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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미술평론가 (1)

김달진

내가 만난 미술평론가 (1)

이번 한국 미술평론의 역사전을 기획하게 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술하면 작품을 창작하는 미술가만을 생각한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했다. 미술가의 작품 활동을 보여주는 전시회는 끊임없이 계속 열린다. 전시를 통해서 세상에 보여지고 평가되고 판매되고 유통을 거쳐 보존되는 과정을 통해 좋은 작품이 문화유산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런 미술활동을 평가해주고 어렵다는 미술을 일반인에게 소통시켜주고 미술의 흐름을 앞서 끌어주고 북돋워주는 역할을 해오는 미술평론가에 대한 관심은 소홀했다.

미술평론가들의 활동은 글을 써서 발표하는 일이다. 그러나 글을 발표할 지면인 신문에서 고정적인 전시회 평이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어쩌다 신문사에서 기획한 블록버스터 전시에 대해 의뢰받아 쓰거나 미술잡지에 청탁받은 주제, 작가론, 전시 리뷰를 쓰는 일로 한정되어 있다. 그 외에 세미나 주제발표나 전시회를 앞둔 작가들의 개인전 서문을 쓴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에서 계간으로 발행하는 『미술평단』에 의존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발표할 지면이 부족하다. 업계의 원고료도 동결된지 오래이다. 새로 글을 써서 평론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고 발표했던 글을 묶어 출판해도 팔리지 않으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평론가로 평생 살아도 저서 한 권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도 크다.
 
미술평론가들의 활동은 이렇듯 위축되고 잊혀지기 쉽다. 이런 아쉬움에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큐레이터, 미술이론가들을 확대하여 저술가, 행정가 등을 포함하여 2010년에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펴낸 『대한민국미술인 인명록Ⅰ』안에는 창작미술인 외에 비창작미술인으로 분류하여 524명을 수록하였다. 그동안 미술연감 등이 미술평론가 인명록에 몇 십명이 수록된 숫자를 비교한다면 획기적인 일이었다.

미술평론가는 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 강사, 미술관 행정 책임 운영자인 관장,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의 역할을 해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덕수궁시절에는 서무과와 전시과 2개과가 있었으며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가 없고 오광수에 이어 유준상이 전문위원이란 직함으로 전시과의 전시업무를 자문했다. 그 후 1986년 과천으로 이전하여 직제가 30명에서 100명으로 증원되며 15명의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 등 학예직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예연구실이 생겨나며 미술평론가였던 유준상, 박래경이 학예연구관으로 임용되어 1, 2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1969년 개관하여 그동안 행정직이 관장에 임명되었지만 1981년 대통령령에 의해 국립극장, 국립현대미술관, 국립국악원의 문화예술기관장이 그 분야 전문인이 임용되었는데 최초의 전문직관장으로 홍익대학교 교수였던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선임되었다. 역대 국립현대미술관장에 미술평론가로 이경성, 임영방, 김윤수, 오광수가 관장을 역임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개관한 서울시립미술관은 초대관장으로 유준상 관장이 임명되었다.

 그동안 직접 만났던 미술평론가와의 일화, 소장자료들의 행방, 혹은 잡지에 게재했던 인터뷰한 목록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경성(1919-2009) 선생과의 인연은 고교시절 미술자료 수집을 이어나가기 위해 여러 곳에 편지를 보내던 중 당시 홍익대 박물관장인 그 분에게 회신을 받은 것으로 시작된다. 서양미술전집, 화집, 단행본, 잡지, 신문 등에서 오려 모아 만든 서양미술전집 스크랩북 10권을 보자기에 싸 찾아뵈었던 내 모습을 기억하셨다가 그 후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직관장으로 일하시게 되면서 나를 임시직 공무원 신분으로 자료실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셨다. 1981년 덕수궁 석조전 미술관 동관 1전시실에 전문위원실·자료실 명패를 붙이고 전문위원으로 오광수, 자료담당자로 안계성 선임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나라 미술평론가 1호이자 한국근대미술에 대한 연구논문, 미술평론, 미술행정의 개척자였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두차례 역임했으며 평생 24권의 저서와 ‘여기로 그린 그림’으로 개인전을 12회를 가졌다.
내가 2002년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했을 때 ‘이경성 칼럼’을 2년간 기고하여 힘을 실어주셨다. 나는 석남 고희와 미수 기념 논총에 연보 저작목록을 작성했고 선생이 설립한 석남미술문화재단의 이사로 참여했다. 석남미술상 수상작가 선정 및 작품전, 미수논총 발간 등을 도우며, 개인적으로는 말년에 선생이 평창동 노인간호센터에 거주할 때 정기적으로 찾아뵈었었다. 이런 일화는 경향신문(2002.2.18.), 미술세계(2002.6)에 기사화된 바 있고 내가 운영하다 중단된 이경성 미니홈피가 지금도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이경성 관장은 성품이 온화하셨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며 존경했다.

 
정병관(1927-2017) 선생은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했고 200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개관 후 내방하여 본인이 육필로 적어주신 약력을 받았다. 노년에 토탈미술관에서 몇번 뵈었고 말년에 제주도를 왕래하셨다. 직계가족이 없어 그의 부음을 내가 직접 언론에 알렸으며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 내방했을 때 찍은 사진으로 그의 영정사진을 대신했다. 그의 사후에 소장하던 자료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기증되었다.

 
방근택(1929-1992) 선생은 우리나라 앵포르멜 회화의 옹호자였고 본인 또한 1955년에는 광주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내가 『월간 전시계』에 근무하던 시절인 1980년 「미술시평」원고 청탁을 해서 선생을 장위동으로 찾아뵈었던 기억이 있다. 우람한 목소리의 언변과 박서보의 묘법을 비평하던 그의 강직한 성격이 떠오른다. 사후에 그의 장서는 강사로 가르쳤던 인천대에 기증되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천대 차기율 교수를 통해 인천대에 기증된 3,000여 권 목록을 받아보았으며 양서, 일서가 많았다.
 

유준상(1932-2018) 선생은 내가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 근무 때에 전문위원으로 1985년 부임했고 미술관이 과천 이전 후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했다. 색상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전통색채자료전》을 주관했고 그 후 서울시립미술관의 초대 관장으로 2002년 《한민족의 빛과 색》 전시로 개관했다. 미술관 학예실장 재직 시 학예실 이인범 씨가 ‘박물관연구’를 주제로 논총을 추진했지만 백지화 되었다. 홍지동으로 이전한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 내방하신 적이 있고 서울 서초동에서 경기 용인으로 이사 하셨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2018년 3월 용인 자택을 방문했을 때 사모님이신 손선희 선생께서 사진과 여러 자료를 꺼내서 필요한 것들을 내게 고르라고 하셨는데 방에 계셨던 유선생께서 응접실로 나오셔서 ‘내 정리해서 김달진이에게 줄텐데 손 대지 말라’고 하셨었다. 손선생은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절대 어렵다고 하셨는데, 정말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설문에 대한 육필 답변서를 기다리고 있던 중 타계 하셨다. 그날 이번 전시개요를 읽어 보시며 훈장증서, 사진, 저작물 복사본, 자료를 기증받았고 마지막 육필 원고가 된 이정지 전시회 서문을 받았다. 생전에 유선생은 나를 만날 때면 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시곤 했다.

 
김인환(1937-2011) 선생은 전시장에서 어쩌다 보면 인사를 드리곤 했다. 2009년 봉천동 자택에 가서 미술자료를 기증받고, 사후인 2013년에는 용인에 가서 사모님을 통해 2차로 자료와 육필원고를 기증받아 왔다. 기증자료에는 1914년 영국 John Murray가 출간한 『History of painting in Italy』도 있다. 말년에 경제적 도움이 될까 싶어 김선생이 미술문화원에서 펴낸 『폴 세잔』 책 판매를 한국미술협회와 몇 곳에 의뢰하기도 했다

 
이구열(86세) 선생은 한국근대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나에게 한국근대미술연구소에서 펴내는 『한국근대미술연구』는 흥미로운 무크지였기 때문에 1977년 서대문구 충정로3가 백왕사인쇄소에 있던 한국근대미술연구소로 찾아가 선생님을 뵙고 일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1992년 『이구열회갑기념논문집』에 연보를 작성했다. 수십년간 수집했던 미술자료를 삼성미술관 리움에 기증하여 1999년 한국미술기록보존소가 설립되었다. 보존소는 처음 안국동로터리 송현동 풍문여고 옆 부근에 개소하여 2002년 운니동 현대그룹 건너편 옛TBC 자리 지금 래미안갤러리 부근으로 이전한 후 2005년 용인 호암미술관 안으로 옮겼다. 그후로 세종문화회관 뒤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몇 번 찾아 뵈었다. 우리 박물관도 내방하여, 용하게 잘 꾸려나간다고 격려도 받았다. 이구열, 이일, 유준상은 동갑내기로 두 분은 떠났고 2018년 3월에 찾아 뵈었을 때에도 컴퓨터 앞에서 직접 워드작업을 하고 계셨다. 또 다른 책을 준비하는 일이 본인의 소일거리라고 하셨다.

 
박래경(83세) 선생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으로 부임해온 과천시절부터 알았다. 미술관을 떠난 후 그는 우리문화연구회를 조직하여 몇 건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한국큐레이터협회 산파역할을 했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200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개관 후 후원회를 조직할 때도 직접 실제적으로 후원을 많이 할 수 있는 미술계 외부 인사를 살펴주셨지만 쉽지 않았다. 그보다는 미술계 분이 맡아 주셔야한다는 의견 속에 흔쾌히 회장직을 수락해주셨다.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의 축사를 해주셨고 후원회 이사회, 정기총회를 주관해주셨다. 미술사를 전공하셨기 때문에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계셔서 많은 힘을 실어주셨다. 나는 2015년 『박래경 팔순논총』을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발간하였고 간사를 맡아 출판기념회도 주관하였다. 박선생은 소장하고 있던 작품 몇 점과 자료도 기증해주셨다. 2018년 건강하시지만 보행이 불편하셔 후원회 회장을 사임하신 후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윤수(82세) 선생은 1980년대 초 구기동에 있던 서울미술관 관장으로 계실 때 처음 만나 뵈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유럽의 신구상 회화를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민중미술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번 《한국 미술평론의 역사》전과 관련하여 2018년 2월과 4월 두 차례 자택을 방문했다. 기억력이 많이 감퇴하였고 집안 서재에는 여전히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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