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이경성 관장을 회상하며

김달진

미술계의 거목, 그 미소와 안목이 그립다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이경성 관장을 회상하며

 

인천시립박물관이 1946년 4월 1일 개관 후 70주년을 맞이한다. 그 기념행사 중 하나가 초대관장인 이경성 관장(1919-2009)의 흉상 제막식이다. 이경성은 인천 출신으로 1945년 10월 인천시립박물관장 발령을 받고, 1954년 3월까지 초대관장으로 재직하며 박물관의 초석을 다지고 많은 정신적 유산을 남겼다. 재직 시기인 1949년부터 인천의 고적을 답사하며 「서곳지방 고적답사기」, 「문학산 방면 고적답사」, 「남동방면 고적답사기」 등의 글을 남겨 그것을 후에 「인천고적」이라는 제목으로 『인천공모』에 연재하기도 했다.

석남 이경성 관장, 사회와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에 대한 안목을 지니셨던 분, 그러면서도 후학들을 향해 격려가 담긴 미소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이경성 관장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전시미술을 보고 민주신보에 「우울한 오후의 생리」란 글을 기고하여 미술평론가로 등단했다. 몇몇 화가나 문인들이 작품과 전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본격적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1961년 『미술입문』을 발간한 후 『한국미술사』, 『한국근대미술연구』, 『현대한국미술의 상황』, 『근대한국미술가논고』,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등 24권의 입문서와 비평서를 펴냈다. 이를 통해 미술비평이라는 분야의 길이 열렸고 한국근현대미술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또 미술교육자로 1956년 이화여대 조교수를 거쳐 1961년부터 홍익대 교수로 지냈고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하기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관장이란 직함은 그 후 워커힐미술관, 일본 소케츠미술관 명예관장, 서울올림픽미술관장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 시작한 그림은 생전에 11회의 개인전을 가지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석남은 나의 은인

사람은 살아가며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행보가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석남 이경성 관장은 내 인생의 행보에 길잡이가 되어주신 은인이시다. 나는 중학교시절 여성잡지에서 명화가 칼라화보로 실려진 것을 뜯어 모으면서 미술자료수집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상경하여 청계천 헌책 서점가에서 서양미술전집, 미술교과서, 미술서적 등을 사 모았고 『서양미술사』 (이영환 著, 박영사 刊)를 보며 서양미술 스크랩북을 만들어 갔다. 그 당시 사서 모으고 오려서 칼라켄트지에 붙이며 스크랩북 10권의 전집으로 꾸몄다. 내 나름대로 그렇게 미술공부를 하며 이경성이란 어른을 알게 되어 동경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이런 수집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미술평론가, 미술기자, 화랑대표, 미술관계자에게 우편으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었다. 그 와중에 스크랩북을 보자기에 쌓아가지고 홍익대 박물관으로 찾아가서 큰절을 하고 만난 것이 관장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 내 모습을 좋게 봐주시고 격려하고 기억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석남이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부임한 후 추천으로 나는 임시직 일용잡급으로 미술관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자료실에서 근무하며 만학으로 34살에 서울산업대(현 서울과학기술대)와 중앙대 예술대학원을 석남문화재단의 등록금 지원으로 마쳤다. 그 덕수궁 석조전 동관 제1전시실에 전문위원실, 자료실 문패가 달리고 미술자료수집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술관에는 큐레이터는 없고 오광수 선생이 전문위원이란 직함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석남은 두차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며 학예직을 만들고 작품 수집 연구, 교육으로 미술관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

 

 관장은 타계하시기 전에 여의도에서 지금 헌법재판소 건너편에 한국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평창동 노인간호센터에 계셨었다. 매주 토요일이며 아내와 함께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찾아뵙고 저녁식사를 함께했었다. 선생은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자주 말씀하셨고 “자료, 팸플릿 한 부라도 지금은 하찮아 보이지만 어느 때에는 중요한 역사의 근거가 되므로 꼼꼼히 보존하는 게 좋다”고 격려해주곤 하셨다. 대화중에 어떤 작가인지 얼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내게 물어보실 때 그 작가의 특징을 이야기해달라고  재차질문을 해서 작가 이름을 알려드렸다. “역시 자네는 컴퓨터야… 나는 20세기 사람이라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유난히 자장면, 피자 등을 좋아하셨다. 몸에 좋지 않다는 밀가루 음식을 드시는 것이 염려되었지만 어느새 좋아하는 음식을 드시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이해하게 됐다.

 

석남 타계, 그 후 7년

석남 타계 6주기가 지나고 7년째이다. 2009년 11월 27일 미국 뉴저지에서 타계 후 국립현대미술관의 빈소설치는 무산되고 인천시립박물관 주관으로 홍익대에서 노제를 지내고 이연수모란미술관장의 배려로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 산소가 모셔졌다. 2010년 2월 생신에 맞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추모세미나가 있어 오광수, 김현숙, 조은정, 최은주가 발제하였다. 10월 모란미술관에서 1주기 추모세미나는 이인범, 최태만, 목수현이 연구 발표했다. 2010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해방전후 비평과 책》 기획전에서 선생의 저서, 50년대 비평, 생애사진 등을 전시했다. 2012년 인천시립박물관은 석남 3주기 추모전 《이경성, 그 사람》을 인천문화재단과 공동으로 4부로 나누어 아카이브, 유품, 작품 등을 가지고 삶과 작품 세계를 탐색하고 초대관장의 업적을 추모하며 90쪽 단행본을 발간했다. 2010, 2011년 미국 뉴저지 리버사이드갤러리에서 두 차례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석남미술문화재단은 1988년에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던 고희기념전시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을 판매하고 삼성문화재단이 도움을 준 것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재단 설립 이전에도 석남미술상은 한국미술평론가협회에서 주관하여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이란 이름으로 35세 미만의 젊은작가들에게 주는 상으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81년부터 2006년까지 30명이 수상하며 권위를 인정받았다. 매년 11, 12월 사이에 발표하여 이듬해 관장의 생신에 맞춰 시상식과 수상작가전을 열어 수상자가 신예로 주목을 받았다. 수상자 중에는 대학교수로의 임용이 많아서 우스갯소리로 석남미술상 수상을 교수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이 상이 중단위기에 놓였을 때 조우성 인천신문 객원논설위원(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인천일보(2009.6.5)를 통해 인천에서 계승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석남미술문화재단은 2009년 유족에 의해 오광수, 박서보, 홍라희, 김영호, 임히주, 김장섭, 김달진 이사에서 이은다, 박경호, 안귀숙, 이은숙 이사로 교체되었다. 2005년 김달진, 정준모, 조은정, 최열, 최태만에 의해 제정된 ‘석남미술이론상’은 3회 시상했으나 유족의 명칭 사용 반대로 중단되었다. 2013년에 몇 사람에 의해 ‘석남을 기리는 미술이론상’을 제정하여 2015년까지 두 차례 시상식을 가졌다. 매년 11월 27일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관장의 추모식을 갖는다. 현재 딸 은다 씨와 사위, 손녀는 미국, 남동생 경남 씨가 캐나다, 여동생 복숙 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몇 년 전 산소 봉분이 석관으로 교체되었다. 

이번 새얼문화재단에 의해 세워지는 흉상 이후에 멀지 않아 이경성 전집이 제작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 인천시립박물관 70년 1946-2016  113쪽에 수록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