며 아주 오랫동안 그 공간이 주는 아우라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특별한 경험을 계기로 설치작업을 실행하기 시작하게 됐다. 2008년 가을 북촌미술관의 전시는 그의 작업의 바탕을 캔버스에서 벽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관객들이 이 공간 안에서 느끼는 감정을 이끌어내고 싶었고, 그 공간에 더욱 집중하는 관객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벽에 부착된 작품은 스텐실 작업으로 관람객들은 대부분이 사진 촬영에 골몰했다. 그 뒤로 그의 설치작업은 더욱 진화했다. 2010년에는 관람객이 잎사귀 모양의 이미지를 직접 벽이나 공간에 붙여나가게 했고, 이런 관람객의 참여에 의해 전시기간 내내 작품은 지속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당시 전시회 기간 중에 쓴 그의 작가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12
1 <Blowing(detail)>,150x200cm, 한지위 혼합재료, 2007.

2 가변설치작 <공유하는숲>의 전시전경. 2014년 고양아람누리에 전시됐다.


작업은 작은 걸음으로 촘촘하게


“스케노포이에테스'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의 <천의 고원>에서 언급된 새다. 이 스케노포이에테스 덴티로스트리스(Scenopoeetes Dentirostris)라는 새는 매일 아침 가지에서 따낸 나뭇잎을 떨어뜨린 다음 색이 흐린 안쪽을 위로 뒤집어 땅과 대조되게 만듦으로써 표시를 해 둔다. 스케노포이에테스의 반전을 통해 표현의 질료를 생성하고 형성하는 행위가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소박한 예술을 실천하는 것이며 예술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작가는 설치미술을 통해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의 예술세계로 불러와서 스케노포이에테스로 상징되는 예술가의 정원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최근 신 작가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보면서 본인이 미술가로 활동하는 이유를 다시 찾는다고 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딱히 그림을 지도하지 않았는데, 아이는 늘 종이와 색연필을 갖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아이가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완쾌되어 바다에서 배를 타는 모습을 그려 선물했다고 한다. 받는 사람이 좋아하면 아이는 그림을 통해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는 데에 뿌듯한 느낌을 표현한다. 작가도 유년시절에 가족들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려서 선물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온 가족이 기뻐하며 그를 칭찬해주던 기억 말이다. 예술가의 역할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는 가까운 지인과 관람객에게 선물이 되는 예술가가 되기를 꿈꾼다. 더불어 예술이란 우리의 삶과 멀리 있지 않지 때문에 일상을 살아가듯이 조금씩 꾸준히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큰 걸음으로 걷기보다 작은 총총걸음으로 촘촘히 일상의 층을 쌓아나간다. 그럴수록 작품의 깊이도 깊고 견고해질 것이다. 올겨울에 그는 영은미술관에서 400호 대작을 선보이고 또 다른 방식으로 관객과 교감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월간중앙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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