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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나는 욕망을 그린다

정영숙

정통 회화과 이광호

'나는 욕망을 그린다' 
작가적 시선을 극사실주의 방식 빌려 직설화법으로 표현

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이광호 작가의 작업실은 서울 마포구 연남동 주택가에 위치한다.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2번 출구로 나와 다시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연남동은 인근의 상수동이나 합정동과 함께 홍익대 근처에서 밀려난 많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이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로 한 날은 마침 많은 비가 내린 탓에 이작가가 직접 승용차를 끌고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와주었다.덕분에 5분 만에 작업실에 도착했다. 이작가는 작업실 주변 건물들을 가리키며 모두 작가들의 작업실이라고 알려주었다. 
 작가들의 작업실 문을 열 때마다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사로잡힌다. 작가들은 최적의 창작환경을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분위기를 연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직 세상에 선보이지 않은 작가의 신작 작업과정을 먼저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도 하다.  
 그의 작업실은 대로변 5층 건물의 2층이다. 40여 평의 작업실에는 안쪽으로 작품을 보관하는 작은 칸막이가 있을 뿐이다. 넓게 늘어선 몇 개의 이젤 위에는 100호 정도의 캔버스가 올려져 있고, 그 옆으로 역시 비슷하거나 다소 작은 몇 개의 캔버스가 늘어서 있다. 캔버스는 작업 중인 신작들이다. 
 캔버스 속 작품의 이미지는 기존의 그의 ‘풍경 시리즈’처럼 특정한 장소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달리 평온하지 않은 느낌이다. 거친 가시덤불처럼 엉킨 가느다란 나뭇가지들로 인해 복잡한 운동감과 함께 폭풍전야의 긴장감마저 전해진다. 긴 테이블 위에는 몇 개의 통에 유화물감과 가느다란 붓이 수없이 꽂혀 있다. 옆 벽면에는 이 작가의 ‘선인장 시리즈’ 작품 2점과 ‘인물 시리즈’ 작품 중 1점이 걸려 있다. 
 작가가 내어준 음료수를 마시며 작가의 취향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았다. 입구 쪽 벽면에 붙여놓은 여러 장의 벽보 가운데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의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배우 강수연을 클로즈업한 포스터를 바라보니 개봉 당시 노출연기가 이슈가 되었음이 떠오른다. 
 이 작가는 작가생활 입문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대학원 진학을 전후해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친구와 많은 교류를 했다. 덕분에 이 시기 그는 미술 관련서적보다 영화와 관련한 책을 더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 책들이 장기적으로는 미술에 더 큰 흥미를 갖게 되는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그 때의 영향은 나중에 그의 작품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시선’의 개념으로 되살아났다. 영화감독이 한 컷 한 컷 미장센을 꾸며 진행하는 과정에서 배우들의 시선과 사물의 배치 및 공간이동 등에 관심을 갖듯 작가는 이들을 작업실에서 작품 속에 전개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대학원 졸업논문에도 반영됐다. 졸업 논문 제목은 ‘나의 작업에 나타나는 시선의 이중성에 관한 연구’다. 
 그 시절 작가의 작품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의 또 다른 단서는 미국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팝아트의 원조 기타이(R.B.Kitaj,1927~94)였다고 한다. 런던의 테이트모던 서점에서 펼쳐본 기타이의 화집이 계기였다. 이 작가는 기타이에 고무돼 논문과 석사학위 청구전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 결과 ‘가장 나다운 것을 그리자’는 명분을 찾았고, MK(이 작가가 짝사랑했던 후배의 영문 이름 약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여자’였고 그래서 거침없이 그녀를 그려나갔다. 몇 해 동안이나 짝사랑하는 후배를 작업의 대상으로 삼다 보니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그림이 완성되어갔다.


2007년 국제갤러리에 전시된 'Inter-View 시리즈'.작가는 당시 100여점의 인물화로 미술계에 확연히 이름을 알렸다.


수줍음 많은 작가의 '시선'  
 최근 미술계의 한 경향은 개인적 단상을 작품으로 표현하거나 소소한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자연스럽다. 하지만 작가의 대학원 시절은 민중미술이나 개념추상화 등이 대세이던 때여서 그의 그림은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됐다. 그는 심지어 잡스러운 사랑타령을 하느냐는 핀잔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작가는 MK를 저버리지 않았다. 올해 이화여대 회화과 교수로 임용된 그는 실기수업을 받는 학생들에게 '그때의 경험을 들려주며 자신의 내면에 솔직하라'고 주문한다고 말했다.  
 그가 건네준 첫 개인전부터 최근까지의 전시 관련 자료 10여 권을 훑어보았다.그의 1996년 개인전 자료에서 '나의 그림'이 눈에 띈다. 100호 정도의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렸는데 12개의 칸 속에 인물과 사물이 제각각 배치돼 있다. 
 어느 영화비평가는 '영화는 미술을 훔쳐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작가에게는 ‘그림 속에서 영화를 본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다. MK가 캔버스 오른쪽 끝자리에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캔버스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녀 앞의 컵을 마주보는 화가의 시선에는 차이가 있다. 이런 상이한 두 개의 시선이 암시하는 알레고리는 컵의 손잡이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설정하거나 화가의 발이 언뜻 보이게끔 배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MK를 훔쳐보는 화가의 손은 <나의 그림>을 드로잉하고 있다.
 개인전 발표 후 이 작가는 ‘그림 그리기’에 충실했던 류용문·김형관 작가와 함께 ‘회화술’을 기획해 그룹전을 열었다. 1998년 결혼한 뒤로는 아내를 모델로 한 <두손> <해련씨> <침묵의 세계> 등을 발표했다. 이때 와서야 그의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은 처음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던 이 작가는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하는 대상의 손을 잡고 그릴 수 있을 만큼 감정이입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한다. 함께 작업했던 류용문은 이 작가의 ‘시선의 응시, 시선의 성격’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 1901~81)이 언급한 ‘보여짐을 의식하는 주체’로 빗댔지만 정작 이 작가는 라캉을 읽은 적이 없다고 한다. 
 작품 <침묵의 세계>는 거울로 가득한 그림 속의 그림, 이미지 속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이 작품을 통해 이 작가는 “회화는 거울이다. 회화는 무엇을 반영한다. 따라서 그림은 거울”이라고 정의한다. 라캉은 시선과 눈을 구별한다. 라캉은 시선에 절대적 우월성을 부여한다. 눈이 대상에 대한 이미지의 재현이라면 시선은 실재(real)에 대한 환상의 구조다. 라캉이 “그림은 내 눈 속에 그려지고, 나는 그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림의 본질을 언급한 것처럼, 이광호에게 작품은 자기반영이기도 하면서 배설물일 수도 있겠다. 
 2006년 이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관하는 ‘창동스튜디오’에 입주한다. 당시 발표한 <창동에서의 인터뷰(Inter-View in Changdong)>라는 100여 점의 인물화로 그는 미술계에 확실하게 이름을 알렸다. 그럼에도 그는 직업모델을 써본 적이 없다. 초기 작품에서 드러나듯 그의 모델은 작가의 감정이 일부라도 개입되는 인물일 뿐이다. 창동스튜디오 시절에도동료 작가나 미술계의 관련 인물들이 그의 작품 속 모델이 됐다. 그는 자신이 모델로 선택한 사람과 대화하면서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을 영상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그는 대상 인물에 따라 다르게 붓질하는 등 노련한 필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7세기 네델란드의 베르메르·램브란트·벨라스케스, 19세기의 쿠르베, 그리고 조선시대 초상화의 표현 방식까지 혼재한 붓놀림이 돋보인다. 


  

1 남근 형상을 한 선인장의 모습이 인상적인 <Cactus(선인장)No.38>, oil on canvas, 227.3x181.8cm, 2009. 
2 폭풍전야를 연상케 하는 이광호의 새로운 풍경화<Untitled(무제)>, oil on canvas, 106x100cm, 2010. 
3 이작가의 최근의 풍경화는 '제2의 풍경화 시리즈'라고 할 만큼 많은 기존의 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보인다. 
잔잔한 들길 중심의 풍경은 가시덤불처럼 거칠고 원시림처럼 웅장하다. <Untitled(무제)>, oil on canvas.


 

4 영화 같은 연출로 상이한 시선을 잡아낸 <나의 그림(Picture of myself)>, acrylic on canvas, 162x97cm,1996.
5 이광호 작가는 '그림은 거울'이라고 정의했다. 
거울로 가득한 그림속의 그림, 이미지속의 이미지를 표현한 
<침묵의 세계(Die Welt des Schweigens)>, oil on canvas, 97x130cm, 1998. 




욕망을 담은 '선인장 시리즈'  


 이 작가는 ‘선인장 작가’로 불리기도 한다. 2008년 이후 그의 개인전'기획전에서는 인물화 대신 선인장 이미지가 자리한다. 2007년 발표한 작품에는 어떤 인물과 그 인물이 지닌 소지품과 또 다른 작가와 연관된 사물을 그렸다. 선인장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 그의 선인장은 리얼리티 이상으로 강렬하고 섬세하다. 양재동 꽃시장에서 작은 선인장을 구입해와 그리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국내에서 최고 선인장 재배기술을 가진 연구소를 찾아가 작업하는 치열함을 보였다.  
 선인장은 몸통과 줄기, 변형된 잎인 가시로 구성되어 있다. 간혹 꽃이 피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시선으로 특정 부분을 확대하거나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면서 드로잉한다. 연구소에서 기존에 없던 선인장 종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작가는 화면 속 선인장의 형태와 색까지 과감하게 변화시킨다. 결국 선인장의 고유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작가의 감성적 시선으로 탐색된 선인장으로 캔버스 위에 존재한다. 이 선인장은 작가의 욕망을 투사한다. 거대한 몸통은 남근의 형상이고, 확대한 잎이 겹쳐진 부분은 여성의 생식기와 닮았다. 선인장의 솜털은 피부 결처럼 부드럽다. 때로는 사진처럼 보여 자꾸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가의 ‘인물화 시리즈’와 ‘선인장 시리즈’는 대상을 작가적 시선이 충만한 극사실주의 방식으로 재현했다.그러나 ‘풍경화 시리즈’에 와서는 조금 다른 표현으로 접근한다. 선인장 그림의 배경은 단색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삭제된 배경은 감춰진 욕망을 들추어내듯 풍경화로 전이된다. 
 그림 속 풍경은 굳이 명기하지 않는 한 그 장소를 확인할 수 없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들과 산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빛과 서정적 시선만 강조된다. 파사르의 풍경 분위기도 다소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 부는 오후 3시께의 빛이 머무른 그곳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다. 
 선인장의 표면을 더듬던 눈의 애무가 풍경화에서는 욕망의 갈증이 해소된 후의 평화로움, 머리가 텅 비어버린 상태로 표현된다. 세밀하게 묘사하고 특정한 주제를 부각시키려는 강력한 작가의 주도성은 부드럽게 풍경 속으로 잠긴다. 작가의 욕망은 찬란한 빛의 흐름으로 스며들고, 잔잔한 들풀이나 나뭇가지는 고요히 작가를 바라본다. 
 그러나 현재 작업실에서 진행 중인 풍경화에서는 제2의 풍경화 시리즈라고 할 만큼 많은 변화가 보인다. 잔잔한 들길 중심의 풍경은 가시덤불처럼 거칠고 원시림처럼 웅장하다. 빠른 속도로 덤불숲을 헤쳐 나가는 밀립 속 사나이가 작가로 투영된다. 작가는 지금까지처럼 시선이 아니라 몸짓으로 접근하는 듯하다.
 이 작가는 회화의 본질에 충실하다. 그렇다고 하이퍼리얼리즘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선택한 대상에 대한 애정과 욕망을 담은 시선이 늘 잠재하기 때문이다. 작업실 입구 벽에 영화 <경마장 가는 길> 포스터와 함께 붙어 있던 전시 포스터가 떠오른다. ‘인물화 그리기(The Manner of Painting)’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배경이 흡사한 ‘여인’의 모습이다
 회화의 본질에 충실한 타고난 화가, 욕망에 정직한 화가의 면모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이 시대 화가정신이 잘 드러난 이광호식 그림은 월등하다. 화가는 가장 절실한 것을 화폭에 표현할 때 그 작품 속에 진실이 담겨 있음을 새삼 확인한다. 그의 욕망이 중견을 넘어 장년에도 진실을 담아내는 원동력이 되기를 기대한다.

월간중앙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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