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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 해외 진출 60년사

김달진

한국 현대미술 해외 진출 60년사
- 1950년대부터 2010년까지 연표를 중심으로

김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

우리미술이 해외에 보여지는 전시회 유형은 크게 국가단위로 참가하는 국제전, 공공기관 단체 화랑 등이 기획한 전시회, 미술단체의 해외전 또는 교류전, 작가단위의 개인전 및 국제전 참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아트페어, 재외작가들의 현지 전시회로 나눌 수 있다.
최근 비엔날레, 아트페어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더구나 해외전이 21세기 문화의 시대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파악이 어렵다. 지금은 일반적인 전시형태 중 하나이지만 한국 현대미술이 해외로 소개되기 시작한 시기는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몇 년이 더 경과한 1950년대 중반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한 해에 불과 몇 건이던 국제전과 해외전이 70년대를 지나 80년대와 90년대에 급격하게 팽창했다. 여기에는 미술계의 자연적인 양적 팽창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경제성장, 해외여행 자유화, 올림픽 이후의 미술시장의 활성화 등 미술 내외적인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또 하나 주목할 현상은 60년대와 70년대에는 비엔날레 등 국제전 참가 횟수가 해외전보다 더 많았으나 80년대 이후에는 거꾸로 국제전 참가 횟수가 일반 해외전보다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최근으로 오면서 작가 개개인의 해외나들이가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 연표에는 빠져 있지만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한 화랑의 아트페어 참가와 기타 개인전을 고려하면 올림픽 이후 이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졌다.

국제전 진출과 시비

여기서의 국제전의 범위는 대략 여러나라가 참가해 경합을 보이거나, 비교하는 정기적인 전시회를 말한다. 우리 현대미술이 국제전에 진출은 1953년 영국 테이트갤러리에서 열린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에 김종영이 입선, 1955년 프랑스 살롱도톤느 김흥수 입선, 1956년 파리시립미술관의 현대국제조형예술전에 남관 출품 등이 이어졌다. 본격적인 출품은 1958년 미국 신시내티미술관에서 개최된 제5회 국제현대칼라리도그래피전에 이항성, 유강열, 최덕휴, 이상욱, 김정자, 김흥수가 출품하여 이항성 작품이 소장되었다.
그후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는데 1961년 파리비엔날레를 시작으로 63년 상파울로비엔날레, 66년 동경판화비엔날레, 69년 카뉴국제회화제, 71년 인도트리엔날레, 81년 방글라데시비엔날레, 86년 베니스비엔날레, 88년 아시아유럽비엔날레 등이 있다. 그동안 가장 많이 참가한 국제전은 카뉴국제회화제, 상파울로비엔날레, 인도트리엔날레, 방글라데시비엔날레, 파리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베니스비엔날레는 권위있는 세계 최고 비엔날레로 1960년 제6회 현대미술가협회전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건립 기금모금전’으로 열린 후 1986년부터 우리나라가 참여하기 시작하여 1995년 독자적인 한국관이 건립되어 매 회 출품하고 있다. 1988년 베니스비엔날레 에페르토 ’88에 김관수가 초대되었다. 1992년 세계적인 권위로 ‘미술올림픽’이라고 불리는 9회 카셀도큐멘타에 한국 국적으로 처음으로 육근병이 초대 출품되었고 개막식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도표추가
특히 한국미술협회를 통한 1960 - 70년대 국제전의 참가는 한국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작가들이 대부분이며, 작품은 추상계열이었다. 1960-70년대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로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인도트리엔날레 출품작가와 69년 국제현대회화비엔날레(이탈리아), 국제청년미술가전(일본), 78년 국제현대미술전(프랑스)을 넣어 출품 및 커미셔너 참가를 빈도표로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박서보 10번, 김창열 심문섭 이우환 하종현 7번, 서승원 윤명로 정영열 조용익 6번, 서세옥 윤형근 정창섭 최만린 최명영 5번씩 14명이 단골작가이다. 더구나 같은 국제전에도 파리비엔날레는 심문섭(71,73,75), 조용익(61,67,69), 최만린(65,67,71), 카뉴국제회화제는 박서보(69,74,77), 정영열(70,75,77), 상파울로비엔날레는 김창열(65,73,75)이 세번씩도 참가했으니 불만이 나올만도 했던 것이 짐작이 된다. 국제전하면 으례 추상으로 국한되고 “국제전에 참가하려면 먼저 미협 간부가 되라.”는 속언이 생겨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여명의 작가들과 몇몇 커미셔너들이 하나의 국제전에 번갈아 세 번씩도 참가하여 많은 시비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 국제전 선정의 잡음시비는 63년 김환기 미협이사장 시절에 파리․상파울로비엔날레 출품작가를 둘러싸고 이른바 108인 연서 파동이 일어났다. 이는 문교부가 미협에 선정을 위임한 후 국제전 출품작가가 미협 간부들에 의해 편파적으로 선정되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된 것이다.
국제전에 관련된 최대 시비는 1978년 2회 국제현대미술전에서 일어났다. 이 전시회는 프랑스 외무부 산하 프랑스 예술활동협회가 주관한 외교적인 차원으로 그리스, 베네수엘라, 시리아, 튀니지, 한국, 5개국(스페인 불참)이 초대되었고 김환기 유경채 권영우 변종하 윤형근 박서보 하종현 이우환 심문섭 9명이 27점을 출품하였는데 현지 주재 특파원들에 의한 그곳의 부정적인 세평 기사가 불씨가 되어 일간지 잡지를 통해 특파원 참여작가 불참작가들이 기고를 통해서 물의와 시비를 일으켰다. 여기에 공간79년 4월호는 이 시비에 대한 일체의 자료를 게재하고 반향으로 16명의 앙케이트, 5명의 글 등 44쪽이나 특집을 마련했었다. 이와는 다르지만 목우회를 통한 르살롱전 시비가 박용숙 “창피한 해외진출「르살롱전」을 ”신동아 1980. 9월호에 기고하였고, 김원 “미술과 평론”이 신동아 80. 12월호에서 반박이 있었다.

해외전 개최 면모

여기서 해외전은 국가, 공공기관, 단체 등이 우리의 문화 선양을 위해 기획한 전시회를 말한다. 한국 현대미술이 외국에 본격적으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은 1958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화랑에서 열렸던 한국현대미술전이다. 개괄적으로 나라 또는 지역별로 되돌아 보았다.

일본
우리 현대미술은 일본을 통해 받아들여졌지만 역사적인 관계로 인해 본격적인 교류는 정치, 경제보다 늦은 1968년 한국현대회화전으로 시작된다. 이 전시회는 주일한국대사관과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주최로 미술평론가 최순우 이경성 임영방 유준상 이일 5명이 선정위원으로 위촉, 15명이 출품하였다. 해방 후 23년만에 한국의 현대회화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소개된 전시이다. 1975년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의 흰색전은 한국의 단색화를 공식적으로 표면화한 기획전으로서 우리의 정서와 미의식에 걸맞게 소화한 한국현대미술의 상징적인 전시였다. 이어 77년 도쿄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은 규모가 확대되어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오가와 마사타카(小川正隆)가 선정한 단색화 19명이 출품하였으며 미술수첩 잡지 10월호에 특집으로 소개되었다.
1982년 한국교토청년회의소 주최로 공간미술관이 후원한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전이 있었다. 곧이어 현대종이의 조형-한국과 일본전이 국립현대미술관과 일본 국제예술문화진흥회가 주최한 교류전 형식으로 82년 서울전시 후에 83년 일본 3개 미술관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그리고 83년 한국현대미술전을 거론할 수 있는데, 81년 미술회관에서 열린 일본현대미술전의 교류전으로 문화예술진흥원과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주최, “70년대 후반 하나의 양상”이란 부제로 평론가 이경성 이구열 이일 유준상 오광수 5명이 선정한 39명의 102점이 출품된 국가적 차원의 전시회로 5개 미술관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그러나 항간에는 “우리나라만의 개성적인 작업을 무시하고 모노톤이나 미니멀아트만이 전부인 양 묶었다.”, “일본에 알려진 작가를 우선한다는 것은 문화적 식민지임을 자인하는 넌센스” 등으로 잡음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어 87년 문화예술진흥원이 관여한 일한서예교류전이 도쿄에서 있었고, 89년 서울올림픽 이후 전세계인들에게 고조되고 있는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여 한국섬유예술의 독자적인 모습을 소개한다는 취지 아래 문화예술진흥원과 해외공보관이 주최한 한국섬유예술의 오늘전이 있었다. 이는 국내, 해외거주작가 26명이 출품하여 한국문화원이 있는 도쿄, LA, 뉴욕, 파리로 이어졌다. 1992년에 한국현대미술전이 4개 미술관에서 순회전을 가졌고 실행위원은 이경성 이세득이 참여했으며 37명이 출품하였다. 95년 나고야미술관과 아이치미술관이 기획한 환류 : 일한현대미술전은 김수자 박현기 심문섭 육근병 최재은 등 10여명이 출품했다.

96년 90년대 한국미술로 부터전은 김수자 김홍주 배병우 윤석남 등 90년대 주목받은 14명의 작품이 도쿄 국립근대미술관과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98-99년 우리와 타자사이 : 일한 현대미술전은 커미셔너로 김영순과 일본 지바 시게오가 참여했다. 서세옥 박서보 임영선 조용신& 윤애영 최정화 바이런 킴 양국에서 6명이 출품했으며 도쿄 메구로미술관에 이어 국립국제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2002년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에서 또 다른 이야기-한일현대미술전은 여류작가 교류전이었다. 2005년 도쿄 모리미술관 김선희가 기획한 침묵의 우아함-동아시아의 현대미술전에 권기수, 서도호, 유승호, 함진 등이 출품했다. 2007-8년 민중의 고동 : 한국의 리얼리즘 1945 - 2005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하여 일본의 5개 도시 순회전을 가졌다.

타이완
1975년 한중예술협회가 창립되어 본격적으로 한국 타이완만을 오가며 교류전을 주도해 왔다. 이와는 별도로 77년 중한현대판화전에 16명이 출품했고, 83년 에꼴드 서울 - 새로운 종이조형전이 있었다. 이어 84년 대북시립미술관 개관 기념 행사의 하나로 ‘70년대 조류’란 부제로 한국현대미술전이 열렸으며, 88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현대회화전이 있었다. 이 전시회는 87년 서울에서 있었던 중화민국현대회화전의 교류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 41명의 작품이 국립역사박물관과 대만성립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그 후 중국과의 교류로 주춤하다가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여 타이베이시립미술관과 홍콩아트센터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상황전에 김나영 서도호 유승호 이정진 등이 출품했다. 2010년 타이베이시립미술관에서 자연의 색 : 한국의 단색회화전, 타이베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사진의 최전선전이 각각 열려 우리 미술을 크게 소개했다.

중국
우리나라가 중국과의 1992년 수교 이전에는 미술교류가 어려웠으며 94년 컴아트그룹의 ‘94국제교감예술제가 베이징에서 열리면서 시작되었다. 95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전은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남관 백남준 이강소 이우환 황인기 등 36명이 출품하였다. 2001년 광저우 광동성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전: 회화의 복권은 42명이 출품하였다. 2002년 황해의 동쪽전이 상하이 DDM갤러리, 2003년 김선정이 기획한 양광찬란전이 상하이 비즈아트센터 김상길, 박세진, 우순옥, 정수진, 최정화 등이 출품했다.
2005년 중국 최대 사립미술관으로 개관하는 젠다이현대미술관 개관전 감독에 이원일이 초빙되어 화제를 모은 전자풍경전에 고경호 양만기 최두수 등이 출품했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원더랜드 : 한국현대미술전은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세대교체된 젊은 작가들이 출품하였다. 2010년 윤재갑이 기획한 플라스틱가든 : 한국현대미술전이 상하이 민생현대미술관에서 열려 새로운 세대의 미술을 소개했다.

유럽
우리 미술이 보여지기 시작한 해외전은 1967년 한국의 빛 프랑스 순회전으로 공보부가 마련, 한국화가 8명이 50점을 출품했고, 71-72년에는 한국현대회화전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있었다. 이어 77-78년에 한국회화유럽순회전이 해외공보관 주관으로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에서 있었다.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김기창 천경자 서세옥 6명이 출품했는데 현지 보도가 희비가 엇갈렸으며 졸속으로 기획됐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80년대 들어선 한국미협과 밀라노시가 주최한 한국현대미술전이 이탈리아에서 열렸고 한영수교 100주년 기념행사로 83년 영국과 독일에서 한국현대도예전이 있었다. 85년 르살롱이 기획, 105명이 출품한 한국미술전이 파리 그랑팔레에서, 86년은 미협주관으로 한국현대미술전이 같은 장소에서 이어졌다. 그후 동구권과의 수교로 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현대회화전이 유고 3개도시에서 순회전을 갖기도 했다. 이 전시회는 90년 서울에서 있었던 유고슬라비아현대회화전의 교류로 국립현대미술관이 25명을 선정했으며 문화예술진흥원은 루브리아나에서 한국현대판화전을 개최, 37명이 출품했다. 특히 독일과는 81년부터 한독미술가협회가 결성되어 정기적인 교류전을 펼쳐오다 중단되었으며 세계미술교류협회로 명칭도 바뀌었다.

90년대 들어 92년 같은 해 영국에서 열린 자연과 함께 전시는 영국에서 수학한 나비스화랑 큐레이터 김성희가 추진한 전시로 김창열 박서보 이강소 이우환 정창섭 윤형근 6명이 출품했는데 부제가 ‘동양정신의 서구미술에 끼친 영향’으로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유수의 미술관의 주도하에 대규모 기획전으로 3개월 열려 많은 관심을 끌었다. 95년 46회 베니스비엔날레는 우리나라가 1986년 베니스비엔날레 첫 참가 후 10년을 맞아 독자적인 한국관이 건립되었고 한국미술특별전인 호랑이의 꼬리전이 열려 15명이 출품한 뜻깊은 해였다. 같은 해 9월에 한국현대미술 파리전에는 30여명이 파리시 초청으로 꾸방 데 꼬르들리에미술관에서 12월에는 파리 유네스코본부에서 한국미술50인전이 열렸다.

98년 독일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 독일 순회전 : 호랑이의 해에는 강익중 김영진 육근병 전수천 등 15명이 출품했다. 99년 프랑스 니스 아시아미술관에서 한국 고요한 아침의 나라전에 ‘한국의 어제’에는 한국자수박물관 소장품과 ‘한국의 오늘’에는 김창열 서세옥 하종현 방혜자 등 9명이 출품하여 5개월 전시가 있었다. 2001년 큐레이터 김유연이 기획한 변형된 행위: 동아시아 퍼포먼스 &보디아트 순회전은 김아타 장혜영 임영균 등이 출품하였으며 독일 베를린 전시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어졌다. 2003년 네덜란드에서 Facing-한국현대미술전에는 구본창, 권오상, 박찬경, 양혜규, 장영혜, 정연두, 함진 등이 출품했다.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더 배틀 오브 비전스 : 한국현대미술의 비평적 흐름전에는 김용태, 김정헌, 민정기, 배영환, 신학철, 오윤, 주재환, 최정화 등 19명이 출품했다. 2007년 스페인 아르코아트페어에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대되어 코레아 아오라라는 이름 밑에 한국현대미술 기획전이 7건이 열려 큰 호응을 얻었다. 같은 해 김승덕이 기획한 유연성의 금기: 한국현대미술전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이원일이 기획한 터모클라인 : 새로운 아시아의 물결이 독일 카를수르에서 열려 한국 현대미술이 유럽에 크게 확산되었다. 08년 영국 런던 한국문화원 개관 기념전으로 굿모닝 Mr. 백남준이 열려 구본창, 김기라, 백남준, 이용백, 홍영인 등이 출품했다. 여기에 2009. 10년에 이어진 코리안 아이는 영국의 유명한 사치갤러리에서 열려 새로운 한국 현대미술을 부각시켰다.

미국
일찍이 50년대 말 한국현대미술전이 이루어졌는데 1957년 조지아대학 조교수였던 프세티여사가 내한하여 35명의 62점을 선정, 58년 한국현대미술전(뉴욕 월드하우스화랑)이 열렸는데 한국현대미술을 국제 무대에 소개한 본격적인 전시로 여기 출품했던 작가들은 가장 자랑스러운 자신의 전시경력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 후 81년 한미수교 100주년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한국현대드로잉전이 있었다. 미국의 권위있는 미술관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한국현대미술전으로 주목을 끌었는데 국내작가는 브룩클린미술관 큐레이터 진 바로가 내한해서 선정했으며 국내・해외작가 47명의 94점이 출품되었다. 이 전시회는 스미소니아인스티튜트 주최로 82-84년 11개 도시에서 최장기 순회전을 가져, 미국 각 지역별로 한국현대회화를 소개하며 우리의 예술수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 전시는 국제적으로 우리 현대미술이 알려지기 시작했음을 가늠 할 수 있는 전시였다. 이후 우리 미술계에서도 드로잉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평가하며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이어 82년 한국현대도예전이 뉴욕과 LA에서 있었고 83-84년 해외공보관이 주관한 새한국화 단면전이 미국, 독일, 영국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한국화 중진작가 12명이 참가했는데 런던 바비칸센터 전시회 장소가, 다른 전시장 복도 양쪽에 이동식 칸막이를 설치해 이중으로 걸고 전시해 “낯 뜨거운 해외전시, 국위선양인가? 나라망신인가?”라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에는 한국화 중진작가 12명이 참가했는데 런던 바비칸센터 전시회 장소가 다른 전시장 복도 양쪽에 이동식 칸막이를 설치해 이중으로 걸고 전시해 “낯 뜨거운 해외전시, 국위선양인가? 나라망신인가?”라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계간미술 1984년 겨울호)
88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민중미술전 : 한국의 새로운 문화운동은 한국의 민중미술과 새로운 문화운동을 세계에 소개하였다. 우리 민중미술이 Min Joong Art라는 영문이 공식표기 되었다.

1990년대 들어 한국현대금속과 섬유예술전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란 부제로 90-92년 미국, 캐나다에서 순회전을 가졌고, 91년 예술의 전당이 국제교류사업의 일환으로 한국현대미술여성 10인전을 워싱턴 국립여성미술관에서 개최하기도 했었다. 1993년 태평양을 건너서 : 오늘의 한국미술전은 한국의 민중계열 작가들과 뉴욕 교포작가들이 출품한 ‘정치미술’로 미국 내 반향을 일으켰으며 당시 뉴욕타임즈와 빌리지보이스 리뷰에서 호평 받은 전시였다.

97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큐레이터 김유연이 기획한 호랑이의 눈전에 김영진 육태진 임영선 조숙진, 98년 한국 이 시대의 영상과 매체전은 미국 시카고 현대사진미술관에서 열렸으며 구본창 박찬경 오형근 주명덕 최정화 등 새롭게 부각된 사진과 매체를 선보였다. 99년 뉴욕 퀸즈미술관의 기획전 세계의 개념미술 : 근원의 지점들 1950-1980년전에 김용태 김용민 박불똥 성능경 최병수 등이 초대 전시되었다. 2001년 이용우가 뉴욕 미디어아트센터에서 기획한 전자단풍 :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인간언어와 디지털문화전에 한국작가로는 백남준 전수천 등이 초대되었다. 2003년 사계의 노래 : 8인의 한국작가전은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김영진, 김홍주, 조덕현, 황인기 등이 출품했다. 2004년부터 불꽃의 혼 : 한국현대도예 미국 순회전이 열렸다. 2009년 김선정이 기획한 당신의 밝은 미래전 : 한국현대미술 12인전이 LA 카운티미술관에서 열렸다. 특히 2009년 혼돈속의 조화-한국현대사진전은 텍사스 휴스턴미술관에 이어 2010년에는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미술관 순회전으로 이어졌다.

이상 연대별로 살펴보았지만 지면 관계상 언급하지 못한 전시가 많다. 이 글에서 언급하지 못한 전시들은 연표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국제전 수상 성과

국제전에 한동안 너무 많은 작가들이 출품되는데 상파울로비엔날레(69년은 18명), 인도트리엔날레, 방글라데시비엔날레는 두드러져 10명 이상씩을 내보내더니 그 후에는 줄었다. 커미셔너는 출품작가들이 번갈아 맡다가 미술평론가로는 상파울로비엔날레에 71년 이일, 77년 이경성, 79년 오광수가 참가하고 80년대 이후에는 평론가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는 처음 참가한 1986년 이일, 88년 하종현, 90년 이승택, 93년 서승원, 95년 두 번 째 이일, 97년 오광수, 99년 송미숙 등 미술가와 평론가들이 맡았는데 2000년대 들어서 큐레이터 출신들이 맡으면서 01년 박경미, 3년 김홍희, 5년 김선정, 7년 안소연, 9년 주은지, 2011년 윤재갑이 한국관 대표작가를 주제에 맡게 선정하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그동안의 국제전 성과로 상파울로비엔날레에서 63년 김환기, 65년 이응로, 73년 김창렬이 명예상을 받았다. 그리고 동경판화비엔날레에서는 66년 김종학, 72년 곽덕준, 79년 이우환 진옥선이 수상했다. 카뉴국제회화제에는 74, 75년 참가작품 국가상을 81년 안병석이 금상을 수상했고, 80년 김홍주, 81년 하동철 최태신, 87년 김용식, 89년 안창홍이 특별상을 각각 수상했다.
인도트리엔날레에서 78년 김홍석이 금상, 91년 서정태가 대상을 수상했는데 방글라데시비엔날레에서도 81년 심경자가 동메달, 83년 이석주 금상, 89년 박영하, 91년 안은숙이 명예상을 받았다. 그리고 국제아시아유럽비엔날레(터키)에서는 92년 윤동천이 금상, 조현재가 은상을 수상한 실적이 있다. 또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95년 전수천, 97년 강익중, 99년 이불이 연속적으로 특별상을 받았다.

한편 지역별로 보면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헨리무어대상전에 79년 이우환, 81년 심문섭이 우수상, 85년 이은규가 우쯔구시가하라미술관상을 받았다. 이강희는 아트도큐먼트 ’87에서 우수상, 도학회는 90년 로댕미술상전에서 우크로얄미술관상, 90년 오사카회화트리엔날레에서 한영섭 동상, 정경연 특별상 91년 박영대는 17회 동경전에서 대상, 차계남은 92년 국제덱스타일공모전 우수상 및 오사카조각트리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유럽에서는 특히 르살롱에서 김창락 63년 은상, 64년 금상, 73년 김용기 금상, 74년 이만익 은상, 75년 김종복 금상, 백수남은 81년 금상, 85년 외국인으로는 드물게 대상에 민간단체가 주는 테일러재단상까지 행운을 잡았다. 여기에 목우회 주관으로 1977-1985년까지 금상 27명, 은상 38명, 동상 36명이 수상했다. 이밖에 남관 66년 망똥회화비엔날레 대상, 이청운 87년 살롱 도톤느 대상, 몬테칼로국제현대미술대상전(모나코)에서 78년 강정완 대상, 85년 김주영, 88년 최은수, 91년 황영성, 93년 유승희 등이 수상했으며 79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1회 국제드로잉전에서 이건용 대상, 호앙 미로 국제드로잉전(스페인)에서 윤익영은 82년 대상, 김홍년은 83년 우수상, 85년 수상작가전에서 호앙 미로상을 받았다. 임봉규는 85년 여성의 찬미전(베를린)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판화는 여러 장르중 가장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데 동경판화비엔날레에서 66년 김종학, 72년 곽덕준, 79년 이우환 진옥선이 수상했다. 79년 영국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오세영이 특별상, 중화민국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83년 곽덕준, 85년 김익모, 카다케국제소형판화전에서 85년 장영숙 대상, 90년 조민 목판화부 대상, 와까야마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87년 지석철, 91년 강승희, 신장식, 삿포로국제현대판화비엔날레에서 91년 신장식이 수상했다. 93년 고지판화비엔날레에서 이민경 준대상, 루브리아나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김승연이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공예부문에서는 로잔느국제태피스트리비엔날레에 89년 소진숙 박애정, 92년 김홍석이 전시되었고 일본에서 열리는 현대종이예술공모전과는 인연이 깊어 89년 노은희 가작, 90년 유명균 준대상, 오명희 가작, 91년 유명균 대상, 양상훈 아카데미상, 오명희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외에도 해외 전시회에 수상작가들이 많으나 지면상 일일이 소개하기는 어렵다.
한편 국제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사례를 살펴보면 65년 상파울로비엔날레 김병기, 72년 동경판화비엔날레와 77년 카뉴국제회화제에 이일, 중화민국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83년 유근준, 85년 이경성, 87년 이일, 89년 윤명로가 참가했고 루브리아나국제판화비엔날레에 이용우가 89년 93년, 방글라데시비엔날레에서 89년 오경환, 91년 김서봉, 이경성은 91년 와까야마판화비엔날레와 삿포로국제판화비엔날레에 각각 참여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국내작가들이 외국의 유수한 국제전에 직접 초대받거나 김선정, 김승덕, 김유연, 윤재갑, 이원일 등이 기획한 전시들이 외국 미술관에 당당하게 입성하여 한국현대미술이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원일은 성곡미술관 큐레이터, 서울시립미술관 학예부장 역임 후 2005년 상하이 젠다이미술관 개관전 초빙감독, 2006년 상하이비엔날레 공동감독, 2007년 독일 칼스루에 ZKM 개관 10주년 Thermocline of Art-아시아현대미술제 총감독, 2008년 스페인 세비야비엔날레 공동감독, 2009년 체코 프라하비엔날레 공동큐레이터 등을 통해 국제적인 활동을 해오다 2011년 1월 51세로 타계하여 미술계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여기에는 새로운 성향의 평면, 사진, 미디어, 매체들이 소개되며 한국미술의 다양성과 세대 교체를 보여주었다. 전시국가도 1970년대까지 일본, 타이완, 프랑스, 미국 중심에서 확대되어 독일, 영국, 스페인, 중남미, 중국 등으로 세계 곳곳으로 넓혀졌다.

해외 진출, 정책 과제

이제 한국 현대미술 해외진출은 반세기를 훨씬 넘어 질적 양적인 발전을 반영해왔다. 1950-60년대 국제전에 참가할 비용조차 구하지 못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지금은 국가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국제교류재단 등이나 문화재단, 기업 등에서 지원하고 있다. 작가들은 스포츠의 국가대표 선수처럼 자부심과 미술의 위상을 높여왔다. 오늘 날 백남준 이우환이 한국에 거주했더라면 미술사에 남는 작가로 성장하지 못했다. 지금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강익중 김수자 김아타 김영진 서도호 양혜규 육근병 이불 이용백 전수천 최정화 등도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예술이 국력인 시대, 경제력은 예술의 교류 확대를 크게 뒷받침 한다.
미술작품은 문화유산이고 하나의 상품이다. 문화전쟁시대 해외전은 실적위주가 아니라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서 열리는 전시회이므로 무슨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고 평가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제기가 따른다. 동시대를 사는 국제화된 시점에서 이런 문제점을 신중히 검토하고 임해야한다. 이제 우리 현대미술이 당당하게 평가받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정책과 효과적인 홍보 전략이 필요하다. 국가적인 차원의 미술문화 정책에서 우리 문화예술의 위상을 위해
첫째 한국현대미술을 제대로 보여 줄 영문 사이트와 책자 발간,
둘째 외국의 미술관, 문화재단 등과 네트워크 강화,
셋째 세계무대에서 전시기획을 맡을 큐레이터 양성,
넷째 시각문화의 중심에 있는 순수미술의 지원책 등이 시급한 사안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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